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민족이 멸망하면서
한국처럼 무기력했고, 침묵한 민족이 흔치 않았다."
-역사가 신복룡-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는 동안, 대부분의 국민들은 침묵했다.
정미의병의 1907년 부터 한일 합방 1주년이 되는 1911년 까지
전체 인구의 1%만이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해 싸웠다고 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이토히로부미와 그의 측근들이 을사늑약 체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뒷풀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궁궐을 일본군대로 포위하고, 고종황제는 사인을 거부했다.
이완용과 4명의 대신들이 조약에 찬성해서 을사오적으로 불린다.
1909년 12월 22일
한 성당에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 2세 추도식이 열렸다.
이 때 이완용이 추도식에 참가하고 나오는길에
한 군밤장사가 그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다.
총 세번을 찌르는데, 이때 인력거꾼이 이완용을 대신해 죽는다.
일본군의 총격으로 군밤장사는 넓적다리에 부상을 입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된다.
이 때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이완용을 죽이기 위해 군밤장사로 변신해서 기다리고 있던 그 사람이
바로 이재명이었다.
사실 이재명은 경술국치의 원흉 이토히로부미의 암살을 계획했었다.
연해주에 있던 그는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이완용을 찌른 이재명은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일본 경찰에 잡혀간 뒤에도 ..
서울지방재판소에서 방청석을 향하여 열렬한 언변으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 “는
연설을 하는가 하면,
일본인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자
눈을 부릅뜨고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하고
고함을 쳤다.
그뒤 재판이 계속되어 재판장이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자 “2000만 민족이다. “ 말한다,
그러자
창밖에서 “옳다!” 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 재판장을 호령하여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하고
노기를 띠었다.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어서 공소하였으나 사형이 확정되자,
재판장을 꾸짖어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
1910년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란 말을 남겼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0살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