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말이 시작되기전, 5:1이 되었을 때 전 채널을 잠시 돌렸습니다. 아득해지더군요. 초등학교 3학년때 코 찔찔 흘려가면서 이종범을 외치던 저는 정말 12년만에 우승에 도전하는 팀의 마지막을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구톰슨도 원망스럽지 않고 누구도 원망스럽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였구나, 여기까지구나.' 그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채널에서는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저는 고개를 떨구고 아무것도 못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진심으로 응원하는 팀의 마지막을 지켜보자'라는 생각에 다시 채널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9회말, 나지완선수가 채병용의 높은 공을 쳤을 때 전 넘어가는 걸 보기도 전에 울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월드컵 때도 울어본 적 없었을 정도로 스포츠를 보면서 운 적은 없었는데, 오늘 울었습니다. 나지완선수가 3루를 돌면서 울면서 홈으로 들어올 때도, 나지완선수를 보면서 처음에 경악하면서 환호를 지르던 사람들도 한두명씩 울기 시작했을 때도, 이용규선수가 홀로 계단에서 눈물을 훔칠 때도, 이종범선수가 껴안고 통곡을 할 때도 울었습니다.
미안합니다, 해태 그리고 기아. 당신들이 정상에서 내려앉아 하위권을 맴돌 때 그리고 해태가 망하고 기아로 새출발할 때 전 프로야구를 더이상 보지 말자 생각하고 잠시 당신들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당신들의 팬으로 돌아온 후 놀랐습니다.
이종범 선수가 주름이 그렇게 생긴지도 몰랐고 김종국 선수가 저렇게 얼굴이 수척해진지도 몰랐고 이대진 선수의 얼굴에 저렇게 그늘이 생겼는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해냈습니다. 그리고 전 정말 기쁩니다. 너무나도.
물론 앞으로도 기아가 최강의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전 앞으로 계속 기아의 팬이 될 것이고, 시즌 전패에 8위를 기록해도 당신들의 팬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아 팬임을 말하면서 인터넷이나 오프라인에서 다른 팀을 인신공격하는 등의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기아의 이름에 먹칠하는 팬이 되고싶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수고했습니다, SK. 이번 시리즈가 끝나니 당신들의 강함을 알 것 같습니다. 당신들이 상대라서 이렇게 KBO 사상 최고의 명승부가 나왔던 것 같습니다. 3년동안 당신들을 증오했지만 이제 SK도 하나의 '잘하는 팀'으로 보고 잘할 때는 박수쳐드리겠습니다. 다시는 윤길현, 정근우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