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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묘역 폭탄테러사건
게시물ID : panic_242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꺼지지않는불
추천 : 9
조회수 : 6929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2/02/03 12:25:23


전 두환 대통령 일행은 1983년 10월 8일 저녁 서남아시아 태평양 지역6개국(인도,스리랑카,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등)순방의 처음 방문국인  미얀마의 수도 랑군Rangoon에 도착해 미얀마 각료들의 마중을 받았다. 대한민국의 국가 원수의 미얀마 방문은 이번이 처음으로 미얀마에서의 4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10월 11일에는 2번째의 방문국인 인도로 출발할 예정 이였다. 그러나 도착 다음날인 10월 9일 오전 세계를 뒤흔들은 중대사건이 랑군Rangoon(현 양곤)시의 국립 묘지인 순교자 묘역(미얀마명: 아자니공)에서 일어나게 된다. 아웅산국립묘지는 쉐더공파고다의 북쪽의 한적한 언덕에 있는데 미얀마 독립과 건국의 영웅들 아웅산 장군과 독립 운동 지도자9인을 모시는 묘소로 버마Burm를 방문한 국빈은 미얀마에서의 공식 일정중 처음일정으로 참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러나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5분(현지 시간) 아웅산 묘약의 건물 천장에 설치되고 있던 무선 조종 폭탄이 폭발하고 서석준 부총리등 4인의 각료의 희생을 시작으로 한 다수의 희생자를 낳는 대 참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아웅산묘에서 헌화를 할 예정이 었던 전 두환 대통령 부부는 우연히 영빈관에서 아웅산묘역으로의 출발이 지연되고 도착 예정5분 전에 폭발이 일어나 대통령 부부는 구사일생으로 희생을 면했다. 사건 발생 당시의 발표로는 19인 사망(한국측은 4분의 각료 포함한 16명 사망 미얀마측은 3명 사망) 48명 부상(한국 15명, 미얀마33명) 한걸로 되어 있지만 사건후 중상자중 한국인과 미얀마인이 추가로 사망하여 최종적으로 사망자 21명 부상자 46명이 발생한 대 참사 였다. 한국측은 경제 전문가 출신인 서석준 부총리겸 경제 기획원장관등 4인의 각료와 수행인사 13명이 순국했으며 미얀마측은 아웅 초 민 정보 문화부 장관, 딴마웅 정보 문화부 대변인등 4명이 사망했다. 사건 직후 전 두환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중지하고 양곤공항에서 특별기로 귀국했다. 정부는 사건이 일어났던 당일 오후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하고 군과 경찰에 "특별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또한 이번 사건은 전 두환 대통령의 암살을 노린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 발표했다. 한편 아웅산 국립묘지 폭발사건에 대해 북한의 관여설, 한국내의 반 정부 세력의 범행 설. 미얀마 국내의 카렌족등 소수 민족반군 세력에 의한 테러설, 게릴라전을 계속한 미얀마공산당 관련설, 네윈전 대통령에게 불만을 품은 미얀마 군부내 소행설, 나아가서는 전 두환 대통령의 자작극설등의 억측이 난무한 가운데 버마 정부에 의한 정확한 사건 조사가 진행되었다. 이 사건 당시 버마는 1975년 5월 같은 시기에 남북한과 외교 관계를 수립 하였지만 사건 당시 양곤에는 남북한 대사관이 각각 있었지만 버마정부는 어느 나라에도 대사관을 설치하지 않고 북한은 주 중국 대사가 겸임하고 한국은 주일 버마대사가 재사직을 겸임하고 있었으며 비 동맹 중립을 표방하고 있던 미얀마와 북한과의 관계는 아웅산 폭발 테러 사건이 나기 전, 매우 우호적이였다. 