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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 천권 읽은 아재
게시물ID : readers_253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옛살비
추천 : 3
조회수 : 624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6/06/04 07:42:18
전역 직후에 잠깐 자동차 부품 공장에 다녔었는데

 전 원래 잡담같은거 잘 안하는데요, 싫어한다기보단 걍 딱히 할말도 없고 용건도 없는데 굳이 말걸 필요성도 못느끼겠고 그냥 혼자 딴생각 하는 편입니다.
솔직히 '누구랑 같은 공간에 말없이 조용히 있는게 어색하다'라는 정서 자체가 제입장에서는 이해가 안가요. 그런데 제 맞은편에 선 아재는 그렇지 않았던거 같아요. 계속 뭔가 말을 걸어왔어요. 대부분은 별로 흥미 없는 주제라 네 혹은 아니오 하면서 흘려넘겼는데 자기만 말한다고 말좀 하라고 쿠사리먹기도 했어요. 할 말이 없는데.

 그러다가 한번은 자기가 잭에서 봤는데 어쩌구 하면서 책얘기를 좀 하더라구요. 책얘기는 좀 관심이 갔어요. 그래서 물었죠.
"책 좋아하세요?"
 그랬더니 자기가 책을 무척 많이 읽었대요. 아마 천권은 읽었을거라고. 어린시절 방탕하게 아무 목적없이 살다가 책으로 개과천선하고 책 끼고 살다시피 하며 오늘 출근하기 전에도 책 몇권 주문하고 왔다 하고요.
 그런 류의 무용담은 저도 어디가서 빠지는 편은 아니었어요.
 저희 어머니는 본인이 독서를 즐기진 않으시지만 자식들이 독서를 하는덴 한없이 관대한 분이었거든요. 빚에 쫓겨 도망나온 상황에서도, 설령 그것이 만화나 장르문학같은 패관기서에 속하는 것일지라도 책이라면 무조건 OK! 다른건 안사줘도 제가 예스24 장바구니에 한 50만원치 담아놓고 책사달라고 하면 다이렉트로 카드 받아서 결제하고 그랬어요. 군대가기 전만 해도 책장이 부족해서 방 여기저기 쌓아놓고 침대 위에도 반은 책이 차지하고 있어서 전 책들 사이로 쪼그려서 자고 그랬었어요 ㅋㅋㅋ; 

 사담이 길었는데 암튼 그래서 저도 얘기했어요.
 학교다닐 때 공부 안하고 책만 봤는데 고등학교 3년동안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이 2000권이 좀 넘어서 다독왕 3등인가 했었다~ 군대에서도 진중문고 다 보고 상병쯤부터 전역할 때 까지 사다본 책이 다하면 백만원이 좀 넘는데 관물대 꽉꽉 채우고도 모자라서 사무실 비품함에 꽁쳐놔야 했었다~ 는 둥 하는 얘기들요 ㅋ

 그게 실수였죠. 그때부터 그 아재는 뭔가 저랑 '심도 깊은' 얘기를 하고싶어했어요. 지성을 뽐내고 싶었나봐요.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내 생각은 이러저러 하다~ 우리 책 2000권 읽은 친구의 의견은 어떤고? 하는 식이었죠. 근데 그게 제 입장에서는 굉장히 쓸데없거나 관심이 1g도 없는 주제였기 때문에 그냥 모르겠네요 혹은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답했어요. 그랬더니 그 아재는 굉장히 화를 냈어요.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면 지금 생각해 보라는 거였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죠. 아무 생각 없다고 밖엔 답할 수 없었어요. 아무리 생각한다 해도 관심이 없는 주제에 대해 관심이 생길 리는 없으니까요. 얼마나 쓸데없는 주제였냐면 그렇게 몇달을 시달리고 쿠사리 먹었는데도 무슨 얘기였는지 기억이 안나요. 그냥 쓰잘데 없는 얘기였던거 같아요.

 또 가끔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ㅋㅋㅋㅋㅋ 사람은 어찌 살아야 하는가? 같은 주제도 물어봤어요. 책 2000권 읽은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답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같아요. 별 생각 없는데요? 그런것보단 당장 오늘이 와요일인지, 스팀 할인품목이 무엇인지 따위가 훨씬 더 생산적인 탐구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차원적인 사유의 소산물을 공유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런게 전공인 철학자들을 찾아가는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조언을 드렸죠. 아재는 화를 무척 냈어요.

 책 종류로도 갈등이 있었어요. 아재가 배송지를 회사로 해서 책을 받아보길래 슬쩍 보니까 자기계발서 류의 책이었는데 암튼 그게 인생에 굉장히 도움이 되고 유익한 책이다~ 하시면서 저한텐 어떤걸 주로 읽느냐고 했어요. 말씀을 종합해보니 그 아재는 only 자기계발서 위주의 독서를 하고 계신거 같았어요. 근데 저는 아무거나 다 읽거든요. 특히 소설을 좋아해요. 장르구분 없이. 자기계발서도 물론 읽어본 적이 있죠. 한창 시크릿이나 마시멜로같은것들이 유행할 때 하도 추천도서에 많이 올라오길래 몇권 사서 읽어 본 적은 있어요. 
1. 뚜렷한 목표를 잡고
2. 그 목표를 위해 노오력을 해라
이 두 줄을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 상상력과 어휘를 발휘해서 얼마나 많은 미담과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지 흥미롭긴 하지만 아무튼 제 취향의 부류는 아니었어요. 아재는 무척 성을 냈어요.

 소설찌끄래기는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되는 쓰래기라구요 ㅠㅠ
 도움이 안되는데 왜 보는지 이해가 안된다면서 무척 역정을 냈어요.
 그냥 보고싶어서 보는건데 굳이 도움이 되야 하는건지 이해가 안갔어요. 그리고 콕 찝어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살면서 도움이 된 적이 종종 있기도 해서요 ㅠㅠ

 그때부터 제가 뭐 실수라도 하나 하면 책을 2천권이나 본 놈이 이런것도 하나 못한다며 쿠사리 먹이고
 제가 쉬는시간에 폰으로 소설이라도 하나 보고 있노라면
 "이기 뭐꼬? 소설이가!? 이딴걸 왜 보는지 이해를 못하겠네 ㄷㄷ 도움이 되는걸 봐야지!"
 하면서 한마디씩 하고 지나갔어요. 나중엔 절 때리고싶다고 하긴 했는데 때리기까진 안했어요. 시늉까진 갔었죠.

 그렇게 잘나고 지성이 넘치는 아재가 왜 마흔 넘게 노총각에 공장 일용직을 전전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차마 물어보진 못했어요.
 여기저기 제 험담도 많이 하시고 저같은놈이랑 일 못하겠다고 버럭버럭 소리도 지르고 다니셔서 저는 그곳을 못다니게 되었어요.

 지금도 그 아재가 가끔 생각나요.  제가 짧다면 짧은 삶을 살면서 본 좀...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분들 중에 한 분이라서 ㅋㅋ
 어떻게 지내시는지도 궁금하구요.
 하긴, 생각없이 사는 저도 그 때보다 몇 배는 더 벌고 차도 밴츠 몰고 다니는데
 인생에 도움되는 책을 천권이나 읽으신 분이니 더 잘 살고 계시겠죠 ㅎ
출처 ex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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