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BGM/단편] 죽음예찬
게시물ID : readers_254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방울성게
추천 : 1
조회수 : 40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6/11 18:56:28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wNX0S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새벽이었다. 그렇게 시작하는 문장을 욕한 적이 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까. 설마. 그랬더라도 내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죽었고, 새벽이었다.


 
죽는 게 살아있는 것보다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은, 죽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가 죽은 다음 가장 많이 한 것은 남을 훔쳐보는 일이었다. 나는 살아있는 하나의 카메라 렌즈가 되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처음에는 반발심이었다. 그러다 차츰 호기심으로, 이어서 연민으로 바뀌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넘칠만큼 많은 고통이 있다. 소리죽여 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많았고 그 시도에도 벌벌 떠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아주 평온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연민에서 시작한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죽은 이후의 세계는 평범하고 건조했다. 사실이 그랬다. 나는 이 세계의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없었고, 사후세계나 저승사자 같은 것들도 없었다. 무한하게 펼쳐진 자유에서 고립된 기분이었다. 해방감은 박탈감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었다. 나는 자유로웠고, 아무런 제약도 없었지만, 그 끝을 알 수도 없었다. 영원한 지평선 위의 작은 점이었다. 두려움을 느꼈다. 영원히 소멸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거기에서 도망가려고 나는 더 필사적으로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주로 여자를 관찰했다. 처음에는 전능한 신이 된 기분이었다. 매일마다 여자를 바꿔가며 관찰했다. 사생활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씻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 여자들은 집에서는 더러 자위를 하기도 했다. 남자친구를 만나 섹스를 하기도 했다. 그것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것은 굉장히 고양되고 흥분되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그건 순간에서 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망함이 들이닥치고, 그건 다시 괴로움으로 바뀌고, 결국에는 비통이랄 것까지 옮아가서 마음을 쑤셔댔다. 전능하지만 개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뭘까. 그 무렵에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은 그 문장이었다. 나는 뭘까. 나는 거울에도 비치지 않았다. 완전히 투명한 존재였다. 나는 왜 살아있지도 않고, 이렇게 죽어서 이승을 떠도는 것일까. 사후세계라는 것은 생전의 세계와도 비슷했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다. 겪어봐야지만 알 수 있다. 오히려 생전의 세계가 더 친절했다. 지나가다 저기요, 하고 사람들을 불러세우면 묻는 말에 대답은 해줬으니까.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퇴마라도 당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소란을 일으켜야 하나. 그렇다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게 가장 빠르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지껏 보아왔던 여자들보다 매력적이라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나와도 비슷했다. 물론 그런 건 사설에 지나지 않는다. 딱히 그 여자를 선택한 이유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이유였다. 그냥. 그게 전부였다. 심심한 애도를 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여자에게 공포를 줄 방법을 생각했다. 우선은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여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주변 관계가 전혀. 여자가 하루에 하는 말은 한 마디가 채 안 됐다.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기도 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자는 그 생활로 증명했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조차도 여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점원이 알아서 해결했다. 오천 원입니다, 사천 육백 원 받았습니다, 거스름 돈 사백 원입니다, 또 오세요, 어서오세요 GS25입니다, 그 대화에서 여자가 개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자가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런 것보다는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어느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여자의 삶은 내 삶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집에서는 컴퓨터만 두들기고, 밖에 나가는 것은 학교에 있을 때가 전부였고, 되돌아오면 다시 같은 생활의 반복이다. 여자는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인관계를 위한 활동은 전무했다.


문제인 것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여자는 이 생활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추측이긴 하다. 여자는 한 번도 슬픈 표정을 짓지 않았다. 우울하다는 표시를 하지도 않았다. SNS에서 다른 사람들을 염탐하긴 했지만, 그건 누구나 하는 일이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여자를 보면서 현대인의 자화상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결국에는 인생은 혼자인 걸까. 그리고 며칠간 그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내가 괴롭히지 않아도 충분히 괴로운 삶을 살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을 물색하려 다녔다. 이왕이면 부자로 하는 편이, 퇴마를 당하든 제를 지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다시 여자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보살펴줄 수는 없었지만 지켜볼 수는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여자를 본격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하는 순간에는 문밖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여자가 어떤 양말을 신는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인터넷으로는 어떤 것들을 검색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여자가 검색한 것은 조건만남이었다.


이봐요


나는 그런 말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있잖아요, 그런 말도 했다. 제가 안 보여요, 그야 안 보이시겠죠, 예,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나는 여자를 말리고 싶었다. 아무 관계도 아니고, 아무 사이도 아닌 여자에게, 쓸데없이 이입해서 감정을 소모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미 죽은 마당에 그런 게 무슨 소용이랴 싶었다. 그럴 수도 있잖아, 죽어서 유령이 되었는데 신경이 쓰이는 여자가 있더라고, 염라대왕을 만나면 그렇게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열심히 살아봐야죠. 안 그래요?


