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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입시학원 이틀만에 때려친 썰.
게시물ID : animation_2501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도로thㅣ
추천 : 15
조회수 : 3906회
댓글수 : 47개
등록시간 : 2014/07/13 21:58:50

덕질할 시간이 없으므로 음슴체...

1.
본인은 스물셋 그림 짱짱 못그리는 여징어임.
심지어 전공도 그림쪽이 아니라 독일문학과 종교문화학이라는 고학력 백수의 길을 걷고 있음.
그래도 그림에 대한 욕심은 있어서...
나중에 학교 졸업하면 '쥐' 나 '페르세폴리스' 같은 르포만화라고 해야하나?
그런걸 한번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있음. 

고등학교 때는 동네 화실 다니면서 회화 전공하신 분께 미술을 배웠었는데,
집안 사정 때문에 돈을 드리지 못하게 되서.... 
쌤은 그냥 다니라고 했지만 서로 배고픈 입장끼리 그러는건 너무 도둑놈심보 같아서 
고2 이후로 미술을 배울 수가 없었음 ㅠ//ㅠ......

그래도 그림 연습은 띄엄띄엄 혼자서 해왔었는데
해부학책 보거나 구글에서 사진 찾아서 따라그리는걸로는 더 배울 수가 없는 것 같은거임
일단 기본기도 부실부실하고...
풍경화나 앵글 있는 걸 그리고 싶은데 그게 안돼..ㅠㅠㅠㅠㅠㅠㅠㅠㅠ

(놀려고) 휴학했는데 때마침 걸어서 10분만 걸으면 되는 곳에 애니학원이 생긴거임!
알바해서 돈도 들어왔겠다, 용기 내서 나이 스물셋 먹고(..) 고등학교 입시학원의 문을 두드림.
원장과 짧은 상담 후 학원비 딜을 한 다음에 
다음날부터 취미반으로 매일매일 하루 2시간씩 애니학원에서 그림을 배우기로함.

월급님이 한방에 로그아웃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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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올라가면서 진짜 두근두근했음!
파릇파릇한 학생들 사이에서 늙은이 냄새 풀풀 풍기는 내가!!!!!
카페에서 빙수나 커피를 얻어마시며 애들의 언어 / 외국어 / 사회영역 공부를 알려주는!!!
따뜻하고 깨발랄하며 덕스러운 언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음!!
그리고 진짜 오래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미술을 정식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것도 두근두근 ㅠㅠ!

올라갔더니 강사가 나보다 한살 많음.......ㅋㅋㅋㅋㅋ
보아하니 만창과로 유명한 그 전문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학원에 취직한 듯함.
원장하고 상담할 때 만화쪽에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난 그게 모든 일의 원흉이 될줄은 모름 ..

첫시간에는 실력테스트 비스무리한 걸 함. 
화실에서 그림 배웠다니까 기초도형 뭐뭐 그려봤냐고 물어봄.
근데 나는 기초도형을 그려본 적이 구밖에 음슴.........
왜냐하면 그리고 싶은것만 그리게 하셨기 때문에..

발도 그려보고 아그리파도 그려보고 세네카도 그려보고 ()() 
일러스트 모작도 해보고..사진 보고 따라 그려도 보고...
여튼 진짜 자유분방하게 미술을 배운 나년임
재료도 수채화, 크레파스, 파스텔, 목탄등등 진짜 다양하게 쓰면서 배워봄

그 때 쌤이 하신 말이
"넌 아무것도 할 줄 아는게 없으니까 진짜 가르치는 맛이 있엌ㅋㅋㅋㅋㅋ"

여튼,화실에서도 나는 취미반이기도 했고, 
선생님 취향이 저런 자유방임주의셨기 때문에.
나는 참 재밌게 그림을 배웠음 ㅇㅇ.......
못그려서 짜증났던 적은 많아도 그리기 싫어서 스트레스 받은 적은 없으니까.

그래서 강사한테 구는 그려봤지만 체계적으로 배우진 않아서 다른 도형은 그려본적은 없다고 말하니까
강사가 하는 말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기 좀 이상한 화실이네."
"거기 좀 이상한 화실이네."
"거기 좀 이상한 화실이네."
"거기 좀 이상한 화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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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첫날은 그려려니하고 넘겼음.
나이도 스물넷 밖에 안됐잖아? 군대도 다녀오고 막 사회에 나왔으니까 패기가 넘칠만하자나?
근데....ㅠㅠㅠㅠㅠ
실력테스트랍시고 구를 딱 그리는데 강사가 1시간이 넘도록 코멘트를 안해줌..hㅏ.....ㅠㅠㅠㅠㅠㅠㅠ
그림을 안봐주니까 소심한 나년은 그냥 2시간 내내 완성된걸 계속 만지다가 결국 망쳐버림..
그제야 옆에 와서 너무 진하다고 하고 가버림 ..ㅠㅠㅠㅠㅠ

다른 애들은 모작하는거 꾸준히 봐줬으면서 으앙
나도 내돈 내고 배우는건데 으아아앙

그런데 자꾸 수업중에 부심을 엄청 부리는거임
나 자꾸 다른 학원에서 스카웃 제의 들어와서 고민된다고 ㅋㅋ
너희들 애니학원에서 해부학까지 가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없는줄 아냐고ㅇ....

