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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기쁨
게시물ID : baby_255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봄봄달
추천 : 14
조회수 : 1978회
댓글수 : 37개
등록시간 : 2024/01/18 23:55:39
첫째가 말이 늦다. 

24개월 됐을 때까지 할 줄 아는 말은 엄마, 아빠, 물 세 단어였다. 

낯가림이 있고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아이였다. 


하반신 마취만 하고 제왕절개로 낳았는데
분명 아이가 내 배에서 빠져나가는 걸 둔하게나마 느꼈는데 
아이가 울지 않았었다. 

우는 데까지 1분은 걸린 것 같은데
의료진들에게 그 무성이 어떤 의미였는지 모르겠지만
의료진들조차 모든 행위가 정지된 것처럼 수술실 안이 차갑고 고요했다. 

울음소리가 들릴 때까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빛이 없고 따스한 양수 안에서 놀다가 
어느 날 누군가의 힘에 의해 밀리고 끄집어져 나온 아이로서는
갑작스러운 빛과 추위와 소란스러움에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이윽고 울음이 터졌을 때 얼마나 감사했던지. 

아이는 엄마인 나에게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다. 
배고플 때가 아니면 잘 울지 않았다. 

쉬를 해도 응가를 해도 울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 거실에 데리고 나와 바운서에 앉히면 
가만히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백일이 넘고 백이십일이 넘어도 나를 보고 웃지도 않았다. 
눈을 잘 마주치는 느낌도 아니었다. 

감정표현이 무척 적었다. 신나 하거나 춤을 추거나 그런 일도 적었다. 

갖고 노는 장난감은 브이텍에서 나온 멜로디 볼 뿐인데
그걸 한번 음악을 틀면  6개월짜리가 30분 동안 진득히 앉아 멜로디 볼이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걸 지켜보았다. 

다른 장난감은 암만 사줘도 그다지 갖고 놀지 않았다. 

그랬던 아이니 말이 늦어지는 게 걱정이 안될 수가 없었다. 
매일매일 언어발달지연이나  말문 트이게 하는 방법 등을 찾았다. 

엄마가 말을 많이 하고 소통을 많이 해야 아이가 말문을 트인다는데
사실 내가 사람들과 소통을 즐겨하고 잘하는 편이 아니다. 
아이는 내가 말을 할 때 내 얼굴이나 입을 봐야 하는데 나를 잘 쳐다보지 않았다. 
포기가 빠른 나는 늘 기운이 빠졌다. 

첫째 낳고 10개월도 안돼서 둘째를 가졌다. 
늦은 나이에 욕심을 부린 건지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의 임신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해도 몸이 힘들고 내 자신이 한심하고 눈물이 나서 아이와 많이 못 놀아줬다. 
화내지 않고 무표정하게, 아이에게 해줘야 할 것을 해주는 게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 

아이가 말이 늦은 건 분명히 나 때문이었다. 

24개월이 되자 마자 언어발달 검사를 했다. 
표현 언어 수준은 하위 3%였다. 

표현언어가 안되니 이해언어 점수도 낮고 그에 따라 인지 점수와 사회성 점수가 다 낮았다. 


대학 병원에서는 자폐검사도 권했다. 
30점부터가 자폐의 기준선인데 26점이 나왔다. 

매주 1회씩 대학병원에서 인지치료를 받고, 자리가 나는 대로 언어치료도 받았다. 
교수님이 추천해서 구에서 운영하는 발달지연 조기참여 프로그램도 신청해서 2주에 한번씩 가정 방문 코치를 받았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꽤 여러 번 권했던 동네에 있는 발달센터도 자리가 나는 대로 주에 1-2회씩 갔다. 나중에 언어발달 지연 바우처 대상이라는 걸 알아서 다행이 부담이 줄었다. 

대학병원, 발달센터를 각각 매주 1회씩 많으면 2회씩 갔고
가정방문을 받으니 코칭을 해주시는 선생님이 사회성 발달을 위해 또래 아이와의 접촉, 새로운 환경에의 노출을 권해서 구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도 갔다. 
둘째를 너무 방치하는 것 같아서 둘째도 따로 문화센터에 데려 갔다.

선생님들이 내주시는 숙제도 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아마도 보통의 엄마들은 아이가 더 어릴 때부터 했을 노력이겠지만. 

분명 살림과 육아만 하는 사람인데 백수가 과로사 한다고 뭔가 매일 바쁘고 정신이 없었다. 매일매일 겨우겨우 땜빵을 하는 기분으로 살았다. 


그렇게 1년을 다니니 요즘 첫째가 말을 한다. 

길 가다가 소화기를 보거나 가로등을 보면

 - 이게 무야?  라고 묻는다. 그럼 나는 아이가 알아듣든 못 알아 듣든 설명을 해준다.  

내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으면 지루한지 또 다른 걸 가리키며 

- 이게 무야? 

라고 또 묻는다. 이게 무야 라고 묻는 것 자체가 재밌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아이가 이게 무야라고 묻는 게 좋다. 


요전에는 넷이서 가족여행을 다녀왔는데 그게 좋았던지 하루에도 몇 번씩 거기에 가고 싶다고 한다. 

- 함무이랑 하부지랑 아빠랑 엄마랑 00(동생)이랑 ㅁㅁ(본인)이랑 XX에 가자. 아빠 차 타고 가자. 

하루에 스무 번쯤 저렇게 말하는데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아서

- XX에 가서 엄마도 너무 좋았어. 우리 또 가자. 누구누구랑 가지?

하고 되묻는다.  그러면 아이는 신나서

- 함무이랑 하부지랑 아빠랑 엄마랑 00랑 ㅁㅁ랑 가자. 

라고 한다. 

- 그럼 몇 명이서 가는 거지? 

- 다섯 명! 

아이는 다섯과 열 밖에 모른다. 

- 봐봐.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엄마, 00, ㅁㅁ이 여섯 명인데? 

- 아니야. 다섯 명이야. 

손가락을 하나하나 세면서 보여줘도 다섯명이란다. 

- 다섯 명이면 한 명 빠져야 해. 누구 빼고 갈까? 

- 00(동생)

- 00 빼고 가? 애기인데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섭지 않을까? 

- 00도 같이 가자~ 

이런 대화의 끝에서는 아이가 히히히 웃으면서 

재밌다, 라고 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행위가, 
나와 대화 하는 것 자체가 재밌나 보다. 
나도 그렇다. 




아직은 27개월 수준의 표현이라고 한다. 아이가 37개월이니까 아직도 10개월 정도 느리다. 

그래도 나는 이 정도로 성장한  것이 얼마나 대견하고 감사한지 모른다. 

나는 정말 소통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아이와 대화하는 게 재미있다. 
아이의 생각과 감정을 내가 알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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