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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호랑이연고.
게시물ID : readers_248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andS
추천 : 1
조회수 : 71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4/25 01: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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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생이고, 어린 동생은 없다. 
하지만 우리집 안방 벽에는 한글, 알파벳, 숫자 등을 공부하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포스터 뒤 벽지에는 까맣게 변한 핏자국이 가득할 것이다. 
내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엄마는 맞았다. 
그때도 아빠는 나를 밟으려고 했던 거 같다. 
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대신 밟혔다. 엄마는 그때부터 오늘까지 맞았다. 
이제는 나도 맞을 만큼 컸다. 나는 엄마를 막다가 맞고, 엄마는 나를 막다가 맞는다. 

알아보기 쉽게 색색으로 그려진 '가지, 나무, 다리미, 라디오, 마이크, 바나나……' 위로 피가 흐른다. 엄마는 그 피를 닦는다. 
코팅된 포스터는 유용하다. 벽지에 새겨진 피를 가릴 수 있고, 코팅이 되어있으면, 포스터에 묻은 피를 닦기도 편하다. 
내가 포스터를 보며 배운 건 한글, 숫자, 알파벳 만이 아니다. 
나는 '가지, 나무, 다리미' 보다, 공포, 두려움, 폭력같은 것을 먼저 배웠다. 

세수를 대충하고, 독서실을 향했다. 공부를 해야 한다. 
언제까지 한글공부포스터를 보고 살 수는 없다. 나는 독립을 해야 한다. 독립을 하려면 대학을 가야한다. 
아빠가 알만한 대학에 장학생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얼굴에 닿았다. 나는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흰자위의 핏줄은 다 터져서 붉은 물이 들었고, 눈 주위엔 보랏빛 멍이 들었고, 광대뼈는 부어올랐고, 입술은 터졌다. 
나는 피해자다. 고개 숙이고 다닐 이유가 없다. 사회가 허락한다면, 온 몸에 든 멍도 다 내보이고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다.

독서실 자리에 앉아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을 때, 미끄러운 무언가가 뺨에 닿았다. 놀라서 옆을 돌아봤다.
“문질러야 되는데…….”
수진이가 혼잣말을 하며 연고가 묻은 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수진이의 손을 치우고, 직접 내 얼굴을 문질렀다. 알싸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수진이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내 광대뼈를 향해 바람을 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망이 된 얼굴은 창피하지 않지만, 호랑이연고냄새를 독서실에 퍼뜨리는 건 창피했다.

야외주차장 구석에 둘이 앉았다. 
밤이 되면 작은 주차장엔 더 이상 차가 다니지 않았고, 어두운 구석은 수진이와 나의 전용공간이다.
 담배를 피다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어두워서 확인 할 순 없지만, 붉은 피가 섞여 있을 것이다. 아직도 입 안쪽으로 비릿한 맛이 느껴진다.
“대학가면 담배 끊어. 남자애들이 싫어해.”
“나도 남자애들 싫어.”

수진이는 지금 입술을 악물고, 미간의 주름을 만들고는 나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괜히 미안해져서 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다. 수진이가 구강청결제를 내밀었다. 
수진이 가방 안에는 수진이를 위한 물건이 많을지, 나를 위한 물건이 많을지 궁금하다. 입안이 쓰려왔지만 참고, 입을 헹궜다. 

“달이 동그랗다.”
구강청결제를 뱉어내고 있을 때 수진이 말했다. 
“그러게…….”
“율희야.”
“왜?”
“우리 소원 빌자.”
“명절도 아닌데 무슨 소원을 빌어.”
“달이 동그랗잖아.”
“대보름 때도 안 들어준 소원을 오늘 빈다고 들어주겠냐?”
“무슨 소원 빌었었는데? 내가 같이 빌어줄게.”
“그 새끼 죽게 해달라고. 뺑소니차에 치였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몇 시간을 도로에서 아파하다가 죽게 해달라고.”
“율희야.”
“알았어. 취소. 그 정도는 아니었어. 그냥 길가다가 훨씬 젊은 사람들한테 맞게 해달라고 빌었었어.”
“넌 너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지?”
“뭐?”
“나도 어릴 때 아빠한테 많이 혼났었어. 그래서 나도 율희 너처럼 아빠를 미워한 적도 있었는데, 아빠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런 일들도 다 후회가 되고 그립더라. 아버님 너무 미워 하지마. 다 너를 사랑하셔서 잘되라고 그러시는 걸 거야. 난 아빠한테 혼날 수 있는 너가 부럽다.”


매일 책상위엔 간식과 편지가 놓여있었다. 나는 매일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수진이는 내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왔다. 공부를 하다가, 담배 피러 내려가는데 수진이가 따라왔다. 
나는 며칠 만에 수진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왜 내가 너를 피해야 돼? 너가 그만해야 되는 거 아니야?”
다음날 수진이 책상의 수납공간이 열려서 비어있었고, 내 책상위에는 편지한통과 호랑이연고가 놓여있었다. 
편지와 연고를 가방 안에 대충 쑤셔 넣고, 공부를 시작했다. 


수진이를 본 건 여름이 끝나 갈 즈음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언덕길을 오르고 있을 때,  30미터 정도 앞에서 수진이가 걷고 있었다. 
길어진 머리를 묶고 있어서 알던 뒷모습과 달랐지만, 가방과 그 가방에 달린 인형이 수진이의 것이었다. 
나는 수진이와 간격을 유지하며 걸었다. 다가갈 이유도, 굳이 거리를 둘 이유도 없었다.
수진이의 뒷모습을 보며 걷는 게 어색했다. 마치 내가 수진이를 따라가는 기분이었다. 
주머니에서 단어장을 꺼내서 단어들을 외웠다.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주머니에 넣고, 앞을 보는데 수진이가 보이지 않는다. 수진이네 집은 우리 집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골목들을 살피며, 언덕을 뛰어올라갔다. 

가방을 벗어서 손에 들고, 남자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수진이 위에 앉아있던 남자가 옆으로 쓰러졌다. 
나는 큰소리로 욕을 하며 가방으로 남자를 계속 때렸다. 주택 창문들의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나왔다.
나는 쓰러져있는 수진이를 감싸 안고 앉았다.

우리는 여순경이 운전하는 경찰차에 탔다. 
수진이에게 내 츄리닝 상의를 입혔다. 교복블라우스단추가 다 떨어져있었다.
우리는 파출소에 도착 할 때까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수진이가 진술을 마쳤다. 내가 할일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기다렸다. 
우리는 다시 경찰차를 타고, 동네로 왔다. 
내가 먼저 내리려는데, 수진이가 따라 내렸다. 우리는 순경언니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했다. 
순경언니는 우리에게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줬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하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경찰차가 떠나자 둘 사이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수진이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율희야.”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수진이를 봤다.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넌 좋겠다.”
“응?”
“난 남자들이 쳐다보지도 않던데……. 넌 예뻐서 그런 일도 생기네? 부럽다.”



다음 달 나는 수시에 합격했다.
수진이가 생각났다.


첫눈이 오던 날, 
아빠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나는 맞아서 쓰러져있고, 엄마는 머리채를 잡혀서 이리저리로 끌려 다닐 때, 경찰들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경찰들은 아빠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나는 순경언니의 부축을 받으며, 경찰차에 올라탔다. 
경찰차를 보고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수진이가 있었다. 나는 경찰차에 탈 때까지 수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진이도 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저기요. 순경언니.”
“응?”
“죄송한데, 저 잠깐만 내렸다가 다시 타면 안 될까요?”
“응, 그래도 돼. 근데 왜?”
“그냥……. 필요한게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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