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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화폐이야기 3. 백동화
게시물ID : history_256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궁장전
추천 : 6
조회수 : 154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3/14 19:28:41



DSC07105.jpg

(2전 5푼 백동화) -상태가 좋은 편입니다.


2편에서 언급한 신식화폐조례에서 보조화폐로 언급된 백동화는 이후 화폐정리사업 으로 역사에서 퇴출될 때까지

구한말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법적 측면에서 백동화의 남발의 원인은 화폐제도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규정한 신식화폐발행장정( 2편 참조)에 있지만, 역시 주된 원인은 당오전의 경우처럼 재정이 궁핍함에

따라 값 비싼 은으로 발행해야 하는 본위화폐의 발행보다는 보조화폐의 발행을 통해서 주조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중앙정부의 얄팍한 셈속이었다. 이런 백동화의 남발은 당백, 당오전이 불러왔던 참극인 격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다. 그러나 사적주조를 허용하고 지방의 주조를 감시하지 못하던 당오전과는 다르게 백동화의 참극에는

한국 정부의 책임 뿐 아니라 사적주조와 한국인과 외국인, 주로 일본인, 에 의한 위조 백동화의 대량 밀수입 등도

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개항이후 일본을 위시한 외세의 자본주의적 상품-화폐경제 침투에

전혀 대응하지 못한 것이 저변에 깔려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다양한 이유로 화폐의 명목가치와 실제가치가

크게 괴리된 백동화가 대량으로 발행됨에 따라 당오전의 비극이 다시 시작되었다.

 

 

백동화 발행은 전화국 기준으로 1898년에는 348000, 1899년에는 128만원

1904년에는 약 350만원에 이르는 등 남발되었다.


백동화는 갑오개혁을 주도한 세력들이 발표한 1894년의 신식화폐발행장정에 명시되어 주조되기 시작하였으나

재정이 부족하고, 시설이 미비한 등 여러 이유로 제대로 발행되지 못하고 소량 주조 후에 곧 발행이 중지되었다.

그런데 1898년 이후, 갑오개혁을 주도한 세력들이 몰락하고 황제권이 강화된 이후부터, 백동화가 대량으로 발행되기

시작했다. 근본적으로 이시기 백동화의 발행은 화폐개혁이라기보다는 앞에서 언급했다싶이 보조화폐를 발행하여

재정궁핍을 해결하고자 함이었다. 대한제국의 성립으로부터 시작된 재정의 팽창은 재정의 조달원천이 매우 한정된

가운데 한국정부가 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책이었다. 또한 국가재정의 확충 뿐 아니라 칭제건원 이후

황제권의 강화와 황실재정의 확충을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동화의 남발 원인을 간단히나마 살펴보기 위해서는 한국정부의 재정상태를 가볍게나마 볼 필요성이 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890년대 후반에는 위기의식의 고조로 군비확장, 1900년대 초반에는 황제권 강화 때문에

상당한 규모의 재정팽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재원조달이었다. 외국과의 상품경쟁에서 열세였고

일본과 같이 구리나 생사를 팔아 재원을 조달하기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조선의 수출품은 홍삼, 우피, 미곡, 두류 정도로 국한되었고 이는 수입품의 대금을 지불하기에도 충분치 않았으며

그나마 홍삼수출은 황실에서 독점하여 황실재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지세를 인상하거나 차관도입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지세는 지방의 반발과 호적 및 지적제도의

미비로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고 차관 도입 또한 한국정부의 여의치 않은 재정 탓에 상환에 대한 불안, 한국정부의

외교정책이 친러로 급격히 기울고 있었기 때문에 영-미를 비롯한 열강이 한국정부에 우호적인지 않았던 점들이

겹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시기의 특이한점이라 한다면 대한제국 시기 프랑스를 통한 차관도입을 추진했는데, 이시기 프랑스는 삼국간섭을

통한 요동반환을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가 철도부설권이나 광산채굴권 같은 이익을 보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불만스러워했지만 한국으로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고 발언할만큼 한국으로의 팽창 의지를 표명하였다.