근데 생각해보니까 전국에서 만화/애니 입시하는 사람들이 몇만명이고
전공자나 졸업자는 또 얼마나 많을것이며 그중에서 입시학원으로 뛰어든 사람이 적진 않을텐데
거기서 주로하는게 인체나 해부학같은 것일텐데..?
같은 의문은 들긴 했지만 .....

어쨌거나 학원에서 스카웃 제의 올 정도면 실력은 있겠구나 싶어서
뒤늦게 중이병 걸린 강사를 믿고 따라가기로 함.


4.
그리고 다음날.
드디어 지겨운 구 그리기를 끝내고 사람 얼굴 그리기를 들어감!!!
내가 가장 배우고 싶었던 얼굴근육!!! 표정!!! 다양한 각도!!!!!!!
나도 존잘이 될테야!!!!!!

그래서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강사가 얼굴 강의하는 것을 듣기 시작함.
1:1:1법칙..이라고 이상적인 얼굴 그리는 방법을 알려줌.
그러면서 또 화실에서 이런거 배웠냐고 묻는거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이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안배웠다고!!!!!
똑같은 말을 몇번이나 하게 만드냐!!!
나는 그냥 보이는대로 그리는 법을 배웠다고!!!!!!

어디까지나 취미반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체계적으로 배우진 않았다고 하니까..

"이런건 취미라도 다 알려주는데..? 도대체 어디서 미술을 배운거에요? 진짜 이상한데서 배웠나보다. 선생님이 진짜 실력 없으신 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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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야이씨.......

우리 화실쌤이 서울 4년제 회화과 나와서
니 나이만큼 입시미술 가르치신 분이에여...ㅇ;;;;;;;;;;;;;;;;;;;;;;;;;
그러다가 니들처럼 기업 미술학원이 애들 다 빼가서 그냥 취미로 애들 가르치시는 분이에여 ㅇ;;;
그러니까 니 응애하고 태어날때 쌤은 이미 회화과 졸업해서 화실 물려받았다고..ㅠㅠㅠㅠㅠㅠㅠ

나도 사실 성격이 막 착하고 순한 성격은 절대 아닌지라
그 자리에서 받아침

"그런 말하지 마세요. 기분 나쁘니까."


으 오글거려ㅋㅋㅋ

이렇게 착하고 똑똑하고 덕스러운 언니의 이미지는 저 하늘나라로
애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일진언니가 되었다고 함..ㅠㅠㅠㅠ
난 아직도 그 순간 얼어붙은 교실 분위기가 기억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4.
그리고 뭔가 애매한 상태에서 얼굴 사진을 따라그리고 있는데
진짜 계속 기분이 나쁜거임.

내가 못 그리면 나를 혼내면 됨.
내가 모르면 나한테 핀잔 주면서 가르치면 되는거임.
근데 왜 나한테 처음 미술을 알려준 선생님을 까는거임 ㅠㅠㅠㅠ???

뭔가 계속 싱숭생숭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집에 가니까
뒤늦게 화가나는거임

으아아ㅏㅏ 시ㅏ바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그릴 수 있는게 입시미술 밖에 없는 놈이 부심은 드럽게 부리네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

그래서 야밤에 학원을 때려치기로 결심하고
내일의 알바를 위하여 일찍 잠듦.

5.
대망의 셋째날.
이날은 바로 수업하는 교실로 안올라가고 3층에 원장한테 이야기하러감.
아 어제 취미분 이야기 많이 했다고
감각이 있으신것 같다고 막 칭찬을 하는거임

헐 내가 23년살면서 그림으로 칭찬 듣기는 처음
미래의 대작가를 알아보는 눈이 있으시네


원장 : 00씨 여기는 왜 올라오신거에요 ㅎㅎㅎ??
나 : 학원 그만 두려구요 ㅎㅎ
원장 : 왜..요?
나 : 강사가 인간이 덜 된 것 같아서요 ㅎㅎㅎㅎㅎㅎㅎ

그렇게 구구절절한 내 이야기가 시작됨

어제 얼굴 그리는 법을 배우는데, 1:1:1 법칙을 모른다고 하니까,
다녔던 화실이 이상한 곳 아니냐고, 실력없는 선생님한테 배운 모양이라고 하더라.
내 실력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것은 나도 할말이 없다. 
못그리는거 사실이니까. 당연한 소리니까 괜찮다.

