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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파의 이야기4
게시물ID : gomin_2741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메이파
추천 : 0
조회수 : 24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1/29 10:26:47
음...굳이 고민게시판에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뭐랄까...
고민을 하시는 분들도 여러 유형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 중에 제 인생 이야기를 보면서 뭔가 해답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오히려 절 아는 사람에게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차라리 불특정 다수에게 해서 공감할 수 있는 분이라면 공감해 주실 수 있을까 하는 
발칙한 기대로 쓰는 글입니다.
여러번 말했지만 저...속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이제...
유대감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금새라도 위태로운 가족이나 
자신의 앞가림도 힘겨워하는 친구들에게 
제 인생의 무게를 나누어야만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참 생각없고 이기적인 글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아무도 봐주지 않을지라도 이제 쓰는 걸 멈출 수도 없네요.
왠지 모르게 시리즈물이 되어 버렸고 혹시라도 열심히 봐 주시는 분이 있을까봐서요.
잡설은 이만 하고, 네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갑작스런 통보는 사건이 터지고 나서 대략 열흘만이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한국부 가운데에도 주로 서류 관련 처리를 하는 조선족 선생이 있었는데
(물론 종교를 통한 연줄이지만요.)
그 선생이 저에게 와서 너희 어머니의 요청으로 내일 아침 비행기표를 끊었으니
한국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공항까지는 물론 데려다준다고 하더군요.
이 갑작스런 소식에 저와 남동생은 머리에 ?표가 백개는 켜진 듯한 아우라로
사무실 전화기로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가 학비랑 너네 내놓으라고 했어. 그러니까 그 말대로 오면 된다."
"아...네."

뭔가 너무도 허무할 정도로 쉽게 해결이 되어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저희 둘만이 아니라 저희 지인(어머니의 친구십니다.)분도 같이 항의를 하여
우선 저희 둘이 오고 어머니의 친구 아들이자 우리 패밀리 넷 중 한명도 
곧 저희와 같은 조건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하더군요.
나머지 한 명, 남동생과 동갑인 친구는 부모님이 매우 독실한 기독교라
오히려 우리 부모님과 반대 입장에 섰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가 쓸쓸히 저희에게 '아, 진짜 우리 부모님 정말...' 이라고 투덜댔습니다.
그 친구가 좀 걱정되긴 했습니다. 원래 아이들과 그리 원만한 관계는 아니었고
자기 고집도 강한데다 이번 일로 우리와 밀접했던 이 아이에게
뭔가 보복이 돌아가지 않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결정나버린 상황에서 우리가 뭔가를 해줄 수는 없었습니다.
마치 한국부 목사 전체와 전쟁이라도 벌일 듯했던 호기로운 우리 형제도
따지고보면 아직 미성년자였으니까요.
우리는 그 즉시 아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우리와 대립하던 남자아이들과 형도 진심으로 굉장히 섭섭해했습니다.
저희만이 아니라 그들도 중간에 목사들의 농간으로 우리와 대립구도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짐작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더 기분이 묘했습니다.

제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국부엔 목사 세력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한국부의 목사는 기존 중국의 학교 내에 있었던 만큼,
한국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목사들과는 별도로 학교 소속인 조선족 선생이었죠.
이분들과는 매우 친근했습니다. 나이도 비교적 젊었고 당시 학교 외부와도 상당히 단절되었던
우리에게 이분들만큼 중국에 대해 상세히 말해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죠.
물론 중국 아이들과 기숙사를 같이 쓰기는 했지만 한국 학생들 대부분이 그다지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시기였기에 그나마 한국말로 교류가 가능한 중국의 소식통이었죠.
저희와도 많이 친했고, 그래서 매우 섭섭해 하셨습니다.

"정말, 한국부 선생님들 이해 못 하겠어."

한 남자 선생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학생이 이 학교를 나간 것이 저희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학교에 대해 툭 내뱉듯이 안 좋은 소리를 했다가 쫓겨난 여자아이가 아직 유학을 시작해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한 명 있었고, 저희가 두번째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도 저 선생들은
그러한 말을 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문득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한국부 선생들이 기독교인인 거 아세요?"
"알지. 주말마다 저렇게나 난리를 치는데 모르겠나."

목사들이 신신당부했던 말 중에 하나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은 불법이고, 타 중국인들이
한국부의 실제 목적인 포교에 대해 알게 되면 자칫 큰일이 날지도 모르니 특히 이 조선족 선생들 앞에선
성경도 꺼내지 말라고 했었지요. 하지만 애초에 이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저도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장난스레 저와 제 남동생의 성적표에 나온 점수를 더 높게 적어주며
그 선생은 말을 이었습니다.

"난 솔직히 기독교는 잘 모르고 이해하진 못하지만 딱히 나쁘다고도 생각 안해. 한국에서는 많이들 믿는
모양이니까. 근데 그걸로 학생을 핍박한다면 중국에서 종교를 탄압하는 것과 뭐가 다르지?"

아...정말 내 입장만 아니라면 이 말을 그대로 목사들에게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의 본질적 문제 밖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본질을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걸 
그때에야 깨달았습니다. 

