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데이는 유럽에서 유래되었다. 이 날은 지인들에게 초콜렛이나 먹거리를 나눠주며 편지도 써주고 성 발렌타인을 기리고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하는 그런 날이다.
그런데 이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살짝 바뀌기 시작한다. 일본의 한 제과회사가 내성적인 여자아이들도 이 날만은 남자에게 초콜렛을 전해주며 속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날이라며 시작한 이벤트가 일본전역에 퍼져 한국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렛을 얼마나 많이 받느냐에 따라 인기의 척도가 결정되기도 한단다. 그리고는 남자가 사탕을 준다는 화이트데이를 따라 솔로가 짜장면을 먹는다는 블랙데이 로즈데이등등 무슨무슨 조잡한 찌질데이들이 속속히 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지. ...
말이 길어졌는데 내게도 사실 풋풋한 발렌타인 데이의 추억이 있다.
때는 뇌가 주먹만하고 개념이 하늘로 승천하여 제발 가만히만 있는게 제일의 효도라는 소리를 듣던 초딩시절, 발렌타인 데이를 다음날로 앞두고 남자 세명이 모여 초콜렛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렛을 주던 기존의 문화는 우리에게 신당동 떡볶이와 현대 미술의 관계만큼이나 상관이 없었다.
초콜렛에 이상한 것들을 넣어서 여자애들을 골려주자!!라는 영악한 취지에서 시작했지만 사실 그렇게 말하는 척 하면서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 모두 네게 줄 작정이었다. 용택이(가명)와 승주(가명)와 나는 용택이의 집에 모여 여자아이들에게 줄 초콜렛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는 스타크래프트가 나온지 얼마 안되었고 인터넷이 지금처럼 잘 발달되있지도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래도 제법 발달되있던것 같다.
근데 우리 셋은 인터넷똘추라 인터넷에 발렌타인데이 초콜렛을 어떻게 만드나 검색해볼 생각도 못했다. 그냥 어디서 줏어들은 쓸데없는 지식들을 가지고 무대뽀로 초콜렛을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어떻게 만드는지 정말 몰랏다. 우리는 대략 냄비에 물을 조금 붓고 대략 키세x 초콜렛과 가x초콜렛을 잘게 부숴서 대략 집어넣은 다음에 대략 끓였다. 그런데 얼만큼 끓여야하는지 몰라서 일단 시간을 두고 찬찬히 지켜보기엔 용택이네 집에 있는 건담이 너무 멋있고 신기해서 건담을 가지고 놀았다.
시간이 좀 지난후에 냄비를 보니 이게 차원의 틈이 열려 황천에서 갓 삐져나온 하급 미니언인지 육망성에 닭피를 뿌리고 소환된 최하급 마수인지 짜장면 먹고 남은 춘장을 누룽지랑 비벼놓은 건지 정체를 알 수가 없는 뭔가가 완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소환해낸 크리처의 맛을 볼 엄두가 안났으나 제물로 바쳐친 키세x 초콜렛과 가x초콜렛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조금씩 먹어봤다.
그건 지금 생각해 보면 요리나 조리보다는 중세시대에 시작되었다는 연금술의 연장이었다. 우리는 납을 금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위와 대장을 사용하지 않고 멀쩡한 음식을 어엿한 똥으로 만들어놓는 20세기의 기적을 행했다. 그건 속마음을 고백하는 용도가 아니라(아마 니 속마음이 이따위냐는 소리를 듣고 뺨을 맞을거다) 상추밭의 거름으로나 알맞을 것 같은 비쥬얼과 맛이었다. 초콜렛도 탄 맛이 강하게 날 수 있다는것을 그때 알았다. 입에서 녹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이건 뭔가 지구상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맛이었다. 플라스틱을 먹어본적은 없지만 플라스틱 비슷한 맛도 났던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그 세세한 맛을 기억하는 것은 정말 맛이 충격적으로 없었기 때문이다. 쓰레기통으로 장렬하게 투척.
이런 걸로 여자애들을 골릴 수는 없다고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먹을 수 있게는 만들어야지) 생각한 우리는 제대로 만들어보자고 하며 남은 초콜렛으로 조리를 시작했다, 아니 연금술을 추진했다.
태우지 말자고 하면서 잘 골려볼 생각으로 우유, 초콜렛 그리고 소금과 후추를 좀 넣었으며 집에 남아있던 별사탕같은것도 집어넣었다. 연금술이 끝나고 굳은 초콜렛을 먹어봤는데 맛이 생각외로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굳은 초콜렛을 어떻게 포장해야 할지 몰라서 대강 작게 깨뜨린 다음에 아까 깟던 키세x 은박지로 초콜렛 파편들을 감쌌다. 그리고 이젠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고 건담들을 마저 감상했다. 용택이에게 내일 초콜렛을 학교로 가져와 달라고 하고 승주와 나는 집에 갔다.
그리고 다음 날 초콜렛의 교류가 별로 없었다. 우리 반에서는 유행이 아니었던것같다. 마침 용택이는 그날 초콜렛을 가져오지 않았다. 까먹었다고 그랬다. 가져오는걸 까먹었다는 건지 다 까서 먹었다는 건지는 지금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같이 나라잃은 안창호의 표정을 지으며 독립운동(두근두근 발렌타인대작전)이 실패했다는 것에 슬퍼했다.하여간 우리는 대인배의 마음으로 쿨하게 잊기로 하고 여자애들이랑 교실에 쭈그러 앉아 공기놀이나 하기로 했다. 그날 초콜렛을 받기는 했냐고? 받았으면 애초에 이 이야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초콜렛을 받기는 개뿔 잘 하지도 못하는 공기놀이 하다 승질만 드러워져서 상대편여자애가 손등꺾기하는거 깐죽거리면서 방해하다가 성발렌타인 기념 죽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