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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을 아신왕과 비교하는 것은 그렇다고 보여집니다.
게시물ID : history_246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우물파기
추천 : 0
조회수 : 976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5/12/23 11:54:31
아신왕의 경우는 전쟁을 펼치면서 기후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고,
 
무엇보다 북쪽에 후연이나 이런 나라들과 관계를 적절하게 이용을 못하고
왜국을 충분히 이용하지 못했다는 점이고
 
그로 인해서 한강을 강탈당했던 것이 문제입니다.
참고로 한강의 경우는 향후에 대륙 지역에 외교권 확장이라던가
한강유역의 많은 노동력과 농산물이 있었는데 그걸 또 강탈당했지요.
 
참고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강 유역을 뺏은 쪽은 유리할 수 밖에 없었죠.
그래서 하륜이 조선의 수도를 한양 즉 지금의 서울로 옮겼다고 보여집니다.
반대로 한강과 그 인근을 뺏긴 쪽은 후에 고생을 하거나 아예 멸망했지요
 
그래서 신라의 진흥왕이 그 지역을 뺏은 것이죠.
 
한강을 강탈당할 시점에서 이미 백제는 사실상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훗날에 위대한 어라하들이 나왔어도
한강 지역의 수복은 쉽지 않았습니다.
 
후고구려라던지 고려의 경우는 한강 인근을 점유하고 지키는 것에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리서 신라와 후백제가 차례대로 멸망했습니다.
반대로 후백제라던가 신라는 그 지역에 근방조차도 못갔지요.
한때 고려 숙종이 남경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백제를 말아먹은 실질적인 공로자를 의자왕과 비교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의자왕의 경우는 한강과 그 근방을 점유하지 못했고
아신왕의 경우는 의자왕보다 더 유리한 입지를 장악했습니다.
그 당시에 한강의 중요성은 첫째로 높은 문화를
얻을 수 있는 중국과의 무역에 있습니다.
둘 째로 한강유역의 많은 노동력과 농산물 때문이죠
아신왕의 경우는 더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던 어라하였습니다.
 
광개토대왕께서 잘했던 것도 있겠으나
어차피 뭐 광개토대왕 승 아신왕 패니깐
패자에게 무슨 변명이 있겠습니까?
한강 지역 주위를 모조리 강탈당한 것만해도 백제는 이미 그때부터 망쪼가 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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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삭제][⊙_⊙]#001
2015-12-23 15:26:40추천 0
댓글 0개 ▲
2015-12-23 17:25:41추천 0
한강유역의 경우 신라가 백제를 쳐서 빼앗은 게 아니라 신라가 먼저 차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제가 당시 한강유역 점령은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거라고 하네요. 어쨋든 백제입장에선 열불날 일이었겠죠. 자신들의 수도이자 원류인 땅인데. 그리고 백제의 망조는 의자왕이 삽질 때문입니다. 삼국의 통일 직전 시기 망조가 든 건 신라였지요. 팽창은 했는데 주변국과 사이가 너무 안 좋아 극딜당했으니.
댓글 2개 ▲
2015-12-23 21:59:45추천 0
신라는 그때가 아니라 신라는 초창기이자 마지막 시기가 젤 망조였다고 보여집니다. 초창기는 거의 변방취급이었고, 먹어도 별 이익은 없었죠. 초기에는 골칫거리인 가야도 탄생했으니...그리고 일단 삼국시대에서 한강유역은 먹고나면 그 나라가 실질적으로 주도권을 먹었다고 보면 될겁니다. 곧 한강유역을 먹고 있던 나라가 곧 그 나라의 최고 전성기였고 최고의 왕이 나올 시기라고 보시면 되죠. 근초고왕, 광개토대왕, 그리고 진흥왕까지 반대로 뺏긴 쪽은 곧 몰락의 첫시작이었죠. 물론 의자왕의 삽질도 있었다곤 하지만 의자왕의 경우는 애초부터 한강유역을 다시 들고와야할 입장이었던 것이죠. 반대로 아신왕은 그냥 지키고 있던 것을 뺏긴 쪽입니다.  한강을 점령하는게 생각만큼 쉬웠던 것은 아닙니다. 아신왕은 어떠한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광개토대왕이 아무리 드높아도 아신왕보다 상황은 더 불리했습니다. 의자왕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백제는 이미 아신왕의 삽질로 어떠한 훌륭한 왕이 나와도 성장은 커녕 퇴보를 막아야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한강유역을 사수하는 것이 우리나라 역사에선 중요한 일입니다.
설령 뺏겨도 빨랑빨랑 찾아야하는게 한강유역입니다. 이유는 인적자원이나 물적자원이나 외교적 입지 등등등이 있습니다.
후삼국시대에서도 한강유역을 먼저 차지한 쪽이 후고구려였고 이후에 후고구려를 뒤집은 바로 그 고려였습니다.
신라의 망쪼는 말기였습니다.
역사는 천년이었는데 천년의 끝은 너무나도 장난아니게 막장이었죠. 진성여왕의 실정과 화랑도의 XXX틱한 막장화라던가
그야말로 이게 신라가 맞는지 의문이었죠.

