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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과 수출에 대한 논쟁 정리(시도2)
게시물ID : history_246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뻐꾸기77
추천 : 11
조회수 : 994회
댓글수 : 73개
등록시간 : 2015/12/28 22:39:02
* 뉴라이트의 주장과 역사게시판의 수출 옹호자의 주장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뉴라이트 주장> [대안교과서 98쪽, 식민지 한국인의 생활수준]
  - (요약) 일제가 수탈한 건 모르겠고, 대용식품, 엥겔계수 하락, 수출로인한 소득증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식민지 한국인의 생활수준이 대체로 개선되었으며, 이는
    농촌에 인구가 많아서이며 1970년대 중반에 해결되었다.    

  - (인용) "식민지 시기에 한국인의 생활수준이 일제의 수탈로 극도록 열악해졌다고
  보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다. 예컨대 생산된 쌀의 절반을 일본에 빼앗겨
  한국인은 초근목피의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수탈론에는
  실증적인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 쌀은 일본에 수탈된 것이 아니라 
  경제논리에 따라 일본으로 수출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인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소득은 증가하였다. 쌀을 대신해서 만주에서 조와 콩이 
  대용식품으로 수입되었다. 쌀의 1인당 소비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잡곡 등 대용식품과 기타 가공식품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1인당 열량
  섭취가 줄어들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생활비 가운데 식료품비의 비중을
  나타내는 엥겔계수도 하락하여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개선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1890~1920년데에 태어난 한국인들의 키가 1~2cm 커진 것도 생활수준의 개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인 전 계층의 생활수준이 개선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주로 도시부의 상공업자,
  기술자, 숙련 노동자와 농촌부의 지주, 자작농의 상층 계층에 한정된 개선이었다. 
  도시의 비숙련 노동자, 농촌의 하층 빈농과 농업노동자의 생활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중략) 일명 보릿고개라고도 부르는 보리 수확까지의 춘궁기에 식량이 떨어져 나물,
  풀뿌리, 나무껍질 등을 채취해서 식량으로 삼는 춘궁현상은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빈곤의 직접적 원인은 영세한 소작지와 높은 소작료에 있었지만, 근본 원인은
  급속한 인구증가에 따른 농촌 과잉인구의 축적에 있었다. (중략) 한국에서 농촌
  과잉인구가 해소되어 주민의 생활수준에 실질적인 개선이 이루어진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이다."

* <역게 주장들, 주로 수출 선호> 
  1. (위 인용 전체를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뉴라이트와는 상관없이 수출이라는 용어는 사용 가능하다.
  2. 수출 개념은 경제 용어에 한정, 수탈은 무상/강제로 뺏은 개념에 한정

* <역게 주장들, 주로 수탈 선호> 
  1. (통설) 수출 용어 사용 자체가 역사 왜곡이다.
  2. 수출 개념은 역사 왜곡 용도로 파악, 수탈은 대가가 있더라도 식민지에서 당연 
  3. 쌀은 특수재이므로 공급과 수요가 비탄력적임

* <기타>
  1. (논쟁의 성격) 수출을 인정하기에는 정서상 어려우나 역사적 문맥을 고려해야함
  2. (시대성 초월) 자본주의 체제 하의 수탈 본질 파악

---------------------------- 
* 쌀은 일본으로 수출되었을까? --> [내 판단?] 당연히 수출되었다.
 <강만길, 고쳐쓴 한국현대사 1994년판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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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본에 대한 쌀 수출량은 1920년에서 1928년에 4.2배 이상 증가했다.
  이에 반해 만주산 좁쌀의 수입량은 급격히 증가했다. <같은 책 인용>

* 위 내용에서 수출 대신에 수탈 등 다른 용어는 교체될 수 없다.
  일본에 대한 쌀 수출을 수탈로 하면 만주산 좁쌀의 수입은 뭐라고 하나?
  또한 일제시대 이전에도 수출은 있었으며, 수출상대국은 일본 이외도 있었다는 점에서
  일본으로 곡물이 운송되는 과정은 경제 용어로 수출이 맞다.
  (단, '병합'된 상황에서 일본으로 나갔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별개로 함)

* 그에 따라 더불어 한반도의 전체 소득도 증가할 수 있다.
  (소수가 대다수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그 소수의 소득 증가에 따라서 전체 소득이 증가하니까.)

*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 --> [내 판단] 뉴라이트 주장은 경제 용어와 통계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일제시대뿐만아니라 신라장적 이후 고려와 조선의 경제를 역사책에서 배우는 이유는
  경제가 그 시대의 역사적 성격을 가늠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 방식이며, 동시에 정치적이기 때문에 역사에서 빠질 수 없다.

  다들 아다시피 식민지 시대 경제를 역사적으로 평가하자면 수탈경제이다. 

  1908년 삼림법, 합방 후 3년 동안 압록강 등의 목재를 벌채하여 약 10억엔의 수입을 얻음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 약 5800만 엔의 18배)
  1911년 조선어업령, 합방 후 10년 사이에 1인 평균 어획고 조선인 49엔 -> 54엔, 일본인 195엔 -> 245엔
                    1921년 조선인 양식업자 2만 5,290명이 404만평 어장, 일본인 86명이 1,650만평 어장 소유
  1918년 임업조사, 마을 공유림 약 1백만 정보, 분묘림지 약 3백만 정보가 조선총독부 소유가 됨

  위와같은 상황에서 농업정책만 수탈이 아닐 수 있을까? 아래 수탈 구조는 곧 역사다.
  1. 식민지 농업정책의 목적은 "한반도를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기"이다. 강온의 차이는 있으나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농촌진흥운동, 공출제도 등이 그 목적을 위한 제도이다.
  2. 그 농업정책을 위하여 지주제를 강화하고 자소작농을 몰락시키고, 소작인과 이농민을 양산했다.
    마치 요새 비정규직을 만들듯이 값싼 노동력을 대량 창출했다.
  3. 당시에 농업을 하려면 식민지 지배정책에 타협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었다. 이외에는
    당연히 탄압하였다. - 독립운동, 공산주의 등 - 
  4. 결국 당시 민족자본 형성은 봉쇄당했으며 일본 자본주의의 발달만 뒷받침했다.

*결론 : 수출은 경제 용어로서 '일본으로의 쌀 수출'로 표현될 수 있으나 
        식민지시대 그 표현에 대한 역사적 평가로는 '일제의 쌀 수탈'이 맞다. 

*사족: 수탈과 수출 용어는 문맥에 따라서 다르므로 주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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