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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 좋아하는 아이 (2/2)
게시물ID : humorbest_2563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탄밥
추천 : 105
조회수 : 4066회
댓글수 : 11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9/12/20 19:36:05
원본글 작성시간 : 2009/12/20 08:37:49
학교에서 선배를 만났을 때 콜라를 받았다. 지난번 일로 내가 콜라를 좋아하는줄 착각하면서 나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정식으로 고백을 받았다. 이렇게 될거라고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상황이 되자 여러 가지 비겁한 계산을 하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남자친구는 가난했고 선배는 풍요로웠다. 가난은 불편할 뿐이지 불행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말 그대로 가난하면 불편한건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다. 보통 여자가 집있고 차있는 남자를 선호한다고 하지만 그건 호의호식하고 싶어하는 허영이 아니라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원하는 모든이의 기본욕구라고 생각한다. 그 부담을 모두 남자 등에만 지우려고 하는 누군가의 심보는 문제라 하겠지만. 어쨌든 선배는 날 얼마나 가슴깊이 생각하고 있는지를 설명했고 우리가 누릴 비젼에 대해 늘어놓았다. 나는 모든걸 동의하고 싶었다.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잔 말 꺼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슬픔을 겪을 새도 없이 난 새로운 행복에 빠져 있을 것 같았다. 괴로워할 그가 걱정되지만 친구로 지내면서 소개팅을 시켜주면 괜찮을꺼라 생각했다. 그리고 콜라를 주면... 이런 경우에도 그는 콜라를 받고 기뻐할까... 가방에는 선배가 줬던 콜라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남자친구를 만나러 집으로 찾아갔다. 요즘 그는 취업공부로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다가 밤늦게야 돌아왔다. 전화로 얘기할 때 오늘은 늦었으니까 낮에 보자고 했지만 내가 고집을 부렸다. 10분씩 늦던 버릇은 예전에 고쳐졌고 그날은 약속시간 5분전에 도착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연인답지 않은 인사를 건낸 다음 평소때처럼 팔짱을 끼고 걸었다. 야경이 멋지게 보이는 언덕위의 체육공원에는 밤에도 운동하러 온 주민들이 여럿 있었다. 머리카락이 그의 눈을 찌를 정도로 많이 길었다. 불편해서 책이 보이냐고 물으니까 옆으로 넘기면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하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 ‘나 오빠한테 엄청 미안하게 될지도 몰라.’ 잠시 침묵이 흐르는동안 나는 가방에서 선배에게 받았던 콜라를 꺼내 그에게 줬다. 그는 콜라를 보고서도 웃지 않았다. ‘어떤 사람인데?’ 그가 물었다. 어떻게 이런 질문이 바로 나올 수 있는걸까.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선배에 관한걸 묻자 귓가에 징이 울리는 것 같았다. ‘우리집에 찾아왔었어?’ ‘...응.’ 처음에 집 근처까지만 데려다 주었던 선배차는 어느덧 대문 앞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차에서 내릴때마다 조마조마 했었는데 역시나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 찾아왔었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더 이상 얘기할게 없었다. 미안한건 난데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머리카락 속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나 요즘 공부하느라 바빠. 너한테 계속 신경 못써줘서 미안해.’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공원 비탈길을 내려갔고 난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집이 아니라 심야버스 정류소로 가고 있었다. 버스가 올때까지 같이 기다렸다가 버스가 도착하자 내곁으로 와서 말했다. ‘집에 가면 도착했다고 문자해.’ ‘ 내일 미용실가서 머리 깎아.’

이제 다 정리한 셈이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선배와 연인사이가 되었다. 단 일주일동안만. 일주일? 그래, 선배랑은 딱 그만큼만 사귀고 헤어졌다. 이상하게도 선배랑 사귀는동안 심장이 쾅쾅 뛰었다. ‘설래여서 그래?’ 내 자신에게 물어보았더니 ‘아니. 미안해서 그래.’ 라고 대답했다. 그날 체육공원 이후로 나는 죄없는 사람을 죽이기라도 한것처럼 죄책감을 느꼈다. 사람까진 아니더라도 귀여운 새끼고양이를 내손으로 눌러 죽인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을 떨쳐내질 못했다. 이별이란건 남들에게도 흔한일 아니었나? 남들도 나같은 혼란을 겪었을텐데 나만 유달리 과민할 이유는 없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봤을 때 유달리 과민한게 맞았고 그만큼 서로에게 적응되어 있었다. 선배에겐 미안하지만 같이 지내던 내내 그의 걱정을 했다. 즐거워야 할 일들이 즐겁지 않았고 차 안 시트가 가시방석이었다.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냐고 나에게 물었을 때 그런거 없다고 대답했는데 선배는 내가 하루종일 입술을 깨물고 있다고 했다. 내가 알기론 상처는 실연당한 사람이 겪는건데 나는 실연을 줬다는 이 사실이 평생 상처로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선배와의 관계를 급하게 정리했다. 미안한건 선배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우린 아직 깊은 사이가 아니잖아. 미안한 정도가 그와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내가 다시 돌아간다고 하면 흔쾌히 받아줄까? 어느 노래가사처럼 나는 그를 'hollaback boy' 쯤으로 여긴 셈이라 생각하기에 따라 굉장히 불쾌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 사이 다른 여자친구라도 생겼다면...

