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라케의 '공주님께-' 시리즈의 네번째 장편입니다. 앞 세편을 안 읽으셔도 내용 이해에는 하등 지장이 없습니다.
전편 포탈 : 링크
1편 : 공주님께 알려드립니다. 우린 영웅은 아닙니다.
2편 : 공주님께 고합니다. 솔직히 그건 아니죠.
3편 : 공주님께 술 한잔 올립니다.
4편 : 공주님께 들려드리니 옛날이야기 좋아하시는지.
시간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4편 (몇십년 후) 1편.3편 (십몇년 후) 2편
공주님께 들려드리니 옛날이야기 좋아하시는지
2화
전쟁의 희망찬 아침이 밝았습니다.
밤새워 전장을 지킨 분대장들은 힘이 빠졌습니다. 밤에 꽁무니를 빼는 사병들을 참수하느라 어깨가 뻐근했거든요. 임신한 누나를 대신하여 나온 남동생이었던 시라도라는 놈은 어찌나 질질 짜던지 잘 자던 다른 병사들까지 깨우는 참사마저 일어났었습니다. 그 누나가 옛날 옛적에 적군에게 강간당한 뒤 효시되어 장난감 대용으로 다뤄졌다는 것을 알면 자신이 전쟁에 끌려나온 부당함을 저주마냥 늘어놓던 시라도에게 약간의 위안이 되어주었을까요. 분대장들은 알 게 뭐냐라는 식으로 목을 잘랐을 뿐이었습니다.
아, 과자같은걸 판다는 포니도 있었습니다. 가게이름은 슈가큐브... 뭐라던가요. 자기가 돌봐야 할 아이가 둘이고 아내까지 있다는 소리를 줄줄 늘어놓는 통에 분대장들은 상당히 진이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탈영하다가 발이 잘린걸 분대장들이 책임져 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몇몇 분대장들이, 물론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냐, 라고 조용하게 주장을 해보았지만 간단하게 논파당했습니다. 저런 놈들이 살아 있어봐야, 전쟁에는 하등 쓸모가 없다는 것이지요.
하여튼 그렇고 그런 포니들이 5명 정도 참수 당한 날의 아침은 역시 유쾌하다고 하기엔 힘든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위트있게 농담을 터뜨릴 어린 포니들은 이미 페가수스들의 창칼에 갈려 죽어버려 농담도 기대할 수 없었어요. 모두가 묵묵히 아침을 먹고 병기들을 쥐었습니다. 몇몇은 담소를 나누기도 했어요.
아내가 몇 살이냐. 이 도둑놈 새끼. 아이가 귀엽네. 따님은 어떠신가요. 남편분이 참 자상하신가 봐요. 돌아가서 무엇을 가장 먼저 하고 싶으신가요. 그러고 보니 우리 씻은지 얼마나 됐지? 전쟁에서 깨끗하게 다니는 놈이 어디 있다고. 그러고 보니 벌써 1년이 됐네요. 오, 그러냐 신병? 축하파티 해야지! 하하,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이봐, 자네 아버지는 어때. 건강하다고 하시는 군요. 매월 편지가 오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이봐, 여기 신병이 1년 째라는군!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그럴 수야 없죠! 이봐, 술 가져와! 미친놈들아, 개전 직전에 무슨 술이야. 같이 마시자. 크하하하!
“공습이다!”
병정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어요.
여름날의 먹구름 마냥 페가수스들이 페가소폴리스 진영쪽에서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스파란은 효녀였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성 차별이 쉽게 이루어지는 페가수스 사회에서 여성이었던 그녀는 굳이 종군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비는 나가야만 했고,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이스파란은 대신 자신이 종군을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 덕에 꿈속에서 뒤틀린 내장을 보는 것이 다반사가 되어버렸지만 그녀는 그 아비가 그 꼴을 안 봐도 된다는 사실에 흡족해 했어요. 물론 고향의 아비는 이미 눈먼 병신이 되어 딸을 찾아 헤매고 있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이스파란 옆의 신실라는 참 건실한 청년이었습니다. 화가가 되어 구름으로 지어진 페가소폴리스의 집에 벽화를 그리는 것이 그의 몇 안되는 꿈이었죠. 거기서 아리따운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아이도 낳아 자신이 그린 집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꿈은 그가 사랑한 하리안이 어스포니들에 의해 사지가 찢긴 이후 어스포니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되어버렸지요. 그는 자신이 들고가는 기름이 부디 어스포니들을 지옥에서 태울 도구가 되길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꿈은 어느정도 이루어졌어요.
