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빈이 윤주를 처음 만난 것은 저희 부부가 헤이리에 공방을 열었던 2012년이었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윤주 얼굴에서 만들고픈 조각의 이미지를 봤고, 어머님께 허락을 받아 윤주를 공방에 초대했어요. 윤주는 친구 유빈이와 함께 공방에 놀러왔죠. 당시엔 미술수업이 아닌, 아이들이 공방에 놀러와 인형에 그림 그리는 놀이를 했어요.
그해 겨울, 연아와 함께 세 친구가 팀이 되어 미술수업을 시작했습니다. 학교 다니기 전이었으니 아이들은 수업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한 경험도 선입견도 없는 게 당연했죠. 정해진 수업시간길이도 없고, 특별한 선생의 지시도 없이 수많은 재료를 늘어놓으면 아이들이 하고픈 작업을 했습니다. 그림에 대한 두려움이나 조심성을 피하기 위해 아이의 몸보다 훨씬 큰 전지를 펼쳐주고 손으로 그리기를 시키기도 했지만,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표현할지는 아이들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피곤한 아이는 누워서 잠을 자기도 했고, 미술작업에 신이 나면 3시간이 넘도록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더 많은 재료를 필요로 하면 거리에 나가 돌과 나무를 주워왔고, 눈이 내리면 눈싸움을 하다가 눈을 뭉쳐 만들기도 했고, 햇살 좋은 날엔 분필을 가지고 나가 콘크리트에 낙서를 하기도 했어요.
2013년 어느 날 유안이라는 학생이 새로 들어 왔을 때였습니다.
유안이가 “선생님, 뭘 그려야 해요?”라고 질문하자 유빈이가 답했죠.
“여긴 시키는 거 없어, 우리가 하고 싶은 거 알아서 하는 거야.”
선생들은 종종 새로운 재료와 다양한 크기의 종이를 준비하고 그 재료들을 사용해 볼 것을 권유하지만 그것을 정말로 사용할지, 어떻게 사용할지, 그 재료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오롯이 학생이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선생은 ‘이런 방식은 어떨까? 저런 방식은 어떨까?’라는 제안을 던지지만 어떠한 지시를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학생의 몫인 거죠.
지난주에도 윤주가 바느질 작업이 잘 풀리지 않아, ‘아, 나 뭐하지?’하며 선생에게 투덜대자 ‘우리가 언제 그런 거 지시받고 작업했냐?’라며 유빈이가 웃으며 얘기하더군요. 그럴 때면 아이들은 작업실 구석을 뒤지며 새로운 작업 구상을 합니다. 마음에 드는 재료를 발견하면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작업에 들어가고, 작업이 잘 풀리지 않으면 방식을 틀어서 목표를 수정하기도 합니다. 선생들은 이런 저런 방식에서의 조언을 해주고, 다양한 재료들을 배합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제안과 조언을 아이들은 자신만의 것으로 기막히게 흡수하죠. 그리고 이제 아이들은 서로가 조언을 주고받으며 어려운 부분을 함께 풀어나갑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손이 더러워지고 주변이 지저분해지는 것에 대한 거리낌도 없습니다. 과감하게 시도하여 결과가 좋으면 만족하고, 원하는 결과가 아니면 무던하게 넘어갑니다. 다시 시도하기도 하고 다른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특별한 결과를 위해 작업하기 보다는 작업 자체를 즐기고, 좋은 결과는 그러한 과정 중에 툭툭 던져진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아요.
지난 시간, 2주에 걸쳐 유빈이는 나무를 이용해 타악기를 만들었어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나무는 각기 다른 소리를 냈고, 유빈이는 마음에 드는 소리를 찾기 위해 수 없이 나무를 두들겼고, 그 나무가 어떤 박스 위에 올라갔을 때 더 좋은 소리가 나는지 알아내기 위해 많은 실험을 했습니다. 꽤나 긴 고민과 실험의 단계에서 윤주가 여러 제안을 하기도 했고요. 아이들은 그 과정의 재미를 즐길 줄 알아요.
지난 시간엔 금속으로 달팽이를 만들자, 정원쌤이 하얀 종이 위에 올려서 구성을 완성시키기를 권했고, 제가 금속의 입체작업과 종이의 평면작업을 혼합하기를 권했습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멋진 작품을 완성했어요. 이제 유빈이는 파스텔을 참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유빈, 윤주, 연아. 이 세 아이들과의 수업이 어찌하여 이렇게 잘 풀렸는지는 저희 선생들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서로 잘 배합된 까닭이겠지만, 딱딱한 학교수업을 경험하기 전에 시작한 것이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자유롭게, 하지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누군가가 던져준 주제에 얽매이거나 표현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방식을 찾고 주제를 찾고 표현방법을 찾는 과정들. 때로는 변화 없이 지난하게 반복되는 듯 보이지만 어느새 훌쩍 커다란 산을 넘어선 모습.
워낙 어려서 만났기에 자연스레 반말하며 지내고 있지만,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닌 정말 친구 같은 아이들입니다. 그저 평어를 쓰고 거리낌 없이 장난을 친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지내거든요. 정원쌤이 청소와 정리에 힘들어하자 아이들이 정리를 스스로 하기 시작했고, 선생들의 재료와 표현방법에 대한 제안을 ‘어른의 지시’가 아닌 친구들과의 수다처럼 가볍게 받아들이고 과감하게 시도합니다. 선생이 해보라고 권하면 일단 하고 봅니다. 예를 들자면 파스텔 위에 물감으로 그리기 같은 것 말이죠. 해보고 좋으면 반복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러다 보니 선생이 준비한 것보다 더 많은 표현력을 스스로 열어젖히고 결과물을 빚어냅니다. 어른의 눈에는 잘 그린 그림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부모의 눈에는 오랜 기간 동안 별다른 발전이 없는 것 같아 조급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작업을 모아두고 보면 커다란 발전이 한 눈에 보이죠. 선생이 정답을 알려주고 정답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며 학생을 훈련시키는 것 보다, 학생 스스로가 원하는 목표를 세우고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 비록 과정이 지난하고 느릴지라도 더 훌륭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저희 선생들은 믿어요.
유빈이가 예술가의 길을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무엇을 하건 행복하게 자신의 꿈을 차곡차곡 완성해가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림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제게 그랬듯이, 제가 여러 가지로 힘들어할 때마다 그림이 친구가 되어 제 곁에 있어 주었듯, 몇 년 만에 손에 쥔 목탄으로 거침없이 감정을 배설한 후 편안했듯, 유빈이에게도 그림이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래는 그동안의 유빈이 작품들입니다.
2012
2015 초등2년
2016 이제 3학년 올라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