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여자 친구가 아프다고 비를 맞았어요?"
열풍기에 말렸던 옷의 열기 때문에 손이 뜨거웠다. 그래서 그것을 뒤집어서 덜 마른쪽을 말렸다. 옷에서 김이 풀풀 올라왔다.
"그게.. 좀 복잡한 사정이 있어요."
"싸웠구만."
"네.. 어떻게보면 싸운 거죠."
그러자 중계인은 들고 있던 신문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가 뒤로 쳐질 정도로 깊게 등을 기댄 뒤 말했다.
"제가 젊은이보다는 산 경험이 많으니 충고 하나 해줘도 될까요?"
두 번재 만난 게 전부인 사람에게 볶음밥도 사주는 성인군자 아저씨에게는 충고던 설교든, 모든 들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저 사람이라면 왠지 마음에 감명 깊은 말을 해줄 것 같은 기대감도 있었다.
"네!"
"저한테는 아내가 있어요. 저랑 4살 차이나는데.. 가끔은 막 싸워요. 큰 문제가 아니고 아주 작고 사소한 문제로.. 오늘 아침에도 싸웠지요. 아내가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도시락을 못 쌌거든. 그래서 볶음밥 시켜먹잖아요. 좋아하지도 않는데."
"아.. 그렇군요."
"아침에 내가 막 화를 냈거든요, 그랬더니 아내가 바락바락 대드는거야.. 자기가 뭘 그리 잘못했는지. 한 번 늦잠 잘 수도 있는거지 그게 뭐 어떠냐고 화를 내더라구요. 그래서 짜증이 확 솓구쳐서 그냥 나왔죠. 도시락 쌀 때까지 기다린다음에 좀 늦게 출근해도 됐었는데."
"짜증이 많이 나셨나보네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후회가 되요. 왜 그때 화를 냈을까? 왜 그렇게 짜증이 났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그냥 질린 것 같아요. 모든 결혼란 사람들이 그럴걸요? 처음에는 사랑으로 살지만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정으로 산다고 그러잖아요. 제 친구들도 다 똑같아요. 저 여편네가 대체 내가 사랑했던 그 여자 맞는지 가끔은 의문도 들어. 눈에 콩깎지가 씌인거지.. 둘 다. 저런 인간이랑 내가 결혼을 왜 했나 하면서."
"후회되세요?"
"후회라기보다는... 미련이랄까... 가끔 진짜 나쁜 생각이지만, 내 아내가 아니고 다른 여자랑 살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그런데 결과는 뻔하지. 똑같을거야.. 지금 마누라랑 바뀐 마누라랑. 결국 똑같아지는거지만 선택은 자신에게 있거든요. 난 이 여자가 좋았으니까 결혼을 했고 지금은 애까지 있잖아.."
"아이들 때문이라도 힘내셔야 되겠네요."
"물론, 애들도 중요하지만.. 내 새끼들이 당췌 귀여운지도 모르겠어요. 맨날 저거 사줘 이거 사줘 이러고.. 내 딸은 7만원 짜리 장갑을 사주었어요. 이건데요.."
그러면서 중계인은 자랑하듯 히죽히죽 웃으며 자신의 장갑을 보여주었다. 안감이 기모라서 무척 따뜻하다며 겨울에는 꼭 끼고 있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년이 7만원짜리 사주고서 20만원너치를 긁었네. 아휴..."
하면서 허허 웃었다.
"80만원짜리 안고른 게 다행이죠."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또 허허 웃었다.
"다행인가요? 나 참..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이라는 거에요. 난 아내랑 결혼해서 솔직히 행복이란 것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것도 제가 선택한 거니까 받아들여야죠. 제 아내랑 결혼했으니 비싼 장갑 사주는 딸도 낳았지. 20만원짜리 옷 결제해가고.. 아무튼 그것도 제 선택이잖아요? '내가 사줄게' 이랬으니까 산거지.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결국 아내랑 싸워서 짜증나는 것도 근본적으론 제 선택이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학생도 선택을 잘 해봐요. 여자친구라고 무조건 참거나 그러면 안 돼. 비 맞는 건 자유지만, 그런 이유를 계속 만들어내는 여자친구는 곤란하죠. 적어도 난 중계소 사장이니까 인력이 아프면 돈이 줄잖아."
하고 허허 웃었다. '그러니 몸조리 잘해요. 젊을 때 지켜야지..' 이렇게 말하고서는 자신의 휴대폰을 보았다. '음.. 올 때가 됐는데..' 이러면서 다시 신문을 펼쳐들었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레리티에게 짜증이 났던 것도 결국 내 선택이었을까? 처음 레리티를 만났을 때, 난 녀석을 그냥 길거리에 놓고 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맙습니다. 중계인 아저씨.
"도움이 됐어요."
"뭐가요?"
"여자친구한테 잘 해주기로 마음 먹었어요."