프랑스의 이런 의도하에서 차관도입이 시도되었지만 이를 자국에 대한 배제로 받아들인 영국이 인천에 군함을

내항시키고 미국, 러시아, 일본 또한 한국에서의 세력균형을 깰 수 있는 제 3세력인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프랑스를 통한 차관도입을 포기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재정을 절용하는 선택보다는 주조이익이 거대한 보조화폐, 백동화,를 발행하여 재원을 조달하려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1898년 초기에는 탁지부고문으로 와 있던 영국인 브라운(J.M Brown)이 정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백동화 발행을 억제하여 비교적 남발이 저지되었으나,

브라운이 프랑스를 통한 차관도입 과정 속에서 해임되고 브라운의 후림으로 탁지부 고문으로 온

러시아인 알렉시예프(Karl Alexeieff)는 백동화 발행을 통제하지 않음으로써 본격적으로 남발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정부는 아마도 당오전에서 교훈을 얻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재정궁핍에 눈앞에 닥쳐오자 궁여지책으로

남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시기 재정궁핍은 탁지부의 재정표 만으로는 정확히 관찰하는 것이 매우 힘든편인데, 대한제국의 재정기관이 크게

잡아도 3개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재정부인 탁지부를 제외하고도 황실해관(海關)

독자적인 재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황실재정은 정확한 자료를 구할 수 없으나 각종 부세권을 탁지부에서

내장원으로 이속시키고 전환국을 군주가 장악하여 발행이익을 주로 내장원이 독식한점, 홍삼수출 등 주요 산업을

군주 소유로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규모가 컸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해관은 사실상 한국정부가 통제할 수 없었던

기관으로 탁지부 고문이 겸하던 한국 총세무사가 해관의 자체 경비를 제한 후 잉여금을 탁지부로 납입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해관세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더욱이 한국정부는 대한제국 선포 이전인 1895년에

이미 해관세를 담보로 하여 일본 제일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 이후부터

사실상 해관세 부문은 부분적으로나마 일본에 종속되어 있었다. 부분적이었던 이유는 러시아-일본간의

대결이외에도 영국의 간섭도 영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제대로 운용했다면 재정에 큰 보탬이 됬을수도 있는

해관세는 한국 재정과 완전히 유리되어 있었다.

 

한편 황실은 은광과 홍삼수출 독점 이외에도 역둔토 등 다양한 관전을 내장원으로 이속시켰고

각종 잡세 징수권을 획득하였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환국을 장악하여 백동화 주조이익을

황실로 귀속시켰다. 이런 움직임으로 탁지부 예산은 줄어들었고 각종 잡세 징수로 한국 하층민의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었다. 여기에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은 잡세 징수 뿐 아니라 백동화 남발로 말미암은

인플레이션의 고통도 가장 직격으로 맞아야 했기 때문에 생활상이 더욱 곤궁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어쨌든 발행되기 시작한 백동화는 유통에 상당한 애로사항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한국 상업에 큰 영향을 끼치던 일본 상인과 일본 거류민들이 무역거래에 있어서

백동화를 포함한 보조화폐를 받지 않기로 하거나 경상도에서 백동화와 적동화가 거래에 이용되지 않는다는

기록이 보이는 등 백동화의 유통은 1898년까지는 경인지방에 국한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시기 백동화보다 가치가 있다고 믿어진 상평통보가 주로 유통되었으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법칙이 작용하여

상평통보가 유통되지 않고 비축되기 시작하면서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백동화는 충청도와 황해도 일대, 평안도, 강원도에 이르는 지역까지 백동화가 유통되었다.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등은 끝까지 백동화가 유통되지 않은 지역인데, 이들 지역에서는 상평통보가