그래서일까 궁예따위한테 중원을 죄다 털리고 일개 장수한테는 후백제를 죄다 털렸었죠.
그래서 이후에 고려 숙종은 남경으로 천도하려고 맘먹었더는 이야기도 있고 공민왕도 남경으로 천도하려다가 중단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죠.
조선왕조때는 하륜이 한강유역을 수도로 세웠던 것이죠.
2015-12-26 10:19:21추천 0
의자왕의 삽질이라기보단 나당연합군이 너무 막대했던거죠.
의자왕은 오히려 신라성 40여개를 빼앗을정도였고 선덕여왕때 요충지인 대야성전투가 대표적이죠.
2015-12-23 20:31:52추천 0
의자왕이 크게 무능했다기 보다는.. 초기에는 굉장히 뛰어났고.. 후기에도 방탕한 군주라는건 약간 왜곡이 섞인 거구 사실은 왕권강화를 무리하게 하려다가 과부하가 걸린거라서.. 그리고 당나라의 20만대군은.. 솔직히 올거라고 예측하기가..(그때까지 백제와 딱히 갈등도 없었는데 신라의 요청으로 갑툭튀한거라..) 실제로 신라군이 한강을 넘어 고구려국경까지 가는 페이크를 걸기도했었고..
댓글 1개 ▲
2015-12-23 22:36:02추천 0
조공 끊어버린 걸로 알고 있는데...... 딱히 갈등이 있긴 했습니다.
2015-12-23 21:25:00추천 0
의자왕은.. 성왕 전사 이후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귀족들 반발에 의한 내분이 있었고..

아신왕에게 동정이 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신왕이 수백년 뒤의 백제 종묘사직까지 책임져야 할 정도로 잘 못 했을까요..
임진강유역 수십여성과 중요한 거점이었던 관미성을 빼앗긴것은 진사왕 때였는데...
이후 그 지역들을 되찾으려 노력했는데 그게 실패한 것..
댓글 2개 ▲
[본인삭제]한우물파기
2015-12-24 11:54:52추천 0
2015-12-24 11:55:57추천 0
뭐 일단 패자이고 의자왕과는 달리 아신왕의 경우는 패배를 변명할 여지는 없습니다. 물론 님이 말한 진사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이때부터 백제의 몰락의 시작점입니다. 광개토대왕이 대단하고 위대해서 뭐 그렇다고 하는데 오히려 광개토대왕이 상황은 더 불리했습니다. 지금의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의 장악을 못했으니깐요.

그리고 뭐 아신왕의 변명에서 기후를 탓하는 것부터가 이미 패자들의 변명입니다. 뭐 좀 일이 안풀리면 이런 말 하잖아요? 하늘의 뜻이라니 하늘이여 무심하시지 하면서.. 이런건 막연한 변명 즉 말 그대로 막연한 소리들입니다.
2015-12-23 22:38:23추천 0
의자왕 때 백제가 멸망해서 그렇지 사실 의자왕 만큼 백제를 잘 운영한 왕 드문걸로 압니다. 사실 말년의 사치는 거의 왜곡수준인 걸로 알아요. 나이들어서 젊었을 때 만 못한 왕은 의자왕 말고 케이스가 여럿입니다. 동롬의 헤라클리우스 황제도 그렇죠. 사산조의 물밀듯한 공격을 우주방어 시전에 수도를 터는 역관광까지 선보여서 나라를 완전히 구했으나 말년에 이슬람 러시 터짐 ㅜ
댓글 0개 ▲
2015-12-23 23:57:58추천 0
백제가 고구려,말갈과 연합해서 30개 성을 빼앗은게 655년, 그러니까 백제멸망 5년 전입니다.
의자왕이 그 5년동안 폭정을 해봤자 얼마나 나라를 말아먹겠습니까?
백제가 망한건 의자왕의 왕권강화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이 미처 봉합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나라가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지방의 병력을 동원하지 못한게 원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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