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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왜 우리는
게시물ID : humordata_9830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덜익은곧휴
추천 : 6
조회수 : 68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1/29 10:30:30
점점 잊고 사는건가요 ------------------------------------------------------------------------------------------------------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들, 그리고 그들의 유언 이번에는 설명도 추가했습니다. 저번보단 글이 다소 긴 편이지만 끝까지 읽어주세요. 채응언 (대한민국 마지막 의병장) 부하 3~400명을 둔 의병장으로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각 도에서 항일전을 전개했다. 당시 채응언의 활약으로 인해 200명 이상의 일본헌병과 일제에 아부하던 부일한국인 밀정 등이 처단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 채응언 선생의 법정 진술 中 (1915. 8) "자기 나라를 위하고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자를 강도, 살인이라는 오명을 씌우는 법률에 불복한다. 위업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슬퍼할 뿐 의로써 죽는 것에 추호도 여한이 없노라." 김복한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당시 벼슬을 버리고 낙항하였다. 그 해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설,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이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석방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이설과 함께 이완용 등 매국노 처단을 상소하여 다시 투옥, 뒤에 석방되었다. 1906년 민종식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서울 경무청에 수감,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1919년 3월, 유림 대표로 곽종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 선생의 법정 진술 중에서 (1896. 2. 25. 고등재판소) > "나는 대대로 녹을 받은 신하의 후손으로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평소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갑오년 6월 이후에는 시골에 칩거하여 평생 자정하고자 하였더니, 지난 해 8월의 대변(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르러서는 원통하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조금도 살 마음이 없던 중, 다시 11월 15일의 사변이 일어났다. 이 역시 흉악한 역신들의 소행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의 욕됨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신민된 자의 박절한 정이 격동하여 시세와 역량도 헤아리지 못하고 복수하고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을 도모함에 있어 치밀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가볍게 일으켰다고 죄를 준다면 달게 받겠다." 김원봉 김원봉 선생은 오직 무력을 통해서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1919년 길림성에서 13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 그는 의열단을 이끌며 조선총독, 총독부 고관, 친일파 등의 암살과 부산경찰서, 밀양경찰서, 종로경찰서,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과 같은 일본 관청의 파괴를 지휘했다. <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연설하신 말씀 中 > "총독부 관리층 이들은 조선 혁명운동에 있어서 완전히 반동적이고 일제에 대한 철저한 귀화분자이다. 일제가 조선 민족에 대해 착취와 압박의 제정책을 실시함에 있어서 이들은 그 말초신경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바 이들은 주구들이다. 이들은 몸은 조선인이지만 정신은 완전히 일본 자본가와 제국주의화된 계급으로, 논할 여지없는 혁명에 적이다!" 박차정 의사 (약산 김원봉의 부인) 김원봉 선생의 부인이자 조선여자의용군을 창설한 여성 의용대장. 1939년 2월 박차정 의사는 중국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적탄을 맞아 그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35세의 나이로 산화하였다. 그녀의 유골은 8월 15일이 해방이 되어 중국에서 임정 요인이 귀국할 때 가지고 와 남편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 선산에 묻혔다. (1931년 3월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과 결혼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김원봉이 1932년 10월 남경에 조선 정치 군사 간부 학교를 개설하자 박차정 의사가 작사 작곡한 교가 일부분) “조선에서 자란 소년들이여 가슴에 피 용솟음치는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는 눈물을 거두고 결의를 굳게 하여 모두 일어서라 한을 지우고 성스러운 싸움으로 필승의 의기가 여기서 뛴다“ (안타깝게도 사진을 찾지 못했습니다.) 류근 1898년 9월 장지연, 남궁억, 박은식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 독립정신 고취에 힘 쓰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언론을 통하여 반일운동을 펴갔다. 국권 피탈 후, 최남선 등과 <동국통감>등 역사상 귀중한 저술들을 수집, 편찬 발간하여 널리 반포함으로써 독립의식을 높이고자 힘썼다. 1915년 일본인들에게 빼앗긴 경제권을 되찾기 위해 최규익 등과 <조선산직장려회>를 조직, 민족자본의 축적을 통하여 경제적 자립을 꾀하고자 하였다. 1920년 한민족의 교육은 한민족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 아래 한규설,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설립,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벌였다. "지방열(지역주의)을 없이하라. 이것은 조선인의 고질이니 사회를 위하여 활동하는 자,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자는 마땅히 이에 조심하여 그 근절을 기하라."  어니스트 베델 베델은 영국 언론인으로 한국 이름은 '배 설'이었다.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으며 같은 해 7월, 양기탁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뉴스>를 창간했다. 이 신문에서 베델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과감히 비판하여 국민의 의분을 북돋워 배일사상을 고취시켰으며 일본의 침략행위를 지상에 폭로했다. 베델은 일본군의 고문 후유증으로 1909년 5월 1일 서울에서 37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 베델의 유언 中 > "나는 죽더라도 신문만은 오래 살려  한국 동포를 구원해야 된다."  호모 헐버트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다. 1905년 을사조약 후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여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다시 내한, 를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행위를 폭로하였으며 <회의시보>에 한국 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하는 등 한국의 국권 회복운동에 적극 협력하였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면서 한국에 관한 글을 썼고 19년 3.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다. 1949년 국빈으로 초대를 받고 내한하였으나 병사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 헐버트의 유언 中 >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우재룡 선생 국권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력으로 대항하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한 우재룡. 1902년 대구 진위대에 입대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신된 1907년까지 근무하셨다. 정용기 의병을 만나 의병전쟁에 참여하면서 항일투쟁을 시작하여 1915년 광복회를 조직, 군자금 모금 및 독립군 기지건설과 1916년 중국 길림에 '광복회 지부'를 설치하여 혁명기지 건설에도 힘 썼으며 그는 주비단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해 임시정부와 국외독립 운동단체를 지원하는 활동도 펼쳤다. 우재룡선생은 활동만큼이나 투옥 기간도 길었다. 긴 옥고기간 중 선생은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의지도 결코 꺾지 않았다. 해방 후에는 '굉복회'를 재건하여 국민들의 복리 증진을 위한 활동과 독립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선양사업도 실시하셨다. 그는 한 평생을 자신의 조국을 위해 살아왔던 것이다. 외국인 독립운동가도 있었다는 사실은 이 글을 쓰게 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반성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하나의 글에 모든 분들의 이야기를 담아 올 수는 없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조국 광복을 위해 힘써주신 대단한 위인들이 한분 한분 나열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계십니다. 그 분들이 지켜주신 이 땅에서 하루 하루를 감사히 여기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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