화폐정리사업시기 까지 주로 유통됩니다. 다만 전북 일대는 1900년대 초기 백동화가 유통되는 지역이

늘어나기는 합니다. 이를 통해 이익을 얻은 대표적인 집단이 이시기 지방관인데, 지방관들은 가치가 높은

상평통보로 조세를 걷고 가치가 낮은 백동화를 중앙으로 보냄으로써 그 차익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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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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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멕시코 은화

 

이런 상황속에서 화페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되는 한국화폐보다 일본의 화폐나

은화로 된 멕시코 달러가 한국내에서 자유롭게 유통됨에 따라 외국화폐가 본위화폐로서 기능하고 한국의 화폐들이

보조화폐로 기능하는 일이 백동화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된다.


현대에도 짐바브웨 같은 나라도 이런식으로 굴러가기는 합니다.


애초에 명목가치에 비해 소재가치가 크게 괴리된 화폐였던 백동화는 상평통보와의 경쟁에서도

일본화페 같은 외국화폐와의 경쟁에서도 밀림에 따라서 유통지역이 한정되어 있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통용가치가 떨어지는 불량화폐였다. 한국정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세를 백동화로 바치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으나 소재가치의 열등함과 유통지역의 비좁음은 극복가능한 것이 아니었으며 1900년이 넘어서는

사적주조, 밀수입 등이 성행함에 따라 그 가치가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지속적으로 하락추세를 이어가던

백동화는 1902년에 잠시 안정추세를 보이는데 이것은 한국정부의 조치로 인한 것이 아니라

1902년에 각국공사들이 회담의 결과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의 주도로 한국정부의 백동화 남발이 저지되고

밀수입에 대한 통제가 강화된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시 안정되었던 백동화의 가치가 19033/4분기부터

다시 급격히 하락하게 되는데 이는


1. 청국상인이 한국화폐를 방출하고 일본화폐를 모으기 시작한 것

2. 한국정부 또한 한국화폐를 털어내고 일본화폐를 교환하기 시작한 것

3. 일본상인들이 대규모로 일본화폐를 회수하기 시작한 것

4. -일간의 교섭의 결렬로 전쟁의 가능성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

5. 한국정부가 중앙은행 개설 후 현행 백동화의 통용을 폐지하고 시가에 의하여 교환을 하거나 당오전의 경우처럼

   평가 절하를 하지 않을까하는 위기감 때문이 었다.

 

인플레이션의 영향

 

백동화 인플레이션은 이전의 당오전 인플레이션과 표면적으로는 유사하지만 미친 영향은 질적으로 심화된 경향이 있다.

이는 당오전 시기에 비하여 백동화시기에 자본주의적 상품-화폐경제의 침투가 질적 양적으로 심화되었고

조선 피지배층의 다수를 이루던 농민이 화폐경제권에 포섭된 정도의 차이가 유의미하게 나기 때문이다.

이는 갑오 이후에 개항장이 증설되어 개항시장권이 넓어진 것과 조세의 금납화가 전국적으로 실시됨에 따라

자연경제하에 있던 농민들이 상품-화폐경제권에 강제적으로 편입됨으로써 농민의 궁핍화를 유발하였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특히 갑오년 이후로 1897년에는 진남포, 목포가 1899년에는 마산, 군산, 성진이 개항됨에 따라서 개항시장권이

확대되었는데, 특히 전라도의 경우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하였으나 1895년 이전에는 외국과의 무역이

그리 활발하지 못한편이었는데 목포와 군산이 개항됨에 따라 급격히 외국자본의 침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세의 금납화는 강력하게 경제의 화폐화를 추진하는 방책 중 하나이며, 경제의 화폐화는 당시 제국주의국가의

자본주의적 상품-화폐경제의 침투를 위해서나 후진국의 발전을 위해서 공통적으로 필요한 전제조건이기는 하나,

금납화로 인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 그로 말미암은 토착자본가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금융기관이

드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조세 금납화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무시한채 단순한 재정증대와 화폐보급을 위해

추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납화의 시행으로 외국화폐의 유통이 증가하였고 농민의 궁핍화가 심화되었다.

