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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씨, SperoSpera와 말다툼하지 맙시다.
게시물ID : history_25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이쿠머니
추천 : 2/11
조회수 : 873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1/09/14 23:20:11
일제가 타임머신을 개발해서 그런걸수도 있잖습니까. 나쁜건 일제입니다.

이것보십쇼. 김구 선생님이 계림장업단의 스치다를 살해하니 시공이 뒤틀려져서, 그가 죽은 만들어진 계림장업단에 그의 이름이 떡하니 있잖습니까.

http://www.mediagaon.or.kr/jsp/search/SearchGoDirMain.jsp?code=DLD&year=1896&month=09&day=22

1896년 9월 22일 2면 독립신문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DLD/DLD18960922u00_02.pdf

1896년 11월 7일 2면 독립신문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DLD/DLD18961107u00_02.pdf

김구는 해주 출신으로 당시 이름은 김창수.
그에게 살해당한 스치다는 상인인가?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h_009r_0010_0050

(5) [日本人 土田讓亮의 被殺事件과 犯人逮捕要求 件]  
문서번호 公文第20號 
발송일 1896년 3월 31일 (1896-03-31)  
발송자 辨理公使 小村壽太郞 
수신자 外務大臣 李完用  

(5) [日本人 土田讓亮의 被殺事件과 犯人逮捕要求 件]  
公文第20號  
서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 仁川領事의 보고에 따르면, 長崎縣 평민 土田讓亮이라는 자가 조선인 1명(平安道 龍岡 거주 林學吉, 20세)을 데리고 黃州에서 인천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鎭南浦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도중에 황주 十二浦에서 한국 배 1척을 세내어 大同江을 내려가다 3월 8일 밤 治下浦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9일 오전 3시경 그 곳을 떠날 준비를 마치고 식사를 하기 위하여 그 곳 숙박업자 李化甫 집에 갔습니다. 다시 귀선하려 할 때에, 그 집 뜰 앞에서 그 여인숙에서 숙박한 한인 4, 5명에게 타살되었습니다. 고용된 한인 林도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였지만 간신히 위험을 피하여 같은 달 12일 밤 平壤에 도착하여 그 곳 주재 平原警部에게 위와 같은 사건 전말을 알려왔습니다. 그래서 平原 경부는 巡査 2명과 巡檢 5명을 인솔, 같은 달 15일 사건 현장에 도착, 검사를 하려고 하였더니 여인숙 주인은 경부 등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도망하였고, 피해자의 시체는 벌써 강에 버려진 뒤라 검시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여인숙의 뜰 앞에 핏자국이 여기저기 있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부 일행은 그곳 郡 직원에게 엄하게 항의하였더니 그들이 가해 혐의가 있는 자 7명을 데리고 옴에, 조사해 보니 누구도 가해자가 아니고 다만 이 사건을 들어서 알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土田讓亮의 남은 재산은 韓錢 10俵와 행낭보따리 1개가 있는데, 韓錢 二俵는 누군가 빼앗아 가고 나머지는 무사히 인천 영사관이 인수했다는 것입니다. 조사하건대 본건 피해 전말은 전기한 바와 같이 우리 영사의 보고에 따라서 사실이 명확할 뿐만 아니라 가해자도 쉽게 수색하여 체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귀 정부는 날짜를 미루지 말고 곧 평양 觀察使 및 해당 郡守에게 엄중하게 훈령을 보내어 일정을 정해 가해자를 체포하고 상응한 처분을 하시길 부탁드리며, 위와 같이 조회하오니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896년 3월 31일 
辨理公使 小村壽太郞 
外務大臣 李完用 閣下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평민이다. 


계림장업단인가?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h_012r_0010_0090
1. 현재의 정황 
계림장업단은 지난 1896년 5월 仁川에서 조직되어 그해 8월에 이르러 지부를 京城, 釜山, 元山에 설치하였음.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안타깝게도 그가 죽은뒤에 조직되었다. 

당시 치하포 사건〔토전양량(土田讓亮) 격살건〕취조문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jsp?lm_sHisCode=PV_DJ&lm_sBookCode=A011&lm_sItemCode=002.000.000.000&lm_sSrchYear=&keyword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http://sunho1007.egloos.com/

http://sunho1007.egloos.com/2108477

이거 보십시오. 일제는 어림잡아 조선인들을 800만이나 학살했는데 시공을 초월한 만행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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