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땜쟁이 나의 아빠.
게시물ID : lovestory_400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짐홀
추천 : 3
조회수 : 114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2/05 23:38:32
이글의 주인공은 제가 오래전 쌍끌이 기선 저인만 근무할적 동료선원과 한동안 친하게 
지낼때 그분 따님에게서 이런일이 있었다는 애기를 들은후 잊혀진 추억속을 다시금

그때를 회상하며 글로 남겨봅니다.


 

우리 아빠는 땜쟁이다.


이말은 내가 아주 어릴적부터 주위 이웃들에게 들어온 말이다.
나는 그때부터 그말이 싫었다.


우리 집은 영도 청학동 비탈길 일제시대에 만들어 비스듬히 다 쓰러져가는
목조 주택 단칸방 이었다.


 

우리 식구는 두살 터울 남동생과 하루종일 생선 비린내만 풍기고 다니는 엄마


그리고 무뚝뚝하고 말이 없던 땜쟁이 아빠 넷이서 좁은 단칸 월셋방에 살았다.


해뜰무렵 동생과 내가 곤히 잠든 시간에 우리들이 잠에 깰까바 소리없이

일터로 나가시는 아빠를 동생과 함께 덮고 자는 때묻은 이불 깃 언저리에서
잠이 덜깬 눈으로 보는일이 매일 아침이었다 .


 

아빠의 직업은 청학동과 남항동에 촘촘히 자리 잡은 작은 조선소의 용접 일감을

받아 조선소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일용직 용접공이었다.


아빠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그때부터 

일당쟁이 조선소 용접공을 따라댕기면서 온갖 잡일을 시작으로 조선소에서 배 

수리하는데에 일당 용접 오야지의 보조일을 했다.


그래서 아빠는 거의 매일을 새카만 기름때에 절은 작업복으로 하루를 살았다.
햇빛에 그을려 소말리아 깜댕이 처럼 시커먼 얼굴로 집에 들어 올때면 입가엔 막걸리 

냄새와 몸에선 퀴퀴한 땀냄새를 달고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왔다....


그러면 엄마는 푸념섞인 바가지가 정시에 도착하는 남포동 지하철 처럼 이내 쏟아진다.


늘 들어오던 바가지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는 아빠는 힘든 일로 두세군데 트인 두툼한 입술을 

해죽 거리며 애들 주라며 손에 들고온 붕어빵 봉지를 엄마에게 쥐어준뒤 엉덩이를 털푸덕 

마루에 붙이고 밑창이 다 헤어진 안전화 끈을 푼다. 
이것이 내가 자라면서 매일 보아온 아빠의 모습이었다.


 

아빠는 어쩌다 일이 없을땐 집에서 하루 종일 잔다.


그럴때면 아빠의 옆자리엔 어김없이 쥐포 몇 조각과 대선소주 한병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걸본 엄마는 지쳤는지 인상만 찌푸리기만 할뿐 아예 치울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긴 우리 가족중 아빠보다 더 하루내 얼굴보기 힘든 사람이 새벽에 자갈치시장으로 리어카를 끌며 생선 장사 나가시는 엄마였다.

 

조선소 용접일 이외엔 그 어느것도 알지 못했던 땜쟁이고 일밖에 모르는 무뚝뚝한 

아빠여서 우리 집엔 아빠가 들어와서 하는 말이라곤 


 

- "밥뭇나..............................." 


 

- "영선아 니 공부 열심히 하그래이......................................." 


 

- "영철이 잘 챙기주고.............................."


 

거의 이말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빠는 동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동네분들은 일요일 이면 저마다 낚시대를 들고 가족 동반으로 영도 주위 낚시터에 간다.
그들이 어쩌다 나를 보면 으례 하는 말이 


 

- "땜쟁이는 또 술묵고 퍼짔나?............................."


 

- "니 우리캉 낚시 하러 가자............................"


 

- "언니야 같이 가자고마............................"


 

나는 그러는 이웃들이 싫었다.
아빠도 무지 싫었다.
그리고 땜쟁이란 말도 무지 싫었다.
그래서 나도 땜쟁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친구가 없이 학교 갈땐 다른 애들보다 제일 늦게 학교에 갔다.
거의 매일을 소아마비 동생 영철이 손을 끌고 학교종이 울리기전에 제일 늦게 들어갔다.


 

엄마는 새벽 해가 뜨기전에 아침밥만 차려놓고 공동어시장에 그날 자갈치 시장에 팔 


고기를 받으러 간다.


