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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에 어떻게 생존해 나가느냐 아니냐를 정하는것은 쇄국이냐가 아니죠.
게시물ID : history_247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ogenes
추천 : 4
조회수 : 613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6/01/04 11:09:54
이 점에서 많은 분들이 길을 잃고 헤메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쇄국이 계속 지속할 수 있는 정책은 아닌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언젠가는 결국 개항을 해야 하고 그 와중에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국가제도를 서구화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문제는
 
국가 기강이 바로 서고 국가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개화고 쇄국도 제대로 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대원군 치하의 조선은 마지막 기회였던 겁니다.
 
무너진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가제도를 완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해야 했습니다.
 
대원군은 그렇게 주어진 10년을 그것을 위해 일로매진했습니다.
 
결과는???
 
치세기간 내에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뒀으나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10년이란 치세기간이 그렇게 넉넉한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안김풍조시대에 축적된 폐단이 엄청나게 많았던 거죠.
 
대원군 치세기간 내에도 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더군요.
 
치워야 할 똥이 원체 많은지라...
 
고종의 문제는 뭔고 하니 말입니다.
 
그렇게 애써 구축해 놓은 성과를 모조리 허물어버렸다는데 있습니다. 국가의 주요 요직은 민씨 일가의 손에 장악되고 지방관들은 이 민씨 일족에 줄을 대는 부패한 부류들이 다시 장악해 갔습니다. 당근 안김풍조시대의 가혹한 수탈이 재현되기 시작하는 거죠. 거기에 더해 아버지의 흔적 지우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군비를 약화시켜 버립니다. 일본함대가 침범한 영종도의 경우... 월급은 물론이거니와 군량미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사기가 매우 저하된 상태였다 합니다. 제대로 된 방어전이 될 리가 있겠어요? 가뜩이나 무기도 열세인 판에...
 
그런 상황이니 개항을 했어봐야 최악의 사태가 연발할 수 밖에 없는 거죠. 무슨 개혁을 해도 다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대원군이 과연 뼈속까지 완고한 쇄국쟁이였느냐?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일찌기 개항이전에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서양와 교섭해 보려 했던 적도 있었고
 
임오군란으로 잠깐 권력을 되찾은 상태에서 각국 대사를 접견했던 것은 그렇지는 않음을 보여주는 거라 봅니다. 도로 쇄국을 한 건 아니었지요.
 
다만 정세상 불가피했을 뿐이라 봅니다.
 
개항이냐 쇄국이냐 이런 단순한 이분법이야말로 한국 근대사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강고한 장벽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런 통념을 깨뜨리는 건 상당히 어려울 겁니다.
 
헌데 이건 아실런지?
 
갑신정변에서 김옥균 등이 자신을 개화당이라 칭하고 집권하고 있던 민씨 일족을 수구당이라 했지만... 아니 그런 수구당이 우정국 개설 같은 근대화개혁을 할리가 있나요?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개화 vs 쇄국의 대결이 아니라 민씨일족 vs 신진세력의 대결장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 대결에서 무참하게 실패함으로써 더 이상 박규수 어르신과 같은 자주적 개화파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겁니다. 개항을 주장해온 박규수 어르신이 왜 평양 대동강에 침입한 미국 상선은 탈탈 태워 버리고 승무원들을 전부 죽여 없앴을까요?
 
이건 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개항을 하더라도 나라를 팔아 먹는 개항은 단호하게 거부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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