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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이버트 "올드보이"리뷰 번역
게시물ID : movie_25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위대한영화
추천 : 10
조회수 : 172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1/03/22 10:44:42
 * 읽기전에 : 로저이버트는 진 시스켈과 함께 tv에서도 자주 얼굴을 비추었던 미국의 유명 영화 평론가입니다. 책도 많이 냈고, 이 사람의 트레이드 마크인 two thumbs up!은 이미 영화쪽에선 고유명사. 한국영화도 적잖이 리뷰하셨고 이에 대한 번역자료가 있기에 퍼옵니다. 원출처는 로저이버트 본인의 홈페이지(영문)이고, 번역출처는 dvdprime의 FARGO님이 번역하신 자료입니다. 

Oldboy 
평점 : ★★★★ (검은별 네개. 즉, 만점)

경찰서 안, 한 남자가 술이 잔뜩 취해서 수갑을 차고 앉아있다. 그의 친구가 경찰서로 찾아와 그를 데리고 나간다. 친구가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를 거는 동안, 남자는 어두컴컴한 도시의 길 한가운데서 사라져 버린다. 그는 허름한 호텔에서 깨어난다. 침대, 책상, TV, 화장실. 방문은 철로 되어 있으며 아래쪽에 음식을 넣을 수 있는 칸막이가 있다. 가끔씩 어디선가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방 안이 가스로 가득 차면 남자는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방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옷이 갈아입혀져 있으며 두발정리까지 되어 있다. 

이러한 생활이 15년간 이어진다. 누가 자신을 가뒀는지도 모르고, 왜 가뒀는지도 모른다. 그는 TV가 그의 모든 것이 될 때 까지 TV를 본다. 일지를 쓰고 또 쓴다. 주먹이 피범벅이 되고 굳은살이 박일 때까지 주먹으로 벽을 친다. 소리를 지른다. 아내가 살해당한 현장에서 자신의 피와 지문이 나왔다는 것을 TV를 통해 알게 된다. 그의 딸은 스웨덴으로 입양된다.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그는 지명수배자가 될 것이다. 

한국 감독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주인공의 비참한 상황을 동정심을 거둬내고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인 관점에서 관찰한다. 오대수를 가두었던 남자는 말한다. “난 일종의 학자죠. 전공은 당신이고. 오대수학 학자.”

이런 종류의 성, 폭력 묘사를 담고 있는 영화는 미국에서는 더 이상 쉽게 만들 수 없다. 청교도적인 엄격한 기준들이 케이블 방송까지 위협하고 있으며, 스튜디오들은 배급망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영화의 제작을 꺼려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물들이 영화의 좋고 나쁨을 구분 짓지는 않는다. 문제는 영화의 내용이 아니다. “올드보이”를 이처럼 강력한 영화로 만드는 것은 영화가 어떤 장면을 묘사하느냐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벗겨내는 인간 내면의 모습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될 때 오대수(최민식)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술에 취한 채 경찰서에 붙잡혀 딸아이의 생일잔치에도 못가고 있으며, 딸애의 생일선물인 천사의 날개를 우스꽝스럽게 달고 앉아있는 불쌍한 남자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알콜이 그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놨다. 

15년간의 감금 끝에 갑자기 자유를 얻었을 때, 그는 오로지 복수만을 원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식당을 돌아다니던 그는 TV에서 올해의 요리사 상을 받는 것을 본 적 있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미도(강혜정). 그녀는 오대수를 보자마자 그가 고통을 겪었음을 알게 되고 본능적인 동정심을 느낀다. 그녀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를 돌봐주다가 결국 사랑에 빠진다. 그 와중에 오대수는 자신의 감금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체계적인 조사활동에 들어간다. 그는 감금시절에 같은 만두를 매일 먹고 또 먹어서 맛이 뇌에 각인되었고, 그 만두를 공급한 식당을 찾아 돌아다닌다. 만두가 그를 가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열쇠이다. 

영화는 초반부부터 미스테리 영화에서 정통 비극으로 전환된다. 필자가 오대수가 겪게 될 수많은 사건들을 누설하지는 않겠지만, 영화의 반전들이 단순히 줄거리를 꼬는 장치들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정신, 육체적인 고통의 소용돌이와 정의에 대한 시적 감흥을 관객에게 전달한다는 것만 말해 두겠다. 영화의 명장면 중 오대수가 자신을 가뒀던 간수들과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그의 분노가 너무나 커서 등 뒤에 꽂힌 칼도 그를 막지 못한다. 오대수는 복수심에 잠식되어버린 남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가둔 사람 역시 절실한 상태에 있으며 훨씬 더 극악무도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필자는 평론가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영화를 만드는 곳 중 하나로 간주되는(“올드보이”는 200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한국 영화들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가 본 한국 영화중 가학, 피학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 않은 영화는 “YMCA야구단” 뿐이었다. “올드보이”에 나오는 이빨을 잡아 뽑는 장면은 “마라톤 맨”에 나치 치과의사로 나오는 로렌스 올리비에를 그냥 보통 의사로 보이게 할 정도이다. 또한 이 영화에는 제작 과정에서 낙지가 상처를 입었을 것이 확실한 장면이 등장한다. 

이런 장면들은 그냥 쇼크효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오대수는 15년간 다른 인간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일일 것이다. 그가 식당에서 “살아있는 것이 먹고 싶다고 했다.”고 했을 때, 우리는 1. 아시아에서는 살아있는 해산물을 요리로 먹는다는 것과 2. 오대수가 15년간 죽음과 같은 상태로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음식이 아니라 생명력을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젊고 예쁘고 능력 있는 여자인 미도가 이 비참한 남자를 그녀의 인생에 끌어들일까? 그가 너무나 명백하게 무능력한 상태에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녀가 오대수의 이야기를 심지어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수도 없는 상태라는 것까지 전부 믿어서 그럴 수도 있다. 혹은 오대수가 한때 나약한 존재였으나 15년의 감금생활 끝에 미도가 보기에 강하고 선한 남자로 변화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오대수에게 사랑이란 구원, 수용, 용서 그리고 구제로의 가능성이다. 

이 모든 일들이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사건 전개를 통해 이루어진다. 영화의 엔딩이 그 복잡성으로 인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며, 영화 내에서 충분히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 “올드보이”는 이성적으로 인간 감정의 극단을 탐구하는 영화이다. 요즘 관객은 기계적이고 기분전환 용도로만 존재하는 스릴러들에 너무 익숙해져서, 잔혹한 액션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서술적으로 사용되는 이런 영화를 보면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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