"잘 생각했어요. 여자는 얻기가 힘들지만 잃는 건 한순간이에요. 난 마누라가 이혼하자고 그러면 아직도 가슴이 덜덜 떨려.."
왠지 웃어줘야 될 것 같아서 가볍게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러던 중에 볶음밥이 왔다. 난 무척 배가 고팠기 떄문에 허겁지겁 그것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중계인 아저씨한테 커피 드실거냐고 물어본 뒤에 자판기 거피를 뽑아주었다. 그런 뒤, 중계인 아저씨가 다 먹은 그릇을 내것과 포게어 중계소 문 앞에 갖다놓았다. 난 덥혀놓고 있었던 웃옷을 입고 바지를 벗어서 온풍기로 덥혔다. 왠지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 같아서 중꼐인 아저씨가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도 대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그런데도 일 할때까지 시간이 남아서 걸레를 빨아서 이것 저것을 닦았다. 중계인 아저씨가 말했다.
"허허.. 고마워요."
"밥값은 해야죠."
일을 하면서 마음이 가뿐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랐다. 그냥 뭔가 마음 속에 깊숙히 응어리져 있던 종양이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일을 하고 있으니 쭈뼛쭈뼛 거리며 어떤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핸드폰에 연결 된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후드를 깊게 뒤집어 쓰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못 알아보았지만 가까이 왔을 때 서로 눈빛이 마주쳐서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 첫 날에 사람들 눈치만 살피던 눈치쟁이 아저씨였다. 난 그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그러자 그는 눈을 핸드폰과 나를 번갈아가며 서너번 바라보더니 이내 나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대기석 쇼파에 앉았다. 좀 시간이 지난 뒤에 들어온 것은 담배 아저씨였다. 그는 들어오자 마자 중계인 아저씨에게 기세좋게 인사했다.
"안녕하시옵니까~"
조선시대 말투로 인사하자 중계인 아저씨도 그에 맞게 대꾸해주었다.
"어서오시옵소서~"
그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알아보더니 씽긋 웃으며 말했다.
"또 왔네? 어제 안와서 안올 줄 알았더니만!"
"네, 아저씨 담배 맛을 잊을 수가 없더라고요."
"허허... 내 담배 얼마나 뺏어피려고."
"오늘도... 이따가 조금 부탁드려요."
"넵!"
이러고서 중계인 아저씨한테 갔다.
"신문 좀 주소."
그러자 중계인 아저씨는 자기가 다 읽은 신문을 그에게 건내주었다. 그것을 건내 받고 대기용 쇼파로 갔다. 그곳에 눈치쟁이 아저씨가 있다는 것을 보더니 "안녕하세요~" 하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눈치쟁이 아저씨도 '아.. 안녕하세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후,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가는 승합차가 도착했다. 우리들은 그것을 타고 물류센터로 향했다. 오늘은 레리티 없이 혼자 알바를 하는 것이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그런 의문들은 택배를 싣은 트럭들이 오자마자 말끔히 지워졌다. 그런 생각을 차마 할 시간조차 없었다. 끊임없이 오는 택배들을 물류센터로 날라야 했다.
바쁘게 움직인 뒤, 쉬는 시간이 되자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다른 택배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들어오는 택배들은 첫 날보다 훨씬 무겁고 다루기 까다로운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맫힌 땀을 닦으며 문득, 레리티가 생각이 났다. 만약 레리티를 데려왔다면 이 시간에 녀석이 잘 있나 보기 위해 숨겨놓은 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순간, 아까 혜진이와 수연이의 문자에 대답 못한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 혜진이에게는 이렇게 보냈다.
'괜찮아. 그냥 비 맞고 싶어서 뛰었어.'
그리고 수연이에게는 이렇게 썼다.
'걔 아픈 건 좀 나았냐?'
그러자 수연이에게는 곧장 답장이 도착했다.
''걔'가 아니라 '레리티'래. 이렇게 보내달래. 덕분에 괜찮다는 말도 잊지 말래. 올 때 과일좀 사다주면 고맙겠다는데?'
여전하구나..하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어떤거 먹고 싶냐고 물어봐바.'
답장은 곧장 왔다.
'사과 먹고 싶데. 자기가 깎아준다는데.. 얘 사과를 어떻게 깎아?'
'마법' 이렇게 대답하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이렇게 보냈다.
'앞발로 잡고 이빨로 물어 뜯어.'
그러자 놀란 표정의 이모티콘이 오길래 웃음이 나왔다. 분명 수연이는 지금쯤 레리티를 설득하고 있을 것이다. '사과 말고.. 귤 같은건 어때? 오렌지나.. 바나나.. 아니면 토마토! 토마토 어때?'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내가 웃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내 어깨를 툭 잡았다. 담배 아저씨였다.
"담배 안피고 뭐하냐? 여자야?"
"아니오.. 그냥..."
"에이.. 여자구만. 예뻐?"
그래서 나는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뒤에 대답했다.
"네, 예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