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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식민지근대화론과 대비되는 글
게시물ID : history_249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비올투비
추천 : 5
조회수 : 37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1/16 14: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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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말,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빠르게 성장하던 일본경제는 침체에 빠졌다. 그러자 일제는 식량과 공업 원료를 한국에서 값싸게 공급받고, 일본기업의 한국 침투를 돕기 위한 조치를 잇따라 시행하였다. 1920년부터 시작된 산미증산계획은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수리 시설의 확대와 품종 교체, 화학 비료 사용 증가 등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의 지주는 다소 이익을 보기도 했지만, 소작농은 수리 조합비나 비료 대금을 비롯한 각종 비용부담이 늘어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결국 지주는 빠르게 토지소유를 확대해나갈 수 있었으나, 자작농이나 자․소작농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화전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 늘어난 생산량보다 더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나갔다.

한편 1920년에 일제가 회사 설립을 신고제로 바꾼 이후, 면방직이나 식료품 공업, 광업 분야에 일본 자본의 침투가 늘어나면서 노동자의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일제는 일본자본의 높은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인 노동자의 탄압을 일삼았는데, 한국인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민족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당했다.

1930년대 이후에 일본 자본의 침투가 크게 늘어났다. 총독부가 일본은 발전된 공업 지역으로 유지하면서, 만주는 농업과 원료 생산 지대로 만들고, 한국은 경공업 중심의 중간지대로 만들기 위해 조선공업화 정책을 폈기 때문이었다. 주로 한반도의 북부를 중심으로 추진된 조선공업화 정책은 대륙침략을 위한 전쟁 물자 생산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추진되었다. 일제는 전력자원을 개발하고 토지와 노동력을 값싸게 공급하였으며, 광산자원을 약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대자본이 활발하게 침투하면서,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금속, 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총생산액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회사자본의 대부분은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경영진, 상급기술자도 일본인이 주를 이루었다. 반면에 한국인 노동자는 최소한의 노동기본권도 보장받기가 어려웠으며, 임금과 승진에서도 여러 가지 차별을 받았다. 결국, 조선 공업화 정책은 한국인의 노동력과 자원을 수탈하여 일본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해 나가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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