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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에서 잠 못 이루고 있을 재범에게
게시물ID : humorbest_2454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ㅁㄴㅇㄹΩ
추천 : 76
조회수 : 9880회
댓글수 : 13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9/09/09 16:07:51
원본글 작성시간 : 2009/09/09 11:25:1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13144&CMPT_CD=P0000 출처. 오 마이 뉴스. --------------------------------------- 지금 내 생각과 비슷한 입장에서 올라온 한 기사 --------------------------------------- 황당해하거나 기분 나쁜 일로 끝냈어야 '재범'의 발언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의 발언은 적잖이 황당한 것이었다. 또한 한국인을 근거 없이 비하하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 터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황당해하거나 잠시 기분 나쁜 걸로 끝냈어야 했다. "별 바보 같은 넘도 다 있네" 하든지, 아니면 좀 더 심하게 그의 부모를 탓하며 가정교육을 문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는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문제의 글은 연습생 시절이던 4년 전에 친구와 대화 형식으로 올린 것이었다. 또한 그가 교포 2세라는 특수한 정황도 마땅히 참작되었어야 했다. 고등학생으로 한국에 와서 외롭게 지내며 고국의 낯선 풍토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18세 소년의 넋두리 정도로 봐준다면 얼마든지 봐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처음 한국 사회가 매우 거칠고 배타적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 "가족들도 다 미국에 있었고 한국 와서 주위 사람들은 다 저한테 냉정하게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언제 데뷔할지도 모르고 너무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여러 가지 상황들 때문에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집이 많이 그리웠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들어서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대해 표현했던 건 제가 당시 제 개인적인 상황이 싫어서 감정적으로 표현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어려서 정말 잘못 표현했습니다. 그때는 철도 없었고 어리고 너무 힘들어서 모든 잘못을 주위상황으로 돌리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 글들은 4년 전이었고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앞으로 이런 실수가 다시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재범'의 사과문 중에서) 이렇게 절절한 사과를 한 22세 청년에게 무려 1만 개나 되는 댓글을 붙이고 별의별 저주의 언사를 퍼붓더니 그것을 신문지상에 보도함으로써 파문을 확대 재생산하여 결국 가수 생명을 단절케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사란 말인가. 이런 것을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백번 양보하여 애국심이라고 해도 애국심 또한 인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따라서 이것은 심한 말로 해서 '광기'가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될 수 없는 행태라고 본다. 어깨가 축 처진 채 풀 죽은 표정으로 인천공항 출국장으로 들어서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 땅의 기성세대로서 가슴이 아프고 낯이 뜨거워 더 이상 할 말을 잃는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을 그에게 보내는 편지로 대신한다. 시애틀에서 잠 못 이루고 있을 재범에게 먼저 '재범'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라네. '재범'은 이미 팬들 사이에서 애칭이 되어 있는 것 같아 나 역시 친근감의 표시로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네. 일단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고 싶네. 재범군의 고국 한국은 알고 보면 참 좋은 게 많은 나라이지만 아직 재범군이 모르고 있거나 실감하지 못하는 특이한 점도 있는 나라라네. 파시즘의 나라 이탈리아의 소설가 겸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10세 소년이던 1942년, 청소년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네. 