 

아빠는 매일 일만 하고 벌어오는 돈은 우리 식구가 먹고 살기도 힘든 만큼만 받아 왔다.
아빠가 매일 일하러 나갔지만 일한 돈은 오야지가 가로 채기도 했고 일을 준사람이 도망 가는 

바람에 오야지도 못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엄마는 어김없이 우리를 데리고 오야지 집으로 갔다.
애 아빠 일한돈 못주면 그돈 대신 우리 키우라고 하면서 오야지 집에 우리를 놔두고 가버린 경우가 많았다.


 

아빠는 순진한건지 미련한건지 오야지가 돈을 제때 안줘도 말을 못했다.
혼자 속만 앓다가 결국엔 돈도 못받고 다른 오야지 한테 갔다.


그래도 일한돈 제대로 받아오지 못하는건 마찬가지였다.

 

 


 



---- 쌍끌이 기선 저인망 ----




그러던중 내가 중학교 1학년 막 올라갈 때였다.


 

동생과 내가 잠들무렵 이었는데 한달여를 일도 안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매일 막걸리만


마시고 지내던 아빠가 엄마와 소곤거리는 소리를 얼핏 들어보니 아빠가 배를 타러 가야 

된단다.


 

나는 속으론 그 말을 듣고 내심 기분이 좋았다.
아빠가 배를 나가면 매일 풍기는 막걸리 냄새도 맡을일이 없었고.
주위 이웃들에게 땜쟁이 소리도 들을 필요도 없었고 엄마의 바가지 소리도 안들을 테고
엄마는 아빠가 술에 취해 들어오면 화풀이를 매일 우리 한테 했다.


 

아빠가 매일 조선소에가서 일을 해도 벌어오는 돈으론 우리 식구가 살기에 빠듯 해선지


일만 죽어라 하고 돈을 제데로 챙겨오지 못하는 미련한 아빠를 믿고 살 수가 없었던지


엄마는 외삼촌이 기관장으로 일하는 쌍끌이 기선 저인망에 타보라고 아빠에게 권유했다.
사실 엄마는 그 외삼촌이 아빠를 소개 해줘서 결혼했다.


외삼촌은 아빠가 총각 시절 자신이 타는 배수리차 조선소에 있을때 아빠가 그배에 가서
용접일을 했었다. 


4 년여를 그렇게 조선소에서 아빠를 보아 왔던 외삼촌은 아빠가 착실하게 보였던지 
그당시 전라남도 청산도 고향집에 살고 있던 섬처녀 였던 엄마를 소개 하고 결혼 하게 

되었다.


억척스런 엄마는 결혼 하고서부터 자갈치 공동어시장에 나가 리어카 끌고 생선장사를 했다.
그래서 우리집엔 생선 비린내가 가시지않은 날이 없었다.


집에 들어오면 신발장 앞에 아무렇게 내팽겨쳐진 기름때와 퀴퀴한 땀에 절은 작업복에 

익숙해졌고 엄마의 몸에 베어버린 생선 비린내가 집안 곳곳에 베어 있는 집에 가기 

싫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빠는 그뒤 5년동안 배를 탔다.
천성이 워낙 착실했고 일 밖에 몰랐던 아빠여서 배타기 1년만에 조기장이란 직책을 얻었다.
그땐 영도 남항동이나 청학동 대교동엔 길가의 개들도 천원짜리를 물고 다닐 정도로 배타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


엄마는 그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드디어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아빠가 배를 탄지 5년만에 작지만 아담한우리집을 사게되었다.


그후 아빠는 여분의 돈으로 영도 대교동에 자그마한 선박수리 공장을 차렸다.
아빠의 부지런함은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더욱 분주해졌다.
아빠는 거의 매일 야간 작업까지 하면서 공장에서 살았다.


그렇게 살던중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봄즈음에 아빠에게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일이 생겼다.

하루도 빠짐없이 바쁘게 거의 매일 공장서만 살던분이 오후 퇴근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혼자 흥얼대며 그당시 내가 가장 좋아 했던 가수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을 오디오를 틀어놓고 수차례 따라 부른다.


평생을 살면서 남들 다니는 그 흔한 노래방 근처에도 가지 않은 분이 매일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만 수십번씩 오디오 소리에 따라 부르는게 아닌가...
우리식구는 아빠가 어느날 갑자기 그러길레 모두 아빠가 미친사람 처럼 보였다.


땜쟁이 시절 막걸리에 취해 흥얼 거리는 트로트완 전혀 상반 되는 노래 였고 더구나 한가지
노래만 매일 불러대니 미친사람 처럼 보이는건 당연한거였다.
엄마는 도데체 왜 매일 그러는지 물어봐도 애초에 말이 없고 무뚝뚝 했던 아빠는 
그냥 웃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는 포기하고 아빠가 그러기를 십여일 지날즈음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학예회를 했다.
이날은 학부모등 지역주민들이 그동안 우리가 갈고 닦은 연극이랑 합창이랑 무용이랑 연주랑
등등 각종 프로그램으로 짜인 공연을 보러 왔다.


