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페리의 흑선 사건 이후, 또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서야 일본이 외부 세계에 대해 눈을 떴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일본의 외국인식과 이에 대한 지식은 1700년대부터 상당했습니다.
이를테면 아라이 하쿠세키는 1715년에 이미 서양 선교사를 심문하면서 얻어낸 정보를 체계화한 저서 <서양기문>을 저술하고 서양의 다양한 민족, 정치제도, 주요 국가들의 역사, 그리고 지리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 서양 선박이 더욱 자주 출몰하자 위기의식은 점점 확산되었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해방론>이라는 것인데요, 바다로부터 오는 위협에 대해 방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 논자 중에는 서양이 일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을 들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역, 신수공급 등이지 일본 점령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해방론자들이 이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자와 야스시라는 인물은 <신론> (1825년 저) 이라는 저서에서 일본에 대한 서양의 침략위기를 강조하면서, 서양의 출현을 안이하게 보려는 논자들에 대해 일일이 반박했습니다.
첫째, 오호츠크 연안에 당도하여 일본의 북부 도서지역에 출현하기 시작한 러시아에 대해 그들이 쌀을 구하러 오는 것에 불과하다는 논자에 대해 아이자와는 러시아인은 원래 쌀을 먹지 않으며, 쌀은 일본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데 굳이 일본 연안에 오는 것은 군사적 침략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서양의 선박은 어선이나 상선이라서 전투를 벌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서양 선박은 언제라도 전함으로 변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기 떄문에 방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셋째, 일본에 접근하는 서양인들을 은혜로 대한다면 분쟁을 피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인도, 동남아시아 등을 생각할 때 서양의 침략의도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조금의 은혜를 베푼다고 감복할 자들이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건, 인도와 동남아가 서양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넷째, 사양이 설령 침략한다 하더라도 일본은 정예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일본이 무사전통이 있다고는 하나 이미 200년 이상 실전경험이 없고 서양의 전법은 과거의 것과는 이질적인 것이어서 대응하기 힘들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섯째, 서양은 일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침략하더라도 병력은 소규모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 아이자와는 서양은 기독교라는 강력한 종교가 있기 때문에 이를 가지고 일본의 무지한 백성을 포섭한다면 일본 내부에 응원세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반론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아이자와는 세계정세를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에 비교하면서 세계가 7웅의 각충장으로 변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7개의 강국은 청, 무굴제국, 페르시아, 오스만 튀르크, 신성로마제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아이자와가 무굴제국이나 오스만튀르크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아이자와가 글을 썼던 1825년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이 이미 멸망시키고 없었지만...)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일본을 그 7개 강국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그가 군사공격이나 전투방법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고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일본이라는 국가는 무엇인가, 그리고 일본이라는 국가에 民을 어떻게 일체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서술하면서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상과 인식은 후일 요시다 쇼인에게 계승되었고 요시다 쇼인은 다시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에게 그러한 문제의식을 전수했습니다.
이처럼 일본은 중국과 영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10년도 전에 서양을 위험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했고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인식을 했습니다.
동시대 중국이나 조선은 서양에 대해 상대적으로 별 생각이 없었던 반면, 일본은 과장스럽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위협을 느꼈다는 게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