여자아이들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저와 굉장히 친했던 세 명의 여자아이가
정말 많이 슬퍼했습니다. 
"오빤 모르겠지만 나 진짜..." 
라고 하면서 세 아이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뭘 몰랐는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뒤부터 저녁 내내 그 아이들에게
끌려다니듯 배회하며 함께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두 명은 남동생과 동갑인 여자아이, 그리고 한 명은 저보다 네 살 어린, 당시에는 아직 중학생인
아이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이라면 오히려 사회적 격차가 큰 신분차이의 아이들이기도 했습니다.
남동생과 동갑인 두 아이도 집안이 잘 나가는 사업가라고 들었던 것 같고, 네 살 어린 그 아이는
처음엔 그냥 나보다 키가 큰 여자아이 정도로(이후의 인생에서도 저보다 키 큰 여인네들이 많더군요.)
생각했지만 할아버지가 국회의원이시더군요. 제가 군대갔을 때 돌아가셨단 소리를 들었는데,
개인정보를 생각해 실명은 공개하진 않겠습니다.

어쨌든 그 아이들의 집안이 그러거나 말거나 제 눈에 보인 그 아이들은 그냥 애들이었습니다.
의지할 곳 없는 이곳에서 어쩌다 저와 말을 섞게 되고 또 고민을 서로 나누다가 친해진 아이들.
그 아이들이 저를 이성으로 생각하여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제 눈에 비친 그 아이들은
단지 절 아버지 대신을 이성적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의 호감을 진작
알아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어요.
게다가 저에게 조카뻘로 어린 것도 아니었는데 너무나 아이로 보인 나머지 
저 아이들의 저 착각을 내가 이용해선 안되니까...라며 몸에서 사리라도 나올 듯한 
괴상한 생각을 해버렸습니다. 나중에 이성에 눈을 뜨고 한 1년 정도 후회했죠.^^
개신교란 점을 빼면 그 여자아이들보다 좋은 여자는...지금 여자친구를 제외하곤 만나본 적이 없네요.
단순히 집안 문제 뿐이 아니라 사고가 굉장히 진취적이었으니까요. 어린 마음에도 굉장히 놀랐어요.
대단한 아이들이라고...

어찌 되었건 저는 어차피 떠나게 되었고 그 아이들은 집안 문제가 복잡히 얽혀서 어차피 이곳을
나올 수는 없는 아이들이었기에 아마 이대로 영영 이별일 확률이 높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죠.
전 그때는 그저...헤어지는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지긋지긋할 만큼 목사들과 싸우고 아이들을 윽박지르긴 했지만 그만큼의 애정도 쌓였던 건 사실이고
이제 우리처럼 목사들에게 맞설 사람이 더는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 아이들이 별 탈 없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렇게 사진도 찍고, 손이 잡힌 채 끌려다니다가, 혼자 짐 싸던 남동생이 마침내 짜증을 내며 
저에게 쌍욕을 날릴 즈음에야 저는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새벽이었습니다. 아직 기상 시간은 한참도 전인 그런 시간에 우린 일어나서 짐을 들고 
참 정이 많이 들었던 기숙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기숙사 앞에는 우리가 타고 갈 차량과 그 세명의 여자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기상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차림새도 깔끔한 것을 보면 
얼마나 일찍 일어나서 기다렸을지 뻔했습니다.
한명 한명과 포옹을 하며 새삼 이 아이들이 어째서 날 이렇게 좋아하게 된 것인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분명 이 아이들은 처음에 나보다 남동생에게 더 호감이 있었을 겁니다.
질투날 정도로 남동생은 잘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남동생은 자신의 주변에 늘 벽을 치고 사람을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저에게 접근해 계기를 만들려 했겠죠. 전 어디서나 모두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이 아이들은 어느새 절 좋아하게 된 것이죠.
만일 남동생의 성격이 조금만 더 다정다감했다면 이 아이들이 지금 포옹하는 상대는 
아마 남동생이었을겁니다.
하지만 지금 남동생은 참 꼴보기 싫다는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떠나기 전에, 중국식 소형버스는 한국부 건물에서 일단 멈췄습니다.
기숙사에서 한국부까지 거리가 멀진 않았지만 일단 여자아이들까지 차를 같이 탔습니다.
한국부 앞에는 목사들 내외가 여럿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 선생도 물론 같이 있었죠.
미안하다느니 다른 곳에서 잘 되길 바란다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짧게 지나갔습니다.
저희는 어차피 떠나는 사람이고, 더 이상의 왈가왈부는 의미도 없고 도움도 되지 못하니
서로가 서로에게 조심하는 희한한 상황이었습니다.
여자아이들은 공항까지 우릴 전송해주고 싶다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상해 푸동공항으로 향하는 차에 올라 모두에게 작별을 고하고
차 문은 곧 닫혔습니다.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여자아이들은 출발하는 차 뒤를 쫒다가 이내 멀어지며
자신들끼리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내내,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까지도
생생히 뇌리에 박혀왔습니다.

안녕, 강소성(江蘇省)의 무석(無錫)과 태호(太湖).
안녕, 여호와보다 여호와의 힘을 믿었던 목사들.
안녕, 함께하는 동안 나를 좋아해 주고 의지하던 아이들.
이제 다시 볼 기회는 없겠지.
우린 당신들의 믿음에 정면으로 맞서고 떠나는 거니까.
중국어의 작별인사 再見(Zaijian)은, 그래서 쓰지 못한 것이니까.
서로 다른 곳에서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1부 무석편 끝>

<2부 북경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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