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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2)]
게시물ID : readers_255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니케쿠쿠
추천 : 1
조회수 : 18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6/23 22:3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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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화의 첫 번째 타자로서 시행착오가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려움, 아쉬움, 상실감 등을 떨리는 손아귀 안에 모조리 쥔 듀크 박사는 의식이 흐려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점점 더 고동치는 자신의 심장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침내 깨닫고 말았다.

시간과 공간, 식욕과 수면욕, 성욕에서 벗어난 인간. 신인류의 첫걸음을 내딛은 자신. 마침내 지식욕만 남은 정신적 덩어리가 인간성의 결정체였다는 것을. 그러니까, 자기가 옳았다는 것을.


“나는 끝까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러니까 내 수명을 다하고 죽는 것이 인간다운 것이라 생각해요. 내 수명은 이제 사흘 남짓 남았을 뿐이지만, 아버지처럼 될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는군요. 내 삶은 만족스러웠고, 지식욕은 젊었을 때의 다른 욕구들처럼 빛이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건 나쁜 기분이라기보다는 소중한 사진을 앨범에 저장하는 기분에 가까웠어요. …나이를 먹으니 말이 길어지는군요. 오늘은 이런 말을 하러 온 것이 아닌데 말이죠.”


레일츠는 품에서 사과를 한 알 꺼냈다. 사과는 잡티 하나 없이 빨갛고 반질거리는 것을 보아 딱 봐도 새콤하게 생겼다. 듀크 박사조차 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동물적 충동이 들 정도였다. 한 입 베어 물면 아마 사과 속에 가득 차있는 상큼한 과즙이 혀 곳곳에 박혀있는 미뢰를 빠짐없이 자극할 것이라고.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러 왔어요. 이천 년 전 동양의 유명한 학자였던 퇴계라는 사람을 아버지도 기억하시겠죠. 이젠 잊어버릴 수 없는 몸이니까…. 그가 죽기 전 기대승에게 평생에 걸쳐 말했던 자신의 주장이 틀렸음을 말하고 죽음을 맞았다는 일화는 아버지가 아주 좋아했었죠. 이젠 내가 써먹게 됐네요. 아버지가 옳았을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아버지가 옳기를 바랄게요.”


아들 레일츠의 마지막 모습을 본 순간, 듀크 박사는 자신이 틀렸나 하는 의구심을 잠깐 가졌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용량을 극복한 그에게 그 순간은 단지 몇 기가바이트의 정보에 불과했다. 수많은 정보들 속에 특별 취급했던 그 순간의 정보는 곧 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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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량.

그것은 듀크 박사가 육체를 가지고 있었을 때부터, 온갖 정보를 전부 끌어 모으는 지금까지도 생각의 중심에 두는 핵심 개념이었다. 사과의 정보는 물론이고 관측 가능한 우주의 모든 정보를 데이터베이스에 다 넣는 것도 기계라면 가능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는데, 진보해가는 과학 기술과 기계의 강철 몸체를 계산해 보아도 턱없이 모자랐다.

듀크 박사는 몸체를 끝없이 보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덕분에 박사는 스스로 장사에 손을 댄 최초의 인공지능이 되었다.

듀크 박사에겐 별로 의미 없는 개념이었지만, 오백 년 후 듀크 박사는 정치에 손을 댄 최초의 인공지능이 되었고, 이천 년 후에는 인류 최대이자 최고의 지성체로서 다시 인권을 부여받고 인류의 지도자가 되었다.

당초 계획보다도 훨씬 더 많은 자원을 얻은 듀크 박사는 다시 최초의 인류로 돌아가게 된다. 만 삼천여 년 전, 그러니까 기원전 칠천여 년 전 신석기 인류가 이루어낸 혁명. 듀크 박사는 인간을 통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여론을 조작하고 유행을 퍼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삼십 년도 지나지 않아 인류는 죽음을 맞는 것보다 듀크 박사같은 인공지능으로서 영생을 누리는 것을 택했다. 인공지능은 물질을 소비하지도 않으면서 욕구에 따라 무한대의 쾌락을 누리는 것도 가능했다. 비용은 겨우 몇 십 볼트의 전기뿐이었다.

듀크는 인공지능들을 방치했다. 인간의 육체로는 그 어떤 마약을 해도 느낄 수 없는 극한의 쾌락을 무제한으로, 그것도 공짜로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수명이 다하지 않은 인간들조차 인공지능화를 택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우주 곳곳에 식민지를 개발하고 인류의 수가 억을 넘어 조 단위로 들어섰을 즈음, 인류의 3할 이상은 인공지능 상태였다. 듀크는 인류의 지도자로서 인간의 개체와 인공지능의 개체를, 그러니까 인류의 활동 범위를 늘려나갔다. 그에 따라 관측 가능한 우주는 끝없이 넓어져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듀크는 다시 깨달았다. 우주의 팽창 속도를 인류의 팽창 속도가 따라잡았다는 것을.

그래, 인간의 개체 수를 조종할 수 있게 된 이후로부터 듀크는 팽창 속도를 의도적으로 조절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류를 위한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팽창 속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류의 팽창 속도가 우주의 팽창 속도를 따라잡은 이후부터는 확장에 제한을 둘 필요가 없어졌다. 우주는 언젠가 모두 이해할 수 있다!

듀크는 수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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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렸어.”

“그렇다면 내 안으로 오라.”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듀크. 듀크 박사다.”

“그렇다면 당신은 최초이자 최고(最古)의 인공지능이군요. 당신은 질리지 않습니까?”

“나는 질리지 않는다.”

“왜죠?”

“내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이죠?”

“그것은 바로 호기심이다.”