사건 후 미얀마 정부는 미얀마 방송을 통한 네윈장군의 용의자 체포에 대한 협조방송과 노상 검문, 호텔등의 숙박시설에 대한 검문을 강화하여 사건 발생으로부터 3일만에 용의자 2인을 체포,11월 3일밤 아웅산 폭발 테러 사건의 주범의 북한군 공작원중의 한 명인 강민철 로부터 범행일체에 대한 자백을 받은 후 다음날 아침 미얀마 정부는 긴급 각료회의를 개최하여 북한과의 단교를 결정, 북한의 대사관직원과 그 가족에 대해서 48시간 이내의 국외 퇴거를 명령하는 등 빠른 대응을 하였다. (북한 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은 11월 5일 양곤 공항을 통해 북한의 특별기편으로 미얀마를 떠났다) 더욱 사건 용의자의 재판 절차에 대해서도 사전 예고를 하여 외교사절의 방청을 인정하고 범인의 재판과정의 이해를 돕기위해 한국어 통역과 영어를 사용하고 언론을 통해 공판 결과를 상세히 알리는 등 국제사회에 대해서도 재판의 공정했음을 알렸다. 또한 사건이후 한국 정부와 버마정부간의 관계도 버마정부의 신속한 용의자 체포와 북한과의 빠른 단교 조치로 외교상의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한국 정부는 버마정부에 대하여 사건의 희생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지 않는 방침을 취하였다. 사건의 책임에 대하여, 버마정부 내에서는 국방성의 정보부장과 차장이 보직해임 되었으나 정부각료의 해임은 없었다. 아웅산 폭발 테러 사건 일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 1983년 8월 초순 공작원 진모, 강민철, 신기철 북한군 육군소장 강창수로부터 전두환 대통령 암살 지령 - 1983년 9월 9일 공작원 3인을 태운 북한의 화물선 동건 애국호(5,379톤) 옹진 항구를 출항. - 1983년 9월 16일 미얀마 양곤 앞바다 도착  - 1983년 9월 17일 - 9월 24일 양곤 항내에 정박 - 1983년 9월 22일밤 동력선을 이용 공작원 3인 양곤 잠입. (북한 참사관이 빌린 안가인 알론지구 트리엑타2번지 154의a) - 1983년 10월 6일 공작원 3인 안가에서 나와 아웅산묘역, 쉐다곤파고다 및 깐도지호수 주변 답사. - 1983년 10월 7일 밤 10시-오전 2시 아웅산 국립묘지 잠입, 원격조종폭발형 폭탄 2개를 아웅산묘역 지붕 밑에 설치. -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국림뵤지 테러 폭발 사건 발생. 사망자 21명 부상자 46명, 전두환 대통령 특별기 편으로 귀국. - 1983년 10월 11일 미얀마 정부 특별 발표 성명 용의자 1인 사살 1인 체포  - 1983년 10월 12일       미얀마 수사 당국 용의자1인 체포 - 1983년 10월 17일    미얀마 정부는 용의자 체포 2인 사살1인등 합계3인의 한국인이 이번 사건의 진범 이라고 단정, 그러나 그들의 국적은 발표하지 않음. - 1983년 11월 4일 미얀마 정부는 북한 공작원의 범행이라고 단정하고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 또한 외교 단절 조치로서 가장 강력한 국가 승인을 취소. - 1983년 11월 22일 아웅산 폭발 테러사건의 진범으로서 양곤에서 체포된 북한인       용의자2인에 대한 재판 절차개시. 양곤 지방재판소(1심 법원)의 특별법정으로 양곤의 육군 시설내에 재판소 설치. 경찰측은 용의자 2인의 신원을 북한군의 진모 소령(30) 강민철 대위(28) 라고 그들의 신원을 확실하게 발표. - 1983년 12월 1일       제 7차 공판을 끝으로 검찰측의 증인 심문 종료. - 1983년 12월 6일 제 9차 공판 양곤 지방재판소(1심 법원)의 "마웅 마웅에" 재판장이 피고인에 대해 유죄를 선고, 진모 소령은 시종 묵비권 행사. 강민철 대위 죄목 인정 - 1983년 12월 9일     피고인 2명에 대한 판결 공판, 사형 판결 - 1983년 12월 15일     피고인 강민철 대위 미얀마 중앙 법원(최고재판소)에 상소. 진모 소령은 상소포기. - 1984년 1월 11일       최고 재판소 재판 개시 - 1984년 2월 9일   피고 강민철 대위 상소를 기각 사형판결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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