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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투사셨습니다.
게시물ID : lovestory_398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에e승
추천 : 10
조회수 : 74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1/29 19:39:32
저는 21실 평범한 대학생이고 그냥 아버지가 겪은 몇가지 일화에 대해 써보려합니다

우리집안은 어릴때 부터 가난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부자이셨다고 들었고 저는 고등학교를 입학할때 까지만해도

아버지가 무능력해서 어머니와도 이혼하고 우리집도 가난한가보다 생각했습다

그래요 저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싫어했습니다

화장실이 집안에 없는 것도 싫었고 좋아하는 음식도 자주 못먹는 것도 싫었고

좋은 옷을 입는 친구들이 부럽고 또는 질투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투사셨기 때문입니다.

1962년생이신 우리 아버지는 민주화 투사셨습니다.

제가 그걸 처음 알게된건 아버지와 함께 영화 괴물을 보고있을 때였습니다.

영화 막판에 박해일이 택시에서 화염병을 만드는 장면이 나오죠?

그때 아버지는.
 "화염병 저래 만들면 손 타탄다  "
"던져 본사람같다?"
"수십 수백번..."

.......

그때 알았죠 그리고 몇가지 일화를 들었습니다.

어느날 노태우가 울산에 연설을 하러왔을때 였을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울산대학교 총학은 노태우를 단상에서 떨어뜨리자 라는 목적으로 시위인원를 모았고

연설 장소 태화로타리로 행했습니다.

하지만 가는 길인 문수로는 전경에 의해 모두 폐쇄 되었고

아버지를 필두로한 일부의 학생들만 산을 넘어 연설장소에 도달할수있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인파가 모여있었고 학생들은 뒤에서 부터 전단지를 뿌리며 노태우는 물러가라를 외치며 앞으로 행하고있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왠일인지 점점 작아졌고 앞에 계시던 아버지가 뒤를 돌아본 순간에는

백골단들이 친구들을 한명한명 붙잡아 구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항할 힘이 모자랐던 아버지와 몇친구들은 도망갈 수 밖엔 없었고 다음날 만난 친구들은 반병신이 되있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일화를 소개하자면 아버지 때의 대학은 시위가 일상이 였고 경찰서는 밥먹듯 들락거렸다고 합니다.
시위중 대학생 수십명이 경찰에 연행되었을때 학교에 있던 경찰들을 포위해 포로 교환했던 사연..

전경이 흥분해서 직각으로 쏜 사과탄이 엉덩이에 맞았는데 불발이여서 죽다 살아난 사연

"화염병은 전경들에 방패를 올리기위해 던지는거야, 그리고 그밑으로 돌던지고 존나 튀는거지!" ㅋㅋㅋㅋ

고 김주열 열사의 추모시를 수만명앞에서 낭독한 사연

아버지는 총학에서 꽤나 높은 지위였던거 같더군요...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신 아버지는 깊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떨구 셨습니다. 

이제는 이해합니다. 

당시 최고의 명문고를 나오시고 왜 번듯한 직장하나 없으셨는지 왜 저에게 정치색이 짙은 얘기는 잘하지 않으셨는지 

지금은 이해합니다 
지금은 존경합니다 

아버지는 진정 이 시대의 '투사'셨습니다

저는 이따금 생각합니다. 이런 투사들에게 정부는 물질적이 아니라도 조금의... 조금의.. 정신적인 보상은 해줄 수 없는지 

민주화라는 선물을 준 모든 투사들에게 감사드리고 미안합니다.

폰으로 작성해서 오타가있더라도 죄송
해외에서 시사게시판 못쓰게되있어서 여기에다 써서죄송
필력이딸려서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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