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의 가장 중대한 두 가지는 탄생과 죽음이다. 탄생은 신비요, 죽음은 경외(敬畏)다. 죽음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곧, 종교적인 인식세계다. 그래서 인간의 장례의식은 항상 종교의식과 상통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덤은 바로 종교행사의 자리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랜 시기의 무덤은 구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구석기시대의 인류는 신석기시대의 인류와는 달리 주로 동굴 생활을 영위하였는데, 동굴 가족의 일원이 죽으면 동굴 안 집자리[주거지]의 방바닥을 파고 흙을 덮은 뒤 돌을 주워 모아 주검을 덮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주검의 주위에 붉은 흙[후에는 주사(朱砂)]을 뿌리기도 했다.1)이와 같은 행위는 곧, 영생(永生)을 바라는 산 자의 기도다.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땅을 파서 매장한 다음 흙으로 덮는 흙무덤을 사용하였으나 신석기시대 중기에 이르면 인간의 주검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돌을 둘러쌓아 축조하였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고대 민족인 동이족(東夷族)에게는 돌을 사용하여 인간의 주검을 보호하는 풍습이 생겼다. 이것은 신앙의 상징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동이족’이라 함은 중국 정사인 『삼국지』·『후한서』 등에 보이는 명칭으로, 중국 측에서 보면 동방민족을 지칭하는 것이며, 항상 중국민족과 대치되고 있었다. 동이족은 발해연안에 널리 퍼져 살았는데, 주로 산동반도를 비롯하여 만주 지방과 한반도의 고대 민족을 일컬었다.
동이족들은 시신을 매장할 때 다른 민족과 달리 돌을 가지고 축조했는데, 이것이 돌무덤[석묘(石墓)]이다. 돌무덤 중에는 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塚)],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 고인돌무덤[지석묘(支石墓)] 등이 있다.2)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무덤 형식의 하나가 바로 돌널무덤[석관묘]이다. 돌널무덤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땅을 파고 지하에 판자와 같은 널찍한 돌[판석(板石)]을 마치 상자 모양으로 널[관]을 짠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깬 돌[할석(割石)]이나 냇돌[강석(姜石)]로 네 벽을 쌓고 뚜껑을 덮은 무덤이다.
이와 같은 돌무덤은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남쪽으로는 일본의 구주(九州) 지방과 유구(琉球) 열도에까지 분포되고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멀리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돌널무덤이 발견되어, 지금까지 한반도의 돌널무덤의 기원을 청동기시대에 시베리아로부터 내려왔다고 보기도 하였다.3)
그래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에서 전래되었다고 믿었던 것처럼 한반도의 돌널무덤도 북방에서 전래되었다는 ‘북방전래설[서방전래설이라고도 함]’이 주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는 저자로 하여금 재래의 기존 학설에 대하여 다시 생각케 하고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발견되고 있는 돌널무덤과 그 구조와 축조 방식이 동일한 무덤양식이 발해연안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이들 돌널무덤의 축조 시기의 가장 이른 시기가 신석기시대 중기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83~85년에 중국 요녕성 건평현(建平縣) 우하량(牛河梁) 홍산문화 시기의 적석총 유적에서 돌널무덤이 발견됨으로써 비롯되었다.4) 홍산문화는 발해연안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문화유형의 하나로 그 연대는 기원전 4000~3000년경에 해당한다.
이곳은 만리장성 동쪽의 연산(燕山) 산맥으로부터 흘러나와 발해만 북쪽 요하 하구에 유입되는 대릉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대릉하는 발해연안 고대 문화 내지 동방문명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는 강이다. 또한 대릉하 유역은 고대 한국문화는 물론 고조선 시대의 역사 전개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 대릉하 상류 우하량의 밭 가운데 6개 지점에서 돌무지무덤떼[적석총군]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한 지점에서 발굴된 돌무지무덤 안에서 모두 15기의 돌널무덤[석관묘]이 발견되었다.
이들 돌널무덤은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짠 상자 모양의 돌널과 깬 돌을 쌓아 올린 돌널이 함께 배치되어 이루어졌는데, 안에서는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채색토기·옥기 등 전형적인 홍산문화 유형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우하량 유적의 구릉상에서는 당시의 제사 유적(祭祀遺蹟)과 신전(神殿) 및 소조(塑彫) 신상(神像)이 발견되었는데, 문화 내용이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내용과 일치했다. 또한 제사 유적의 방사성 측정연대가 기원전 3500년으로 나오고 있어 홍산문화 연대와 완전 부합된다.
대릉하 유역의 돌무지무덤과 돌널무덤의 축조 방식은 청동기시대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중국 하북성 당산(唐山), 서요하 지류 노합하(老哈河) 유역, 만주 지방에서는 요동반도·송화강·두만강 유역 그리고 한반도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5)
한반도 안에서는 압록강 유역의 평안북도 강계 일원, 대동강 유역의 평안남도 강서·북창 일대, 재령강 유역의 황해도 봉산·인산·서흥·사리원 일대, 한강 유역의 양평, 강원도 춘천시, 충청남도 아산·예산·대전·부여, 충청북도 단양, 경상남도 김해·진주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특히 서해안의 경기도 시도(矢島)와 남해안의 부산 영도 동삼동(東三洞)에서 돌무지무덤이 발견되었다. 시도 돌무지무덤의 방사성 측정 연대가 기원전 1500~1000년경으로 나오고 있어 매우 주목된다.6) 이 연대는 한반도 안에서 발견된 돌무덤 계통의 무덤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이는 기원전 700년경에 시베리아로부터 몽골·만주 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퍼져 내려왔다고 하는 종래의 학설보다 훨씬 앞서는 시기이다. 뿐만 아니라 다량의 돌널무덤이 발견된 대릉하 유역 우하량 유적의 방사성 측정 연대가 기원전 3500년경으로 나오는 데 반해 시베리아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돌무덤의 연대는 기원전 2500~1200년경으로 추정된다. 대릉하 유역 우하량 돌무지무덤의 축조 연대는 시베리아 알타이지방의 페시체르킨로크(Peshcherkin Log)Ⅰ 돌무지무덤보다 무려 1500년 내지 1000년이나 빠르다. 바이칼호 연안에 있는 ‘석판묘(石板墓)’가 기원전 13~6세기인 것보다는 무려 2000년 이상이나 앞선다. 대릉하 유역은 지리적으로도 시베리아보다 가깝다. 그러므로 돌널무덤의 기원을 발해연안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귀중한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장례를 주관하는 성소가 높은 산상이나 사막(沙漠)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연해(沿海) 지구나 강안(江岸) 지역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바로 고대 인류의 생활 터전이 물과 밀접한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인류가 남긴 문화의 유산이 산악이나 사막, 한랭하고 추운 지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동방문명의 중심은 따뜻한 발해연안이지 동토 지대인 시베리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돌무덤의 시원과 홍산문화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새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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