 

갑오 초기에는 개혁이 추진됨에 따라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근대적 은행제도를 도입하고자 하였으나,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서면서 은행 설립보다 국영회사들을 설립하여 산업을 육성하고자 하는 계획이 우선시됨에 따라

취소되었다. 은행제도 도입없는 조세의 금납화는 위에서 언급한 외국화폐의 유통을 불러일으켯고

이는 한국화폐의 신용도를 저하시킴과 동시에 결과적으로 일본인들의 경제적 침략을 용이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당오전이 일시에 1/5로 평가절하되고 백동화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일본화폐는

한국에서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본원화폐의 일종으로 기능함으로써 조세납부에도 사용되었다.

한국정부 또한 차관에 대한 반제나 외국고문의 고문료 등 일본화폐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묵인했다.

또한 이런 일본화폐의 유통은 일본 상인들이 한국화폐 없이 한국 내에서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게 함으로

일본으로의 미곡, 두류, 우피 등 1차 상품반출을 용이하게 되었다.

 

일반 농민생활에는 조세의 금납화는 농민에게 강제적으로 조세납부를 위한 미곡판매를 강요했다.

이렇게 판매된 미곡은 대개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 영세민과 영세농은 쌀부족 현상에 시달려야 했다.

더욱이 조세의 납부가 1월과 10월이었기 때문에 추수와 동시에 미곡이나 두류를 판매하여 조세를 납부하여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추수시기 떨어진 미곡, 콩 값에 의해 농민이 고통받았던 것에 비하여 일본 상인이나 한국 일부 상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농민이 추수를 미루거나 추수를 한 후 쌀을 묵혀 쌀 값이 안정화 된 후에

판매할려고 한다 치더라도  


갑오개혁 시기 지방관의 세무권한을 박탈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기 때문에


지방관들이 독촉 때문에 그런 방법을 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방관들은 중앙정부로의 조세 납부는

미루는 편이었는데, 이는 농민에게 걷어들인 조세를 몇 개월간 상인에게 대출하여 이자 이익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세수취로 지방에서 농민들이 갈려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예산의 부족으로 고통 받았다.

 

하급관료, 군인, 임금을 받는 노동자, 농민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농민을 제외한 자들은 쌀과 콩 수출로 인해

식량부족과 가격상승에 시달려야 했으며 인플레이션의 영향아래 더욱 궁핍하게 되었다.

농민의 경우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과 더불어서 1900년 이후 2회에 걸쳐 지세가 세율이 인상됨에 따라

( 각각 약 60% 정도 인상) 구한말 농민의 궁핍은 이미 참담한 수준에 이르렀다.

 

상인들의 경우에도 한국상인의 대부분은 수출품을 다루기보다는 수입품을 구매해

한국내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상인이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과 구매력 저하로 상인들도 고통받았다.

또한 이들 대부분이 한국화폐를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은 이들의 화폐자산 감소를 불러일으켜

이들의 몰락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였다.

 

한국정부는 재정지출의 증대로 백동화를 남발하여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제 1원인자이며 지세의

인상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에 의해 고통받았다. 특히 조세의 금납화로 인해 저질의

백동화가 다시 정부 재정으로 돌아옴으로써 인플레이션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고

이는 대한제국의 국가 주도로 추진한 근대화를 후퇴시키게 된다.

 

백동화 인플레이션은 당오전 인플레이션보다 더욱 심하게 한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저해한 중요한 요인이며

상공업의 발전이 결정적으로 후퇴 하게하였고 한국인들의 화폐자산을 간접적으로 수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의

대다수이며 가장 중요한 계층인 농민은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돌진하고 있었으며 도시민이던 임금노동자,

하급관리 생활도 곤궁해지고 있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까지 이어질, 진정한 의미의 지옥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아마 화폐정리사업에 대해 간략하게 맺음하는 것이 실속없는 글의 마지막이 될 듯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사진은 구글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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