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중국이 수교를 한 것은 1949년10월. 올해로 57년을 맞는 양국 관계가 ‘혈맹’ 또는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으로 표현되는 것과 달리 사실은 긴장의 연속이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6일 선즈화(沈志華) 중국 화둥(華東)사범대 국제냉전연구중심 주임 등 중국의 북·중 관계 전문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중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은 선전의 결과일 뿐, 지난 57년을 되돌이켜보면 늘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해 36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한국전쟁 초기 중국의 참전을 바라지 않았다.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으로 위기를 느낀 소련이 그해 7월, 중국의 참전을 공식 요청했지만 중국은 그해 10월까지 참전할 수 없었다. 중국의 참전을 꺼린 북한측이 군사 작전 지도는 물론이고 중국측에 제대로 된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선 그해 10월1일, 김일성 주석은 부랴부랴 참전을 요청하는 서한을 중국에 보냈다. 중국이 참전한 뒤에도 펑더화이(彭德懷)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과 김일성 주석은 작전 지휘권과 추가 진격, 휴전 문제 등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했다. 중·조 연합사령부를 50년12월4일 창설했지만 누가 지휘권을 가질지에 대해 서로 양보를 하지 않았다. 결국 중국측이 사령관, 북한이 부사령관을 차지하는 선에서 매듭을 지었다.
51년 1·4 후퇴 당시 김 주석은 서울 점령을 계기로 서둘러 추가 공격을 희망했지만, 펑더화이 사령관으로부터 “전쟁을 망친 것이 누군데 우리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는것이냐”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52년 미군의 대규모 공습이 계속되자 김 주석은 조속한 휴전을 바랐지만 이번에도 중국측이 거절했다. 이쪽의 약점을 보이지 말자는 의도였다.
58년 단행된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도 북측의 강력한 요구로 실현된 것이다. 앞서 56년 소련의 스탈린 격하운동에 자극을 받은 북한내 연안파(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간 인사)가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사전에 꼬리가 잡혔다. 상당수는 체포됐지만 평양 시당 위원장 등 일부 인사는 압록강을 거쳐 중국으로 도망쳤다. 결국 소련의 중재로 중국에 망명한 인사들을 송환하지 않는 대가로 중국인민지원군은 북측의 요구대로 58년 철수했다. 김 주석은 수십만명의 중국 군대가 전쟁 복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장기간 주둔하고 있는 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북한은 한국전쟁 관련 박물관이나 전시관에 중국 인민지원군의 활약상에 대한 전시물은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60년대 중·소 분쟁 당시 소련이 북한에 대해 섭섭하게 대하자 북한과 중국 관계는 호전됐다. 하지만 중국이 78년 개혁개방정책을 펴기 시작하자 북한은 중국과 다시 거리를 두었다. 김 주석은 중국이 사회주의 본질에서 벗어난다고 보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소극적이었다.
양국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92년 한·중수교였다. 해마다 한번씩 중국을 찾던 김 주석은 한·중 수교 의사를 통보받은 91년 10월 방중을 끝으로 9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국을 단한번도 찾지 않았다. 92년 4월, 한·중 수교의 불가피함을 설득하러 평양에 갔던 양상쿤(楊尙昆)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한·중 수교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김정일 당시 노동당 비서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북·중 관계는 94년 김주석 사망 이후 97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취임때까지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 와중인 90년대 중반, 양국의 첩보전이 벌어져 서로간의 첩보망이 와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의 정보기관(국가안전국) 책임자가 북한측에 미화 30만달러에 매수돼 북한내 정보망이 일망타진되는 일이 일어났다. 중국도 북한에 비밀 문건을 건네주던 옌볜의 조선족 공무원 간부와 직원 10여명을 적발했다.
2000년대들어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양국의 불편한 관계가 지속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말로는 미국을 겨냥한다고 하지만 언제 총구를 중국으로 돌릴지 모른다는 게 중국의 시각이다. 그럼에도 북한의 완충지대로서의 전략적 지위를 고려해 중국은 무상원조를 하는 등 북한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웃나라로서 대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