땅에서부터 치솟은 버드나무는 그의 심장을 단숨에 뚫어버렸지요. 분명 지옥으로 갔을 이스파란은 기름으로 어스포니들의 몸을 불사 지를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라의 동료들은 죽어가는 동료의 몸에 기름을 뿌리는 일을 어렵게 여기진 않았습니다. 그러며 곧바로 위로 날아올랐어요. 어찌되었든 그들의 역할은 숨겨진 어스포니들의 나무들을 일일이 찾아내 태워버리는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어스포니와 유니콘이 그렇게 하는 것을 마냥 바라만 보진 않았습니다.
그들을 향해 빛의 은하수가 그려졌습니다. 밤하늘의 은하수와는 달리, 그 은하수는 범람하고 침범하는 은하수였지만. 유니콘들 멋대로 하늘에 수놓아진 빛의 은하수는 페가수스로 이루어진 검은 먹구름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차갑고도, 조용한, 포식의 순간이었습니다. 빛의 은하수에 검은 먹구름은 순식간에 와해되어 비가 되어 내렸고, 유니콘들은 탈진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럴 순 없었어요. 이번엔 먹구름이 아닌 폭풍이 몰아닥치기 시작했거든요.
원더볼츠는 쉽게 말하자면 페가소폴리스 진영 최고의 비밀무기입니다. 이를 발명해 낸 것은 대장군 본인이었지만 본인조차도 시범을 보일 때 빼고는 어지간하면 위험하기에 쓰지 않는 극도로 위험한 무기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페가수스 진영은 최강의 전술 이점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날씨를 조절하고 태풍을 마음대로 불러낸다는 게 전쟁에서 얼마나 거대한 영향을 미칠진 안봐도 뻔한 노릇이었지요. 하지만 어느새 유니코니아 진영은 그런 페가수스들의 압도적인 전력을 차츰차츰 무너뜨려갔습니다.
누가 유니콘들이 구름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하지만 유니콘들은 구름을 없애버렸고 페가수스들이 일으키는 태풍을 어떻게 하면 손쉽게 없애버릴 수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페가소폴리스로선 그야말로 끔찍한 상황. 도리어 페가수스들이 궁지에 몰렸었고, 허리케인 대장군은 고민했습니다. 자신들의 전술상 이점이 전부 쉽게 파해된다는 사실을 페가소폴리스의 최고 지휘권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그리고, 모두가 이것이 마지막 전투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스라바크 언덕 공방전에서 허리케인 대장군은 멋지게 소닉 레인 붐을 성공시켜 유니콘 - 어스포니 연합군을 패주시키고 그 옛날의 페가소폴리스의 위명을 되찾아냈었습니다.
그리고 허리케인 대장군은 연이어 그 ‘소닉 레인 붐’을 전술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새로운 특무부대를 신설하기로 마음 먹었고, 그런 소산에서 나온 것이 ‘원더볼츠’, 현제 페가소폴리스 진영의 가장 각광받는 부대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끝을 보리라고 마음먹은 그는 원더볼츠 전병을 이번 전장에 투입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그는 탁월한 군사 지휘관이었고 한 번에 주력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자살행위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인지는 잘 알고 있었지요.
허리케인 대장군은 잠시 구름 아래를 내다보았습니다. 불타는 어스포니들의 나무들과, 그에 매달려 타오르는 페가수스들, 범람하는 낮의 은하수와 추락하는 골육으로 이루어진 비. 대장군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1군, 진격.”
“1군 진격하라!”
진격을 뜻하는 깃발이 흔들렸고, 페가수스들은 바람같이 뛰쳐나갔습니다.
페가소폴리스는 키를 돌렸습니다. 뱃머리의 방향은 죽음. 약속된 수많은 학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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