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찌는 듯한 더위지만 방안은 시원했다. 당연하게도 새로 들인 에어컨 덕분이다. 약간 소음이 나는 듯 했지만 뭐 상관은 없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에어컨 위에 30대의 작은 남자가 앉아 있다.
"아" "이런 들켰네!"
말과는 달리 전혀 들킨 표정이 아니었다. 그보다 수다를 떨고 싶어한 얼굴이다. "누구?" "전 에어컨의 천사랍니다. " "에어컨의 천사?"
"사실 천사라기 보다는 신이야 최근에 에어컨이 너무 많이 보급이 되서 우리들은 좀 흔해졌거든요. 예전에는 비싸서 그리 바쁘지가 않았는데..흠"
"미묘하게 반말과 존댓말이 멋대로네?" " 어. 신경안써도 된다구. 그정도는 요" "그런데 신이나 천사는 오래된 나무나 집터같은 것에 들어있는줄 알았는데..." " 아. 그렇지도 않아. 물건에 깃들여 있는 수호신 같은 거지. 새로운 게 발명이 되면 거기에 맞춰 신이 등장하는 거야"
"그럼 너 말고도 다른 신들도 있어?" " 그럼 . 한 번 보러 갈까? 마침 이번 상반기 폭염대비 미팅이 선풍기 신들과 있으니..."
2. 신들의 세계로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칭 에어컨의 신의 손을 잡고 순간 이동했으니..
말대로 다양한 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있는 것은 냉장고의 신이고...저 쪽에 인상을 쓰고 잇는 것은 주판의 신이야. 계산기의 신과 사이가 안 좋아.뭐 나도 난로의 신과는 껄끄럽지만..."
하지만 내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한 쪽 구석에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신. 온 몸이 피와 땀으로 물들어 있고 화약냄새를 멀리 서도 맡을수 있을 정도다. 눈에는 핏발이 서있으며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고 있는 모습은 한 눈에도 알아 볼수 있다.
바로 전쟁의 신이 분명했다. .
난 에어컨의 천사에게 물었다.
" 저 신은 왜 저렇게 피곤해 보이지?"
"그거야 당연하지... 거의 수천년 동안 제대로 쉰 적이 없으니까. 한 때는 유럽에서 한 때는 독일에서 그리고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쟁터를 누벼야 했으니까."
난 그 신에게 다가갔다. "어딜 거는 것인가요?" "따져야 겠어" "뭘?"
"왜 인간을 그렇게 못 살게 하는 건지. 왜 어린 아이들과 약한 여자를 비참하게 만드는지. 왜 끝없이 피와 화약과 칼을 휘두르게 만드는 건지. 난 알아야 겠어. 그리고 막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