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우리 나라의 사회경제는 몇 차례의 변혁을 겪었다. 그것은 일본 자본주의 발전단계에 따라 식민지정책이 자주 바뀌었고, 민족자본이 이에 대응하면서 발전을 시도한 데서 온 현상이었다.
그 첫 번째 시기는 1910년대이다. 이 시기에 일본은 제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비약적인 발달을 이룩할 때였다. 당시 일본은 우리 민족의 단순노동력을 이용하여 일본의 공업 원료와 식량을 확보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일본은 합병 후 한반도 안의 근대 공업의 발달을 견제하면서 공업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회사령 朝鮮會社令>을 공포하였고, 일본 공업화를 위한 식량을 효율적으로 확보하고자 <토지조사령 土地調査令>을 발표하였다.
<조선회사령>은 1910년 12월에 시행세칙과 더불어 제정, 공고되고, 1911년 1월부터 실시된 법령으로서, 그 근본 목적은 우리 나라의 근대 공장의 건설을 억제하자는 정책에 있었다.
1912년부터 실시된 토지 조사사업은 이 시기 일본이 우리 나라를 통치하는 데 많은 의의가 있는 작업이었다. 즉, 일본은 우리 나라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조선인 내부 지지세력을 귀족·양반 등 구지주층에서 얻고자 그들에게 토지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인정하였고, 지주와 농민과의 봉건적 예속관계를 유지시키고자 봉건적 소작관계 및 현물소작료제도를 강화하였다.
일본은 또 이 조사사업을 통하여 국유지 및 국유림을 조선총독부 소유로 옮겨서 통치재원(統治財源)을 확보하였다. 이리하여 이 시기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진출한 자본은 농림회사(農林會社)·수산회사·광산개발회사, 광석 처리를 위한 제련회사 및 면화회사(綿花會社) 등을 설립하였고, 그 밖에 일본 내의 공업과 경쟁할 가능성이 있는 근대 공업은 억제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민족자본에 의한 근대 공업이 발달할 수 없었다. 1910년대의 우리 나라 사회는 식민지의 반봉건적 성격(半封建的性格)을 가장 짙게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시기는 1920년대이다. 일본은 제1차세계대전 후 불황에 들어섰고 해외무역은 감소되었으며, 국내 공업은 전시 경기를 타고 비대해졌던 시설의 가동률이 40∼50%로 떨어졌다. 이러한 불황에서 일본은 우리 나라로 눈을 돌린 것이다.
1920년 4월을 기하여 공업발달 억제의 구실을 하던 <조선회사령>을 철폐하고 일본 내 유휴자본의 진출을 허용하였다. 일본이 우리 나라 사람을 단순노동력에서 기능노동력으로 전환시키려 하였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우면서 우리 나라 사람에게 초등교육과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사회 경제환경이 변화되면서 민족자본이 근대기업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근대기업에 진출한 민족자본은 크게 둘로 분류된다.
하나는 미곡을 일본에 수출하여 화폐자본을 축적한 대지주 및 거상(巨商)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농림회사·수산회사, 그리고 일부는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공업·섬유공업·염직공업 등에 투자하였다.
다른 하나는 소상인·소지주 및 전통 상공업 분야에서 잔명(殘命)을 유지해 온 영세상공업자로서, 1920년대 근대 공업화에서 기능공으로 체험을 쌓아 온 기능공들이며, 그들은 중소기업 분야에서 활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민족기업은 1920년대에 대두되는 민족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또 한편, 한반도에서 공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농민과 노동자의 의식도 발전되어 1920년대 중반부터 반제반봉건운동(反帝反封建運動)도 활발해졌다. 1920년대는 이와 같은 여러 사회경제 및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식민지 초기단계의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를 이루는 시기였다고 하겠다.
세번째 시기는 1930년대와 1945년의 광복에 이르는 15년간이다. 이 시기에는 민족자본이 다시 심각할 정도로 예속화되기 시작한다.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부 지방인 만주를 보호령(保護領)으로 확보하고 만주국을 건설하면서 1937년에는 중국 본토 침략을,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제2차세계대전으로 돌입한다.
이 시기는 일본 독점자본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우리 나라에 중화학공업을 건설하였고, 이 과정에서 대지주·대상인 자본으로 건설된 민족기업체는 일본 독점자본에 영합하면서 존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군소자본으로 이루어진 중소기업은 기업 정리과정에서 몰락하였고, 소수는 그 하청 부분을 담당하면서 잔명을 이어 나갔다.
이와 같이 하여 일제강점하에 우리 나라의 사회경제 관계에서는 전통사회에서 물려받은 봉건 잔재를 청산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하면서 거기에 새롭게 식민지적 경제 유산을 남기고 한반도에서 물러선 것이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7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