(이때쯤 강사가 상담실로 소환당함)

난 어디까지나 취미로 배웠기 때문에 당연히 못그린다. 
그럼 나를 혼내야지 왜 나한테 미술을 가르쳐준 선생님을 혼내는거냐.
그 사람 스물 네살이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최소 저 사람 나이만큼 학생들을 가르쳐오신 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사님께 실력없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욕먹을 실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런건 입밖으로 내면 안되는거 아니냐.
애들이 그런 장면을 보고 무슨 생각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겠느냐.
이렇게 편협한 시각을 가진 사람 밑에서는 그림 배우기 싫다.
환불해달라.

강사한테는 당일에 지나가는 말이라도 사과를 들었고
앞으로 원장의 포풍갈굼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사과하라고 요구는 굳이 안함.
환불도 전액 쿨하게 받아서 모든 상황 종결.
그리고 지금은 화실 다니면서 마음에 힐 걸어주는 중

6.
입시학원은 고작 이틀밖에 다녀보지 않았지만
뭐랄까, 거기 다니는 애들은 그림 그리는게 행복해보이진 않았음.
분명 그림 그리는게 좋으니까 학원에 온 것일텐데, 
내가 보기에는 그림 그리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는 느낌이 들었음.

원래 틀리고 못그리면서 느는게 그림인데, 그곳에 있는 애들은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느낌?
시작부터 실수 없이 그려야한다는 압박감이 있는 것 같았음.
그리는 것들도 다들 연구작 모작... 수상작 모작.........
칸만화 그릴 때도, 도입부는 무조건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을 그리라고 가르치고.
창작이론을 배우는 것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지만..
입시현장에서는 100명중 100명이 다 그렇게 그릴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생각하게 됨.

난 늘 생각하는게, 만화를 하기 위해서 꼭 만화를 전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
그림은 노력하고 공부하고 배우면 언제든지 좋아질 수도 있는 것이고.

입시미술학원은 그 실력을 단기간에 빡세게 끌어올리는 곳인것 같음.
나처럼 기초도 뭣도 없는 미래의 고학력 백수는 자유분방한 화실을 다니는 것보다 
이곳에서 배우는게 단기간에 실력상승을 이룰 수 있을거임.

만화나 애니 전공하는 친구들은 몇년을 그렇게 하는 것이니 그림도 점점 더 잘그리게 되겠지.
그런걸 전공했다는 이점이 나름 그쪽 업계에서 먹고살 수 있는 명함도 될 수 있겠고...

하지만 스토리는 만화를 전공했다고 더 좋은 스토리가 나온다고는 생각하지 않음.
스토리는 그 작가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함.
그걸 가르는게 '경험'이라고 생각함. 나는...
잘 그린 만화는 그림체 상관없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작품이고.

아르바이트에 대한 만화를 그린다고 할 때, 
알바를 한 사람과 안해본 사람의 스토리는 당연히 다를 것이고,
악덕사장을 만나본 사람과 꿀알바만 해본 사람의 스토리도 당연히 다를 것임.
그리고 피부에 닿는 것은 알바를 해본 사람이 그린 만화일거임.
처절하기로는 악덕사장 만나본 사람이 더 처절하게 그리겠지.

공부는 죽어라 안하지만 항상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음.
지금도 사람들 만날 때 아는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말하고 다님.
난 그냥 뭐랄까.. 사람들한테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 인문학을 공부하는거임.
내 고민을 표면만 보이는 것이 아닌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보이고 싶음.

사실 그러려면 책을 읽어야하는게 아니라 진짜 현실과 부딪혀봐야한다고 생각함.
<누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이 현상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가 아니라
<내가 이런 경험을 해봤으니까 나는 이 현상을 이렇게 말할 수 있어!!>가 더 좋음.
인문학은 그 경험을 생각할 수 있는, 느낄 수 있는,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학문이지 
지식을 뽐내기 위해 배우는 아니라고 생각함.
이건 내 개인생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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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말로, 입시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애들이 너무 불쌍했음.
저 나이때는 학원에서 입시경향 따라 그린 작품들을 모작하는게 아니라
공원으로, 산으로, 강으로 나가서 본인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야한다고 생각함.
우리나라 입시미술 너무 답답한 것 같음...
아니.. 대한민국 입시현실 전반이 답답한 것 같음 ㅠㅠ
나야 취미반이었으니 때려치면 그만이지만 미술쪽 진로하는 애들은 힘들어도 따라가야하고..ㅠㅠ
이런 답답한 것은 정말 언제 고쳐질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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