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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남자.
게시물ID : bestofbest_248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처음처럼:)
추천 : 210
조회수 : 7319회
댓글수 : 0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08/08/25 22:33:25
원본글 작성시간 : 2008/08/24 18:43:22
이봉주 
출생 1970년 10월 11일

1996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 
 
1996   후쿠오카 마라톤 우승 
 
1997   3월 코카콜라 대상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0   동경 국제마라톤 2위(한국 최고기록 2:07:20) 
 
2001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 우승 
 
2001   자황컵 체육대상 최우수선수상 수상 
 
2002   부산아시안게임 마라톤 우승 (대회 2연패) 
 
2004   아테네올림픽 마라톤 14위 


안녕하세요. 광주 사는 복학생입니다..

고등학생시절부터 했던 오유가 군대를 갔다와서도 하고 있으니, 벌써 단골유저가 되었네요..

회원가입도 했다가, 공부하려고 탈퇴도 했다가, 다시 들어오기를 몇번.. 결국 떠날수가 없는 그런 묘한 ..

각설하고 이봉주 선수에 대한 격려 글이 없길래, 제가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쓸 생각은 없었는데.. 다음이나 네이버 이봉주 기사를 보고 

실력없으면 나오지마라, 이름내세우고 선수생명 연장하지마라, 같은 악플을 보고 너무 마음아파

오유에라도 하소연 해야지 안되겠습니다..

제가 이봉주 선수를 처음 본건 초등학교 3학년때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였습니다..

정말 안타깝게 불과 3초차이로 은메달에 머물고 말았던 "그" 였습니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만년 2등이라는 꼬릿표가 따라다니기 시작했죠..

마라톤이 취미이셔서 몇년전에 보스톤까지 마라톤하러 날라갔다오셨던 
우리아버지가 이봉주선수를 매우 좋아하십니다..

어렸고 철없던 저는 금메달을 딴 황영조 선수보다 
만년 은메달리스트인 이봉주를 더 좋아하던 아버지가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제가 중학생이되고, 고등학생이되고,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도 이봉주는 쉬지않고 대회에 참가했죠..

겨울방학 아버지께서 저에게 마라톤완주를 권유하셨습니다..

마라톤의 나의 삶과 전혀 무관한 것들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근데 아버지께서 계속 살면서 한번쯤은 도전해볼만한것이라시면서 이번 한번만 하면
다음번엔 다시는 권유하지 않으마, 이러시길래 어차피 여자친구도 없고 학기도 끝나서 할것도 없고
하다가 안되면 말지라는 심정으로 아버지께 한번 해볼게요.. 하니까 정말 좋아하시더라구요 ^^;
그렇게 좋아하실걸 알았으면 진작에 미리 말씀드려 볼걸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군대 훈련소 가기전에 끝내야 했으므로 한달반정도 연습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랑 그때부터 첫날엔 5킬로 가볍게 뛰고, 그렇게 일주일 뛰니 다음주에는 10킬로
그 다음주엔 20킬로 이렇게 늘려가서 대회나가기 1주일전에 35킬로까지 뛰어봤습니다..
정말 시간이 얼마없어서 하루뛰고 하루쉬고 이런식으로 뛰었네요..
비오고 바람부는날은 정말 손이 깨질것같이 시렵고 그래서 뛰러나가기 싫지만,
나이가 쉰이 다되신 아버지가 항상 옆에서 함께 해주셔서 포기하지 않을수 있었던듯 싶습니다..

결국 대회날이 왔고, 아버지와 저는 그날 아침일찍 진주로 갔습니다..
그리고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고 저도 마라토너 무리에 섞여 한발씩 뛰어나갔습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20대는 정말 찾기 어렵더라구요..^^;;

처음 반환점까지는 제가 연습했던 거리보다 작아서인지 정말 가볍게 돌았어요..
근데 35킬로지점이 넘어가고 37킬로지점도 가니까..정말 무릎이 곧 빠질것같은 느낌의 통증이..
-_-.. 진짜 거짓말 하나도 안보태고.. 횽들 한번 뛰어봐.. 
왜 마라토너들이 마의 37킬로지점이라고 하는지 알수 있을거야..

정말 아버지와 느리게 뛰더라도 걷지는 말자고 그렇게 약속했겄만.. 발이 앞으로 안나가더군요..

그렇게 1킬로정도를 걸으니, 무릎이 좀 괜찮아진 듯 싶어.. 다시 뛰어 결국 끝까지 뛰어 완주했습니다..

들어오는 순간 정말 중학생이후로 흘려본적 없었던 눈물이주르륵..정말 뜨거운 눈물이 뭔지 느꼇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말이 절로 나오더군요..ㅠㅠ
아버지는 수고했다만 연신말하시면서 등이 토닥여주시는데.. 정말 아버지가 그렇게 가깝게 느껴진건 처음이였습니다..ㅠㅠ

기록은 4시간 30분정도로 매우 저조했지만, 정말 살면서 한번쯤 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되는 도전입니다..

그렇게 뛰고 훈련소가서 신체검사중에 장거리 뛰기가 있었는데 300명있는 중대에서 1등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수에서 1등 첨먹어봤습니다.. 

이봉주선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

암튼 그렇게 뛰고 나니, 왜 이봉주선수가 대단한지 몸으로 와닿았습니다..
왜 아버지가 황영조선수를 별로 탐탁치않게 생각했는지도요..

그는 포기를 모르는 선수였던거죠.. 솔직히 누가 뛰는걸 그렇게 좋아하겠습니까? 
근데 황영조는 금메달 따는 순간 더 뛸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딱 그만뒀죠.. 훈련이 매우 고되니..
물론 황영조선수도 이해가 안가는건 아닙니다..

그래서 인지.. 이봉주선수가 더 빛나 보입니다.. 그가 대회에서만 뛴 거리만 합쳐도 지구 5바퀴라죠..^^

인터뷰때 마흔이 다되가는데 왜 아직도 선수생활에 미련을 갖냐고 어떤 기자가 질문했을때,

내가 여기서 멈춘다면 자신보다 더 나은 후배들을 바랄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베이징올림픽도 정정당당하게 국가대표선발전을 통해 혈기왕성한 젊은 선수들보다 좋은 기록으로 대표로 선발된것은 그만큼 피나는 자기관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무개념악플러들을 볼때마다 속상합니다.. 이봉주가 아직도 달리는건 욕심이 많아서도 아니고 이름내세우고 다른선수 자리를 빼앗는것도 아니고 마흔이 다된 그를 아직도 누르고 올라온 후배가 없기 때문이라고 똑똑히 머리에 새겨주고 싶습니다..

그가 세운 최고기록은 2시간 7분 20초.. 이건 100m를 17초의 속도로 420번을 뛰어야 나올수 있는기록입니다.. 얼마나 대단한건지... 짐작이나 가시나요..?

이번 베이징에서 우승한 케냐출신 선수보다 2시간 14분대에 들어온 선척적인 신체조건으로 불리한 이봉주가 훨씬 노력했다고 단언할수 있습니다...시드니올림픽때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끝까지 뛰었냐고 물었을때 그는 가슴에 태극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때 얼마나 뭉클했는지 모릅니다..ㅜ

그는 악플러 당신들보다 삶에 훨씬 충실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몸으로 실천할줄 아는 멋진남자입니다..
제가 할수만 있다면 그에게 금메달을 걸어드리고 싶네요..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이 아니라 이봉주입니다..! 존경합니다.

아래는 제가 완주했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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