글짓기의 주제는 '무솔리니의 영광과 이탈리아의 불멸적 운명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였네. 에코 자신의 표현을 빌면, 소년 에코는 이 질문에 '아주 거만한 수사'로 그렇다고 답해서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하네. 에코처럼 '거만한 수사'는 못 되지만 우리 한국인들 중에서 어르신들은 어린 시절 '이승만 대통령 할아버지께 올리는 편지'를 쓰며 자랐다네. 이 글을 쓰는 나만 해도 초등시절에는 매주 월요일 아침 운동장에서 애국조회라는 것을 하면서 어린이회장 친구가 낭독하는 반공을 국시의 제1로 한다는 '혁명공약'이란 것을 들었다네. 조금 더 커서 중학 시절에는 국민교육헌장이란 게 생겨서, '우리는 민족중흥과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알았고, 국기 앞에서는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곤 했지. 학교 규율을 통해 이 초라한 수사(修辭)를 어린 학생들에게 외우도록 강제했던 인격화된 정치권력은 이제 가고 없지만, 그들의 의도는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이상 임지현 저 '우리 안의 파시즘' 인용, 참조) 재범군을 위로하려고 쓴 글인데 너무 심각한 담론으로 나간 것 같군. 다른 이야기를 하겠네. 자네처럼 어린 나이에 미국에 가서 살았던 분 중에 강동석이라는 음악가가 있다네. 그는 나와 비슷한 연배이지.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일찍부터 바이올린에 천재성을 보였다네. 가난한데도 줄리어드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대가 갈라미언이 그의 연주 테이프를 듣고 반했기 때문이라네. 피와 땀의 노력 끝에 한국 소년은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 여기저기 콩쿠르 참가와 연주 일정이 잡혀갔다네. 누구나 조금만 더 하면 대성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 그러는 사이 20대 초반의 나이가 지나갔고 그러자 그의 조국은 곧장 병역기피자로 낙인을 찍었다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고국에 오지를 못했어. 굴지의 콩쿠르인 엘리자베드 대회 입상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면서 세계적인 연주자로 입신했다네. 외국인들은 그를 윤이상, 정경화와 함께 한국의 3대 음악가로 꼽을 정도였지. 하지만 그는 15년 동안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타국을 유랑하면서 연주 생활을 해야 했다네. 1983년 대한민국 음악제가 열렸는데 그의 조국은 세계적 연주가가 된 그를 정식 초빙하기에 이른다네. 그는 예술의 전당에서 '브르흐'(Bruch)를 연주했지. 그것은 실로 한국 연주사에 기록될 정도로 탁월하고도 비장한 연주였어. 그는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오지 못하게 한 조국의 무대에 나이 40이 되어서야 서게 된 격정을 토로했던 것이지. 수천 명의 청중은 그에게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냈다네. 재범군, 자네의 조국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런 곡절을 숱하게 가지고 있는 나라라네. 유승준군만 하더라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보네. 자네를 몰아낸 것은 누리꾼이 아니라 '은폐된 파시즘' 이번에는 내 이야기를 조금 할게. 고등학교를 마친 나는 육군에 가서 아침마다 멸공구호라는 것을 복창하며 35개월이나 병역을 치렀다네. 이것은 내 형님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어. 그러니까 내 어머니는 10년 동안 아들을 군대에 보낸 셈이었지. 그리고 이런 삶은 대부분의 한국인이 공유해야만 했던 것이라네. 불행히도 이런 삶은 한국인들의 집단적 기억을 조작하여 현재를 이해하는 틀을 은연 중 만들었다네. 이것을 '은폐된 파시즘'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어.(임지현) 이 '은폐된 파시즘'은 학교와 가정과 직장에서 국가주의의 세례를 거친 대중들의 정서와 결합되어 다시 큰 파장으로 증폭되어 기성세대건 신세대건 별반 다르지 않게 되었다네. 자네를 몰아낸 것은 누리꾼들이 아니라 바로 이 괴물이었다고 생각해 주었으면 하네. 그러니 이 불우한 조국을 경멸만 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이해해주기 바란다네. 아니 재범 군이 그런 큰 틀의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네. 불현듯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는군. 그 아름다운 영화의 제목을 이런 우울한 일에 패러디하게 될 줄은 몰랐다네. 재범 군, 지금은 정말 잠 못 이루며 좌절하고 있을 테지. 이 상처가 빨리 치유되지는 않을 걸세. 하지만 가급적이면 하루속히 조국에 다시 와서 더 큰일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네. 내가 강동석 아저씨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바로 이런 간절함 때문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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