여자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성인인증을 하고 회원가입을 했다. 나는 여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직 살 날도 많이 남았잖아요, 돈이 그렇게 필요한 것도 아니고. 대출이라도 받아보는 게 어때요, 누구나 빚은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여자는 나체를 찍었다. 가슴과 음부가 드러난 사진이었다. 나는 더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처럼 죽은 게 아니라면 기회는 있어요.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하는 게 아니고 그냥 힘내라는 말은 아무런 쓸모도 없지만요, 괜한 오지랖인 것도 맞는데요, 제가 말한다고 해서 들리겠냐마는, 근데 하여간 이건 좀 아니잖아요? 저랑 나이도 비슷하신데.


여자는 사진을 업로드했다.
알바라도 해요. 제가 알아봐드릴테니까.


누군가 여자를 채팅에 초대했다.
올해 시급이 얼마였죠? 여기 괜찮은 자리인 것 같은데.


상대: 얼마부터?
아니다, 알바든 뭐든 안 하면 어때요. 그냥 있을 수도 있죠.


여자는 10만원에 자기를 팔았다.
잠깐만요, 제 말 좀 들어봐요, 물론 어이가 없겠지만


남자와 여자는 약속을 잡았다. 두 시간 후였다.
제가 이러는 게 정신나간 놈 같겠죠. 실제로도 그렇고, 제가 과하게 몰입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맞아요. 근데 아시잖아요, 감정이란 게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 아니면 제가 사실은 사고를 당해서 혼수상태에 빠져있고 유체이탈을 해서 이렇게 당신을 보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네요.


여자는 속옷을 입기 시작했다.
제발요. 이렇게 소리쳐도 안 들려요? 안 들리겠죠. 전 죽었으니까.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제가 뭐라도 건져올게요. 누가 흘린 돈을 주워오든지, 돈이 될 만한 일이라던지, 그러니까 좀 천천히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당신과 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만 꽤 오랫동안 지켜봤단 말이에요. 누가 보면 뭘 며칠 봤다고 스토커처럼 그러냐고 할 수도 있겠는데요, 제가 꼭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은 못 하겠는데 어쨌든요.


여자는 옷을 차려입고 문을 나섰다. 약속한 장소까지 가는 동안에도 표정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나는 장전된 총알을 다 써버린 총구처럼 열을 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귀신인 주제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여자를 만질 수 없었고, 핸드폰이나 펜을 이용해서 메세지를 전달할 수도 없었다.


대체 나는 뭘까.


나는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가 만난 것은 특징 없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회사원의 자화상쯤 되겠다 싶었다. 남자는 익숙한 것처럼 여자를 에스코트했다. 모텔에 따라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나는 소리쳤다. 이 정신나간 년아, 제대로 된 연애는 해봐야 할 것 아냐! 나는 번쩍이는 모텔의 간판을 보면서 바락바락 소시를 질렀다. 그런 다음 체념하고 모텔로 따라 들어갔다. 수많은 신음소리를 지나 여자가 있는 방에 도착했다.


여자는 알몸으로 누워있었고, 남자는 옷을 입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다음에 또 하실래요? 정중한 물음이었다. 여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피를 닦는 모습은 행복해보이지도, 불행해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여자에게 휴지를 가져다주고 싶었다. 여자의 눈물을 대신 닦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다음 유서를 남겼다. 여자는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몇 글자를 쓰고는 종이를 찢어 구겨버렸다. 나는 여자가 쓴 글자를 보았다. 나도


그게 전부였다. 나도. 행복하고 싶었다는 말이 따라붙을 수 있을까. 여자가 쓰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터벅터벅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내 마음은 반대로 가라앉았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죽으면 나는 또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나서겠죠. 누군가는 저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이건 그냥 제 일방적인 집착이고요.


여자는 마침내 옥상에 도착했다. 마지막 순간에 여자는 손거울을 꺼냈다. 여자는 손거울을 노려봤다. 마치 생전의 마지막 순간에, 자기의 얼굴을 기억이라고 하려는 듯이. 나는 여자를 따라 무심코 거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손거울에 비친 것은 내 모습이었다. 여자의 모습이기도 했다. 여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뭐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미 너무 늦었잖아. 여자가 도약할 준비를 했다. 저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여자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봐요


저는 당신이에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는데, 제가 당신이라고요. 죽는 거요, 그거 별 거 없어요, 저처럼 이승을 떠돌게 된다고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죽은 이후의 세계가 어떤지, 그러니까


여자가 뛰어내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새벽이었다. 그렇게 시작하는 문장을 욕한 적이 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까. 설마. 그랬더라도 내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죽었고, 새벽이었다.
출처 왜 이렇게 길게 썼지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