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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3편-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
게시물ID : phil_22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타자기사
추천 : 2
조회수 : 120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2/29 10:51:24
 프로이트는 1차 대전 발발 직후인 1915년에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작성합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유혈 전쟁이 인류를 도탄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의 심리상태가 어떤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후방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비전투원들이 실의에 빠진 이유는 설명할 수 있다고 프로이트는 말합니다. 

 비전투원들인 우리가 전쟁에 환멸을 느끼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전쟁 중 문명화되었다고 자부하던 인류가 보여준 도덕적 타락이 그 첫번째 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전쟁에 의해 문명인은 종래에 자신이 갖고 있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변경해야 했지만 아직 새로운 태도를 찾지 못했는데 이러한 갈등이 원인이 된 고통입니다.  

 우리가 전쟁 이전에 지니고 있던 죽음에 대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문명인인 우리는 스스로의 죽음을 인정합니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이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거대한 모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한편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 합니다. 

 특히 타인의 죽음이 나에게 이득이 될 경우 타인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박정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에 대해 실제보다 더 허용적이고 긍정적으로 그를 배려하려 합니다. 

 망자에게 매질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죽은 이는 더 이상의 배려가 필요하지 않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큰 배려를 그에게 아끼지 않습니다.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만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리는 것이 문명화된 우리들이 지닌 죽음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전쟁은 문명인의 이러한 태도를 흔들어놓습니다. 

 전장의 군인은 자신이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고 적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환호성을 지릅니다. 

 때문에 후방에서 이를 지켜보는 비전투원들은 죽음에 대한 기존의 태도가 그저 환상일 뿐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우리들의 진실이 전쟁에서 드러난 것은 아닐지 우려하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죽음에 대한 문명화된 태도가 도대체 어떻게 발생하였는지를 알아야 이 고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프로이트는 원시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태초의 원시인은 생존을 위해 타인을 죽여야했습니다. 

 당시 타인은 곧 적이었으니까요.

 보통 철학자들은 최초로 인간의 사유를 자극한 것은 인간의 죽음이라고 말했지만 적의 죽음 앞에서 원시인은 고뇌하기보다는 환호성을 질렀을지 모릅니다. 

 한편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기뻐했고 자신의 죽음은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상한 종류의 죽음을 막닥뜨리게 됩니다. 

 그것은 아내나 친구, 자식과 같은 분명 타인이지만 동시에 자신이기도 한 존재의 죽음입니다. 

 이들을 고뇌에 빠뜨리고 사유를 자극한 것은 바로 이런 죽음이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합니다. 

 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자신과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타인 사이에 놓여있는 존재들의 죽음이 원시인을 고통스럽게 했지요.

 이들은 고뇌했고 모종의 타협안을 생각해냈습니다. 

 죽음을 인정하되 죽음에서 소멸의 의미를 배제하는 관념의 탄생입니다. 

 '영혼'이라는 관념은 절대 죽어선 안되지만 반드시 죽어야 하는 모순된 죽음의 갈등에서 원시인들이 찾아낸 타협안입니다.

 영혼이라는 관념은 차츰 확대되었고 여기서 최초의 윤리적 계율도 생겨납니다. 

 "살인하지 말라"

 그리고 이러한 계율은 차츰 적에게까지 확대되기에 이릅니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한편 자신의 죽음을 인정해야 타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배려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문명인은 죽음에 대한 원시인의 태도를 변경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죽음에 대한 문명인의 태도가 정말 변화되었는지를 의문시합니다. 

 문명인인 우리의 무의식은 원시인처럼 여전히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배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보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상당히 무관심합니다.

 프로이트는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소개합니다. 

 "고리오 영감"에서 발자크는 루소의 저술에 나오는 한 구절을 언급합니다. 

 '북경의 늙은 고관이 죽으면 막대한 이익을 얻게될 경우, 파리를 떠나지도 않고 물론 들키지도 않고 단지 고관의 죽음을 간절히 염원하는 것만으로 그 고관을 죽일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실제로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무관심합니다. 

 한편 우리의 무의식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프로이트는 다음의 농담을 소개합니다. 

 '하루는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나는 파리로 이사갈거야'

 죽음에 대한 우리의 문명화된 태도는 환상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실제로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자신의 죽음은 상상조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회의 감시가 우리 내부의 원시인을 억압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전쟁이라는 특수한 시기에 사회의 감시가 느슨해졌기 때문에 내부의 원시인이 뛰쳐나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1차 대전은 비전투원인 우리들을 도탄에 빠뜨렸는데, 그 중 한가지 이유는 죽음에 대한 태도 변경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명인의 태도는 환상이었고 실제로 우리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환상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환상을 추구하는 이유는 환상이 현실의 어떤 부분을 감추어주고 이때문에 우리가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환상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면 우리는 그 환상을 폐기해야 합니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자 프로이트는 섬뜩한 언급을 합니다. 

 "우리는 전쟁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죽음에 대한 문명인의 태도를 버리고 내부의 원시인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결코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퇴행을 의미합니다. 

 프로이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죽음에 대한 태도 변경 이외에 전쟁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유를 프로이트는 문명인의 타락한 도덕성이라고 지적합니다. 

 한 인간이 도덕적으로 성숙해져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 중 성선설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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