나는 아빠가 워낙 일에 성실한 분이라 학교에 온다는건 기대도 안했다.
다행히 엄마는 점심무렵에 온다는 말을 듣고 그나마 위안삼아 1학년이었던 남동생과 함께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던 발레 무용복을 챙기고 학교에 갔다.


 

각종 프로그램으로 공연을 하는 과정중 학부모 참여 프로그램이 중간 중간 세번인가 있었는데 그중에 아버지들만 나와서 하는 장기자랑 프로가 있었다.


 

나는 뜨거운 박수를 받고 무용 프로그램을 마친뒤 탈의실로 가서 참여했던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다가 아빠들의 프로를 커텐 틈사이로 얼핏 봤다.


 

아빠들 넷이서 착 달라붙은 청바지에 꽃무늬 티셔츠를 입고 머리엔 무스를 발랐는지


저마다 스타 가수처럼 럭셔리가 좔좔 흐르는 모습을 하고 무대에 나선다.


 

나는 그 모습이 하도 우스워 친구들에게 보라고 하면서 커텐을 살짝 폈다.


았............!!!!!!!!!!!!!


 

그 수간 내 눈에 들어온건


이럴수가?.................


 

공연에 앞서 무대를 향해 인사하는 그아빠들 중에 단연 돋보이는 키크고 몸매좋은 사람이


내 아빠가 아닌가.


 

언제 짤랐는지 짧은 스포츠 머리를 베컴 스타일 처럼 치켜올리고 카우보이 청바지에 민무늬


셔츠 입고 평생 일만 하면서 붉게 그을린 근육질 팔 뚝이 내 눈안으로 들어온다....


 

그렇다 ............


 

저분은 분명 아빠였다.............


사시는 평생 아무 불평없이 우리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만 하고 살아왔던 무뚝뚝한 

나의 아빠다.....


아...........!!!!!!!!!!!!!


 

이건 아니야...........믿을 수 없어.......


 

저 분이 우리 아빠라니?.............


 

객석에선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연신 휩쓸 소리를 내며 우리들의 아빠를 응원한다.


그리고 아빠는 객석의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힘찬 인삿말을 던진다.


 

"이노래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선이와 영철이 그리고 앞에있는 모든 분들에게 바칩니다".


그리고 곧바로 나오는  


 

그 아빠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에 나는 쓰러질뻔 했다.


 

그 노랜?...................... 


 

아빠가 근 두달여를 미친 사람 처럼 매일 밤마다 방안에서 오디오 테이프 소리에 수없이


따라 부르던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 했던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었다.


 

아빠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다니....


그렇다 아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나를 위해 불러 주신거였다. 


 

그노래는 이세상에 그 어떤 노래 보다도 더 나의 마음을 감동시킨 하나밖에 없는 


아빠의 노래였다.


 

노래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고 벽에 기대서서 울고있는 나를 


친구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하며 감싸 안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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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네 아빠 진짜 쨩이다.... 멎지다".

 

나는 그후 나의 아빠를 다시 보게 됐고 내가 원하는 대학 무용과에 진학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드디어 부산 모 대학 무용과에 진학 했다...

 

입학 합격사실을 전화로 받은 아빠는 무뚝뚝 하게 나에게 던지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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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욕봤다........."


 

단순한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그간 우리 식구를 위해 오로지 앞만보며 일만 하고 살아온 아빠의 


 

가슴속 깊은 사랑담긴 말이다... 


그 어떤 말보다도 나의 아빠의 그한마디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말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합격 기념으로 노래방 가자는 아빠와 함께 우리식구 모두와 함께


집근처의 노래방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아빠를 위해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힘차게 불렀다 물론 아빠의 익살스런 춤과함께ㅋㅋ

이날 나는 첨으로 엄마의 샤방샤방한 이쁜 얼굴까지 보게되었다......^^


 

작은 행복이지만 나에겐 아주 소중한 행복이었고 그어떤 행복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가족만이 누릴수 있는 그리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평생 영원히 가슴에 담아둘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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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사랑해요 ^^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올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가족과 함께 행복한 설 꾸미세요 

모두에게 행복 마안땅 ....................^^

 

블로그 : 마도로스 스토리 / http://blog.naver.com/alpalaval
 
아래 그림은 그리을 좋아해서 잘그린 솜씨는 아니지만 연필 맛을 즐기며 취미로 그린 연필화 습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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