그의 학교 도서관을 찾아가 일주일만에 연락을 했다. 도서관에 있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약속하듯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수염까지 길어서 초췌한 모습이 평소답지 않았다. 나는 인사대신 왜 머리 안잘랐냐고 따지듯이 물었고 그는 왜 찾아왔냐고 되물었다. 우리는 소나무가 많은 벤치에 앉았다. ‘내가 왜 왔을꺼라 생각해?’ ‘글세, 목걸이 돌려주려고?’ ‘아니야...’ 나는 말 꺼내기 힘들었지만 내가 어떤 심정인지 조금씩 설명해 주었다. 말을 하다가 말고, 하다가 흐리고, 말 못배운 아기처럼 어벅버벅했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는 말만 수십번 했던 것 같고 마침내 울음이 나서 말을 잇지 못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근처 벤치사람에게까지 들려도 창피하지 않았다. 그는 날 보듬어주었고 나는 그의 옷에 눈물을 닦았다. 자기도 일주일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괴로워 했다면서 오늘 처음 도서관에 왔다고 했다. 남들처럼 실연주(酒)를 먹으려 했다가 못난놈이 입에 넣을 음식이 어디있냐며 5일을 굶고 어제부터 바나나 하나씩을 먹었다고 했다. ‘오늘 내가 안왔더라면 오빠 고생한거 아무도 몰라줬겠네? 오빤 친구도 없잖아.’ ‘니가 알아줬으면 하는게 하나 더 있는데...’ ‘그게 뭐야?’ ‘음... 콜라에 관한 비밀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콜라만 먹으면 헤발짝 웃는게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콜라를 딱히 좋아하는게 아니라고 말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마는 정도지 굳이 챙겨먹지는 않는다고. 그리고 내가 잘못한 일이 있을때마다 마음에서 저울을 꺼낸다고 했다. 실험실에서 쓰는 평행저울을 말이다. 한쪽엔 내가 앉아있고 다른 한쪽엔 나 때문에 일어나는 나쁜 감정을 올린다고 했다. 고질적인 지각버릇이 나와의 관계를 해칠만큼 분노를 일으키는가. 아니다. 내가 자기에게 화내고 짜증냈던게 나와의 관계를 해쳐도 될만큼 내가 싫었는가. 그것도 아니다. 내가 선물도 없고 편지도 덜렁덜렁 주고 딴남자를 만났던 것이 나와의 관계를 해칠만큼 미웠는가. 밉기는 해도 우리 관계를 지키는게 우선이라고 했다. 모든걸 용서해서라도 날 지키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속좋은 팔푼이인 마냥 ‘내가 이해할게’, ‘내가 다 참을게.’ 이럴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과의 표시는 분명히 하되 미안함을 달고사는 내가 기죽을까봐 콜라라는 도구를 썼을 뿐이라고 했다. 어쩔땐 자기도 싫은데 억지로 먹는다면서 어떻게든 가장 쉬운 방법으로 나와 화해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사이에서 참는것과 이해하는 것은 일방적인 그의 몫이었다. 나는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끼린 미안하다 하는게 아니래.’ ‘그건 얼굴만 봐도 미안한줄 알기 때문에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속으로도 미안해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야. 미안한 짓도 자꾸 하면 습관된다. 너.처.럼.’ 내가 어설프게 인용했던 말이 꽝 하고 무너졌다. 그는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 내가 사랑을 배워야할 사람이었다.

나는 졸업을 하고 직장을 구했다. 이곳에서 만나는 결혼한 언니들을 보면 남자에 대한 주관이 거의 똑같다. 갈아탈 수만 있으면 얼른 갈아타라는것도 그중 하나다. 한 언니는 순정을 바치던 전 애인과 헤어져 아파트를 가진 남자와 결혼했고 그 덕에 남들보다 10년 앞서간다며 노골적으로 자랑했다. 여자의 자부심이 되는 공간이라고 광고하던 그 아파트다. 나도 잠깐이나마 남자등에 업혀서 살 생각을 했던 사람으로서 욕할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부러운건 어쩔 수 없었다. 어찌나 얄밉게 얘기하던지 우리나라는 왜 아직까지 지진다발지대에 들어서지 못하고 안전한 땅위에서 살아야 하는지 불만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집은 집일 뿐이다. 재산은 있으면 좋은거고 없으면 노력하면 되는거다. 가난을 만족으로 여기는 초현실주의자는 절대 아니다. 그래서 우린 둘다 직장을 다니고 있지 않은가. 자위라고 할수도 있지만 나보다 중요한건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을 진심으로 보여준 그 사람이 있어서 내가 훨씬 더 행복하다. 지금은 치웠지만 그의 집에는 콜라캔이 300개가 넘게 쌓였었다. 그만큼 내가 저지른 잘못은 쉽사리 넘어갔다. 그가 날 용서해줬듯이 나도 그의 모든걸 용서하고 사랑을 지켜가는 아내가 되어 ‘평생’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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