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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 기억의 왜곡과 조작이 허다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원폭 투하가 지나치게 부각되었다. 소련의 공헌과 중국의 역할은 과소평가되었다. 역시나 냉전이 병통이었다. 동서 냉전으로 역사 해석이 갈라진 것이다. 서방 및 미국의 아시아 속국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체주의에 맞서 활약했던 소련의 공헌을 잘 모른다. 오히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동일시하는 '자유주의 사관'이 만연해 있다. 과연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현재를 지배하는 법이다. 미국은 역사 교과서와 대중문화 산업을 통해 왜곡된 인식을 재생산해왔다. '홀로코스트 산업'을 비롯한 '문화 냉전'을 기획했다.
물론 미국에도 '양심적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유럽 전선의 핵심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43년)를 꼽았다. 한 도시의 초토화를 대가로 소련군이 독일 나치의 5개 사단을 섬멸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쌍방 정예 150만 대군이 결전을 벌였다. 여기서 독일 최강의 탱크 부대가 참패했다.
두 전투를 계기로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즉 소련으로 말미암아, 고쳐 말해 스탈린이 히틀러를 이김으로써 '제3제국'이 좌초하고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은 마침표였을 뿐이다. 아시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을 앞서 지원한 것은 소련이었다. 미국은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에야 뒤늦게 참전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역이 소련과 중국이었음은 그 인적 피해의 숫자에서도 확연하다. 소련은 2700만 명이 희생되었다. 중국은 2000만 명이다. 미국은 40만 명에 그친다. 프랑스는 60만, 영국은 45만 명이다. 심지어 전범 국가인 독일은 700만, 일본은 300만 명이다. 즉 2차 세계 대전은 미국, 프랑스, 영국이 주도한 전쟁이 아니었다. 소련과 중국이 유라시아의 동과 서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을 격퇴시킨 '유라시아 전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는다. 러시아는 '조국 수호 애국 전쟁', 중국은 '항일 구국 전쟁'을 선호한다.
▲ 9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 군사 퍼레이드에서 70년 전 참전 용사 복장을 한 군인들이 광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1939년 할힌골 : 분수령
1937년(중일 전쟁)과 1941년(독소 전쟁, 태평양 전쟁) 사이에 1939년이 있었다. 몽골 최동단에 자리한 자그마한 할힌골이 세계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1932년 만주국 수립으로 일본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었다. 남북을 가르는 허라허 강을 사이로 소련군/몽골군과 일본군/관동군이 대치한 것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1905년) 승리로 러시아를 낮추어 보았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탈바꿈한 러시아의 변화를 간과한 것이다. 이미 초기 공업화도 일단락 지었다. 강철로 단련된 현대 국가, 소련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 소련과 제국 일본의 완충지가 몽골인민공화국(1924년)과 만주국이었다. 각기 소련의 위성국과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결국 양국의 국경선 충돌이 일소 전쟁으로 치달았다. 러시아/몽골에서는 할힌골 전투, 일본서는 노모한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전투도 사건도 충분치 않은 진술이다. 대규모 전쟁이었다. 장소는 몽골 초원이고, 기간은 5월부터 9월까지 4개월에 그쳤지만, 매우 현대적인 의미의 국지전이자 제한전이었다. 일본과 소련 쌍방이 투입한 병력도 10만 명을 헤아렸다. 1000대의 전투기와 수백 대의 탱크도 동원되었다. 사상자는 1만8000명에 이른다.
군사 전략적으로도 획기적이었다. 아시아 최초의 탱크 대전이었다. 여기서 소련의 신성 주코프 장군이 등장했다. 그가 이끌던 소련의 탱크 부대가 투입되면서 판세가 뒤집어졌다. 욱일승천하던 '황군의 꽃' 관동군을 처음으로 꺽은 것이다. 제국 일본 패망의 시작이었다. 특히 최초로 구사한 육공 입체 작전이 주효했다.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각인시킨 전쟁이 할힌골 전투였다. 공중전과 지상전을 결합하는 전술은 훗날 현대전의 교본이 되었다.
그러자 나비 효과가 일었다. 관동군이 패배함으로써 제국 일본의 향로 전체가 변경되었다. 몽골과 시베리아 등 북진(北進)이 봉쇄당하자 남진(南進)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노선 전환에는 관동군 사령관 출신 도조 히데키의 판단이 결정적이었다. 주코프의 적군(赤軍)을 대적하기가 어렵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와 영국,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는 동남아로 진출했다. 군부의 중심도 육군에서 해군으로 이동했다. 국책 담론도 전환되었다. 소련과 합작하여 일본을 개조하고, 영미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를 극복하자는 동아협동체론은 기각되었다.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하자는 주장이 전면화되었다.
동아협동체론을 입안한 브레인은 오자키 호츠미였다. 그는 소련의 스파이 조르게와 내통했다. 즉시 일본의 노선 전환을 전해주었다. 조르게도 즉각 모스크바에 타전했다. 덕분에 스탈린은 극동군을 유럽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대독 전선에 소련의 화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제2차 세계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영웅 게오르기 주코프. ⓒrealmadridbalk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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