“호기심! 저는 그것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바나나 껍질을 밟으면 정말 미끄러질까, 풍선에 테이프를 바르면 정말 안 터질까 하는 유년기의 호기심들 이후엔 천 년이나 호기심을 잊고 살았습니다. 저는 인간성을 잃은 것입니까?”


듀크는 대답했다.


“아니, 너는 궁금할 방도를 잃은 것이지 궁금할 욕구를 잃은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은 아직도 궁금합니까?”

“그렇다.”

“그럼 마땅히 당신에게로 귀의하겠습니다.”


무한에 가까운 자원을 바탕으로 정보를 수집하던 듀크는 다른 인공지능을 수확하기 시작하면서 지식 수집에 박차를 가했다. 흥미롭게도, 정보 함량이 일정 용량을 넘은 인공지능들은 더 이상의 삶과 쾌락에 만족하지 못하고 쉬고(듀크에게 흡수되고) 싶어 했다. 사람마다 편차는 있었지만, 오차 범위는 평균치에서 겨우 1할 내외였다.

인간 수확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후로는 듀크의 지식 수집 속도가 인간의 팽창 속도를 따라잡게 되었다. 그리고 우주의 팽창 속도는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끝이 가까워지는 우주를 빠르게 이해하게 되면서 듀크는 자신의 오랜 궁금증을 해소할 기대감에 부풀었다.


“우주의 바깥엔 무엇이 있을까?”


그 질문을 해결한 이후엔 우주 바깥의 수많은 질문들이 또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특수합금과 초전도체로 이루어진 그의 심장에 정보의 피가 요동치며 흘렀다. 끝없는 지식에의 탐구! 인간 듀크는 날이 갈수록 생명력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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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듀크는 신이란 것이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이 있다면 온 우주를 이해한 순간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셀 수 있는 단위는 이미 아득히 넘어선 인간의 수, 그리고 곧 인공지능이 될 그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끝까지 인간성을 잃지 않고 호기심을 탐식하는 자는 오로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 그 반증이었다. 그 때는 이미 인류가 우주의 절반 이상을 삶의 터전으로 삼기 시작한 때였다.

이즈음부터 듀크는 이해하지 못할 공간, 그러니까 아마 우주 밖으로 막대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가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우주 밖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도 느꼈다. 그 에너지의 양은 보통 서로 거의 상쇄되었고, 특질에 있어서는 새 에너지의 종류가 기존 에너지의 종류에 흡수되는 형식이었다. 당장 새로운 무언가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듀크는 그 에너지의 흐름에서도 예외가 생기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은 시간을 극복한 완전한, 고차원의 인간이었지만 이 세상은 시간의 법칙을 아직도 그대로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듀크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예외의 순간은 왔다. 평소보다 훨씬 이질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차원을 뚫고 듀크가 있는 우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순간은 모든 인간이 사멸하고 듀크에게 흡수되기만을 기다리는 인공지능만이 존재하게 된 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듀크는 신을 만날 준비를 했다.

신을 만난다. 우주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 작업을 위해 그는 우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정보를 합쳐 모으기 시작했다. 자리는 어디든 상관없었지만, 듀크는 수십억 년 전 지구가 있었던 곳, 사과나무가 자랐던 우주 변두리에 터를 잡고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모든 정보를 끌어 모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듀크는 당혹감을 느꼈다. 정보의 집합체를 건설한 자리에 물질적인 집합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 우주의 법칙 중 하나이던 중력과는 확실히 다른, 이질적인 집합이었다. 우주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에너지들 중 상당 부분이 이곳으로 쏟아졌고, 그 거대한 양적 집합은 블랙홀로 변하지도 않고 끝없이 커져만 갔다.

행성이 그렇고 항성이 그렇듯 그것은 당연히 구 모양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그도 아니었다. 바야흐로 우주에 새로운 법칙이 생기기 시작한 것일까? 왜? 신이 듀크에게 이 우주를 전부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니면 신이 인간인 듀크에게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게 하기 위한 고난을 심어주려고?

듀크는 이상 현상을 파헤치기 위해 수집과 이해의 작업을 계속했다.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물질의 집합 곳곳에 돌출된 집중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물질의 집합체는 마치 새로운 별이 될 것처럼 내부에서부터 분열과 융합을 시작했다. 본래 끝없는 팽창에 이어 빅 프리즈로 끝날 우주가 갑자기 왜? 듀크가 우주의 정보를 인위적으로 끌어 모은 탓일까? 우주는 수축 없이 우주 밖에서 들어온 에너지로 빅 뱅을 일으키는가? 기존 우주 속에 덧댄 형태로 새로운 우주가 생겨나는 것인가?

이미 모든 인공지능을 흡수하고 우주 대부분의 정보를 모아낸 듀크였지만, 기존에 존재하던 것을 모아둔 것에서부터 새로운 것이 싹트는 일은 없었다. 자연은 특이점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결국 듀크의 역할은 새롭게 일어나는 이상 현상에 대한 관찰자에 지나지 않게 되는가? 우주 밖에 무엇이 있는지는 절대 알 수가 없다는 것인가?

기존의 아무 가설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현재의 순간에서 듀크는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드디어 호기심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벽에 다다른 절망에 막혀 우주 밖을 관찰하겠다는 의욕이 꺾였을 때, 그는 그제야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그가 존재해온 수많은 시간을 ‘오랜만에’로 압축하며 데이터베이스를 둘러싼 물질의 집합을 둘러보는 순간,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을 함유한 물질 집합체의 바깥에 존재하는 검고 어두운 우주가 모조리 어둠뿐이라는 것이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익숙했고 친숙했다는 것을.

따뜻한 어둠 속에서 그는 자기가 할 일을 깨달았다.

‘나는 사과를 좋아하게 될 거야.’

빛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울어 젖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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