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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케이지(鈴木敬司) - 미얀마 독립에 공헌,아웅산훈장을 받은 ..
게시물ID : history_258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t2
추천 : 2
조회수 : 98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4/06 09:3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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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에서 유명한 아웅산은 테자(Teza) 미얀마 어로 불꽃
네윈(Ne Win)은 빛나는 태양이라는 뜻으로  불꽃과 태양, 욱일승천기에서 영감을 받은 이름들이라고하더군요

결관론적으로 버마독립운동에 관여한 일본인 스즈키 케이지는 아웅산훈장을 받았다고 하는데

한국상황이랑도 오버랩되네요

대한민국도 박정희,전두환,이명박때

수교훈장 광화장(국권의 신장 및 우방과의 친선에 공헌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 중에 1등급)

보국훈장 통일장(국가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되는 훈장 중에 1등급)

를  A급전범이었거나 골수우익등으로 일제시절 활약하거나 박정희전두환이명박시절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하거나 망언을 했던 분들에게 줘서  말이 많았죠


일본인 부당 훈장 수훈자 명단


1972년에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은 오오히라 마사요시 -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헌법상 문제는 없다고 주장하는 인물

1972년에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은 나카가와 이치로-독도는 우리나라(일본)의 고유영토라는 인물

고다마 요시오수교훈장광화장 1970.08.28. 박정희 정부 A급 전범으로 1946년 체포, 1948년 석방미군정에 조선의 재식민지화 간청

가토 카츠야국민훈장동백장 1973.11.02. 박정희 정부.731부대 관계자나고야공중의학연구소 발진티푸스 백신 제조반

사사카와 료이치수교훈장광화장 1976.09.25. 박정희 정부A급 전범으로 1945년 체포, 1948년 석방

나카소네 야스히로일본 71, 72, 73대(1982~1987)총리 수교훈장광화장 1983.01.11. 전두환 정부독도 망언 1984년 02월 10일 참의원 본회의야스쿠니 신사참배 1985년 8월    

아베 신타로1982~86년 외무대신아베 신조 총리의 부친 수교훈장광화장 1984.07. 전두환 정부독도 망언 1984년 2월 10일 

스즈키 젠코일본 70대 (1980~82) 총리 수교훈장광화대장 1985.11.전두환 정부독도 망언 1981년 01월 30일 참의원 본회의야스쿠니 신사참배 1980, 1981, 1982년 

다케시타 노보루일본 74대(1987~1989)총리 수교훈장광화대장 1995.12.15 김영삼 정부일본 제국주의 및 침략전쟁 미화 1987년 12월 10일 예산위원회 1989년 히로히토천황 공식 추도사 

모리 요시로일본 85, 86대(2000~2001)총리 수교훈장광화대장 2010.11. 이명박 정부 독도 망언 2000년 9월 19일야스쿠니 신사 참배 2004년, 2011~2012년

등등...

그래서 여기저기서  정부를 상대로 상훈 취소를 요구 하고있지만 
아직 정부차원에선 취소하지않고있는 상황인데 뭐 

버마도 한국이랑 비슷하네요.상황은 약간 다르지만....적어도 버마에선 아웅산의딸이 취소할리도 그것을 아웅산에게 요구할일도없을테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4367
독립 영웅의 꿈 '백인 여성의 목을 일본도로…'
[유라시아 견문] 임팔 전투 : 제국의 충돌

...................(중략)................

▲ 하이난 섬의 아웅산과 네윈.

아웅산을 발탁한 이가 스즈키 케이지(鈴木敬司)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빗대어 '버마의 스즈키'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특무기구 '남기관(南機関)'의 기관장이었다. 미얀마(및 동남아시아) 내부에서 영국에 저항할 수 있는 반군을 키우고자 했다. 군복을 벗고 언론인으로 신분을 세탁하여 동남아 일대를 주유했다.

그러다 대어를 낚은 것이다. 장래가 촉망받던 미얀마의 청년 지도자를 도쿄까지 끌어 들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의 주도면밀한 지도 아래 청년은 '아웅산 장군'으로 성장했다. 독일과 일본을 모델로 삼은 강력한 국가 건설을 염원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정당, 하나의 영도, 미니멀한 파시즘은 황홀한 것이었다. 영국식 개인주의와 민주주의는 어지럽고 혐오스런 것이었다. 영국은 지는 해고, 일본은 뜨는 해였다. 아웅산은 기모노를 입고 일본어로 말하고 일본어 이름도 지었다. 자발적 창씨개명이었다.

사상 개조를 마치고 미얀마에 잠입했다. 비밀 공작을 개시했다. 옛 학생 운동권 동료부터 접촉했다. 세계의 정세를 설명하고 일본의 현재를 설파했다. 호응한 이들을 이끌고 중국의 하이난 섬으로 이동한다. 이미 일본이 점령한 상태였다. 이번에는 이동이 한결 쉬웠다. 스즈키 대령이 선박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 30인의 지사.


서른 명의 최정예 집단이었다. '30인의 지사'라고도 한다. 6개월간 지옥 훈련이 시작되었다. 일장기에 경례하고, 일본 군가를 부르고, 일본식 제식 훈련을 받았다. 스즈키의 훈시도 이어졌다. 아시아의 전통과는 어울리지 않는 개인주의-자유주의-자본주의를 박멸하자고 선동했다. 

.....................



1943년 8월 1일, 독립 행사가 열렸다. 아웅산은 버마군의 수장이 되었다. '하나의 피, 하나의 소리, 하나의 사명'이 군대의 모토였다. 지금까지도 미얀마 군부의 슬로건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이난 섬에서 훈련된 그 30명의 지사들이 해방 이후 미얀마 정치를 통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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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모노를 입고 일본도를 든 미얀마의 네윈.

아웅산과 네윈은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회의에도 참석했다. 처음으로 식민지가 아니라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도 대접받은 것이다. 이로써 1945년 이후 되돌아온 영국은 결코 미얀마를 지배할 수 없게 된다. 대동아가 동남아 탈식민의 기폭제였음을 통째로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1945년 말, 영국은 스즈키를 BC급 전범으로 기소하여 미얀마로 연행했다. 하지만 그를 석방시켜 준 이가 아웅산이다. 네윈은 집권 시절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남기관 인사들과 재회했다. 그들과 해후할 때는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의 옛 시절로 돌아갔다. 일본어로 대화하며 추억에 잠기기를 즐겼다.

가끔은 1962년 쿠데타와 군사 독재를 維新(유신)에 빗대기도 했다. 


스즈키 대령은 1981년, 미얀마 독립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국가의 최고 영예인 아웅산 훈장을 받는다. 대동아의 후일담은 제법 길다. 

.................(생략)..........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4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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