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몇 명을 동시에 사랑했어.
J는 고백했다. 마침 해가 지나가는 중이었다. J의 그늘에도 해를 따라 그늘이 졌다. 나는 숨을 길게 뿜어냈다. 커피 위에 모여있던 뜨거운 연기가 그늘을 따라 천천히 녹아들었다.
그럴 수 있는 일이지.
내가 대답했다. 그늘은 지나가기 마련이니까. 이 다음에는 해가 있는 법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시작이니 끝이니 하는 거야. 나는 변변찮은 궤변을 늘어놓았다. J는 실망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J의 눈동자가 잠깐 가라앉았다. 먼 곳을 보는 표정으로 J가 말했다.
환자인데 커피 마셔도 돼?
환자니까 마시는 거지 뭘.
그럴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창문 밖으로 다시 해가 지나갔다. 조명을 받아 병원이 까맣게 물들었다. J는 마치 물들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여행을 갈 거야. 나는 말했다. 잘 다녀와.
J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원망이 가득 들어찬 눈동자였다. 그러다가 해가 지나가는 것처럼, J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J는 소매로 눈을 훔치더니 말했다.
미안, 너는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텐데.
J는 그 말을 남겨놓고 떠나갔다. 다음에는 찾아오지 않을 거야, 하고 J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J가 병실을 빠져나간 후에 간호사가 다가와서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는 다시 떠오를 거에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며칠 못 살 거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잖아요.
내가 대답했다.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수없이 많다. 그럴 수 있는 일들. 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니다. J의 해를 가져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잠시 그늘이 진 것이면 충분했다. 나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약속, 지켜줄 거죠?
간호사는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든 커피는 어느새 차가워져있었다. 후, 하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침 해가 지나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