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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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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노낙
추천 : 7
조회수 : 2113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1/09/01 22:24:01
제목 보고 '고구려 요동사', '고구려 만주족사', '고구려 중국 지방정권사' 등등을 추종하는 인간들이 벌떼같이 클릭질 하는 게 예상됩니다. 요즘 고구려가 우리 역사가 아니라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말입니다. 도대체 개념은 어디다 짱박고 다니는지 말입니다. 이런 인가들 덕분에 오래간만에 글이나 한 번 써보게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우리 역사가 아니라고 목에 힘줄 세우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논거는 고구려와 현재 대한민국의 계승 관계가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조금밖에 수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혈연적으로도 우리와 별로 관계가 없고, 게다가 신라와 고구려는 다른 종족이었으므로 지금 대한민국은 신라를 계승한 것이지 고구려는 우리 역사라고 인정될 근거가 별로 없다고 주장합니다.

얼핏 듣기에 상당히 논리적이어서 수긍하기 쉬워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민족주의자들은 고전하는 것은 나도 마음이 아프지만 이제 겨우 논쟁 초반일 뿐입니다. 성급해 하지 말지 말입니다. 하지만 민족백서가 출동한다면 어떨지 말입니다.

쉽게 쉽게 쓸 터이니 끝까지 읽어주시지 말입니다. 글을 쓰다 보니까 좀 길어져서 연재로 씁니다. 오늘은 우선 우리 민족의 기원인 고조선을 고구려가 계승했는가의 여부를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항은 학계에서도 아직 거론되고 있지 않는 내용이고, 본햏도 자료를 접하다가 독자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본햏은 게시물을 작성할 때에는 존댓말을 씁니다. 하지만 맆흘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찌질이라면 쌍욕 처들을 각오도 하셔야 합니다.


1. 한민족의 기원인 고조선과 단군, 그리고 고구려의 관계


(1)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단군壇君

단군 신화와 고조선을 한낱 신화로 치부하며 역사의 영역에서 배제해버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민족의 시작이 고조선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군과 고조선이 실제로 존재했는가의 문제(*주1 참고)는 차치하더라도, 일연의 [삼국유사] 이래로 우리는 민족의 시발점이 단군과 고조선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럼 한민족의 기원인 고조선과 고구려의 관계를 한번 고찰해봅시다. 우선 기록들을 좀 보지 말입니다.

갑신년에 즉위하였고 19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성은 고씨이며,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혹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 
- [삼국유사] 왕력 1, 고구려 동명왕조

단군壇君이 서하西河 하백河伯의 딸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아 부루라 하였으니, 부루와 주몽은 이모형제일 것이다. 
- [삼국유사] 권1, 고구려조

(전략) 결국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와 더불어 남으로 망명하였는데 부여의 추격이 뒤따르고 앞에 엄체수가 있어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물을 향하여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인데, 추격이 급박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외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물위에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건널 수 있었다. - [동명왕편]

(전략) 왕은 천제天帝의 아들일 것이라 생각하여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하고, 항상 말을 사육하게 하였다. 
동명은 활을 잘 쏘니(후략) -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열전30, 부여전

주몽의 아버지는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이고, 따라서 위 기록들에서 언급되는 '단군'과 '천제'는 곧 해모수를 일컫습니다. 해모수를 단군이라 칭한 것을 보면 해모수가 옛 고조선의 단군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군 신화에서 보여지듯이 단군은 하늘에서 도래한 환웅의 아들이었으므로 해모수를 '천제'라고 칭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참고로 [삼국사기]에서는 해모수를 '천제의 아들'로 표현하고, 다음 항목에서 인용할 광개토대왕비문에서도 해모수를 '천제'로 일컫습니다.

이처럼 해모수는 단군의 후예인 동시에 고조선의 계승자로서 북부여를 세웁니다. 그리고 주몽의 후손들, 즉 훗날의 고구려인들은 광개토대왕비문과 모두루 묘지문에서 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해모수의 북부여를 계승했음을 밝힙니다.


(2) 고구려인들이 직접 쓴 '단군 해모수' 계승 의식

옛날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우셨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오셨으며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후략) - 광개토대왕비문

하백의 손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인 추모성왕鄒牟聖王은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으니 천하 사방은 이 나라와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운 곳임을 알아라.(후략) - 모두루 묘지문

원래 주몽은 해부루가 부여를 동쪽으로 옮긴 동부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웠으므로 실제로 북부여가 아니라 동부여에서 도래한 것이 맞습니다. 이것을 모를리 없는 고구려인들이 사실과 어긋나게 기록한 광개토대왕비문과 모두루 묘지문의 내용은 주몽이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의 계승 의식이 분명했고, 고구려 역시 그러한 의미로 건국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삼국유사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였다
- <삼국유사>

이처럼 고구려가 단군의 후예인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계승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3) 고구려의 첫 점령지의 이름이 '다물'로 개칭된 이유

주몽은 고구려를 세우고 즉위한 기원전37년에 송양의 비류국을 정복합니다. 주몽은 자신과 고구려의 첫번째 점령지인 비류국의 이름을 '다물'로 개칭하는데, '다물'이란 고구려말로 곧 '옛 땅을 회복한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고조선의 멸망 이후 낙랑과 현도, 그리고 그 행적이 뚜렷하지 않은 북부여와 동부여밖에 남지 않아 슈퍼파워의 공백 지대로 남아 있던 요동 및 만주 지역을 회복한다는 강력한 의사 표명으로서, 곧 고조선에 대한 계승 의식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4)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묘사되는 단군 신화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는 단군 신화가 묘사됩니다. 장천 1호분의 벽화를 보면 나무 아래 굴 속에 곰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으며,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굴 밖으로 뛰쳐나간 호랑이가 말 탄 무사들의 화살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군신화의 내용과 일치하며, 호랑이가 무사들의 공격을 받는 것은 환웅족이 곰족과 결합하여 단군을 낳은 것과는 달리 호랑이족을 배척한 것을 의미합니다.

또 각저총의 벽화에서도 두 씨름꾼이 맞붙어 싸우는 왼쪽 나무 아래 곰과 호랑이가 등을 돌리고 서 있습니다. 나뭇가지에는 수많은 열매가 매달려 있는데, 이는 두 부족의 싸움에서 승리한 쪽이 가질 수 있는 정치권력과 이권 및 전리품을 상징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역시 단군 신화를 묘사한 것입니다.


(5) 결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단군의 후예인 해모수의 아들이었고, 후대의 고구려인들도 주몽과 고구려가 북부여를 계승했다는 의식을 뚜렷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몽은 첫번째 점령지인 비류국을 옛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의 '다물'로 개칭하여 고조선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고, 고구려의 여러 벽화에서 단군 신화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는 분명히 우리 민족의 시발점인 고조선과 단군을 계승한 나라였고, 따라서 우리 역사의 일익을 맡고 있는 것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1 : 참고로 해방 이후에 학계에서 단군조선을 신화로만 처리하고 그 실체를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식민사학자로 유명한 이병도는 죽으면서 단군과 고조선이 실재했음을 고백했고, 1960년대를 기점으로 단군조선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여러 각도로 나타났으며, 특히 문화인류학적인 측면과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단군조선을 새롭게 부각하는 연구가 나타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대부분 단군조선을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글에서는 고구려 멸망 이후에 고구려가 어떻게 지금의 우리로 계승되는지를 고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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