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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으로는 베오베 못가죠? (bgm꼭!!수동재생)
게시물ID : sisa_1753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재규어민
추천 : 13
조회수 : 57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3/02 16:30:20
고 김근태 님 육성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대부 . 1947년 경기도 양평출생. 1965년(19세) 경기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 1971년(25세):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 으로 2년간 수배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20년이상 거의 모든 시국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87년(41세): 로버트케네디 인권상 1995년(49세): 이부영, 장기표등 같이 활동했던 재야인사 가운데 마지막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이후 도봉갑 지역구에서 내리 세 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04년 7월 1일~2005년 12월 31일(58세~59세) 보건복지부 장관 역임 2005년(59세): 수감중인 이 근안경감을 면회하고 "용서한다, 건강하시라" 고 했다. 2007년(60세):파킨슨병 진단. 2008년(61세) ;18대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신지호의원과 겨뤄 낙선했다. 2002년과 2007년 대통령후보 경선에 도전할 뜻을 가졌지만 두차례 모두 포기하는 아픔을 겪었다. <신문기사 내용>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집권당을 이끌었다.(2006년 6월 9일) 그는 깨끗한 정치인의 대명사였다. 주변에서는 도덕적인 문제에서는 결벽증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고 회고한다.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등을 치르면서 법정 한도보다 많은 후원금을 모집했다며 "양심선언"을 했다. 당시 상당수 정치인이 똑같은 일을 했지만 그만 유독 정치자금법을 어겼다고 "자수"하고 재판을 받은 것이다. 당내에서는 "바보" 라고 했다. 법원은 재판에서 "위법 사실은 인정되지만 같은 시기에 같은 명목으로 정치자금을 받은 다른 의원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아 형성성에 문제가 있다"며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성품은 조용하고 합리적이다. 정치권에선 거의 적이 없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시절 동교동계 해체를 가장 먼저 주장하고,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문제를 놓고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고 하는 등 최고 권력자들에게는 강하게 맞섰다. 하지만 그는 대중성이 부족했다. 연설을 잘 하지 못했고 선동도 체질적으로 하지 못했다. 정치권에선 그와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은 10년이고 20년이고 그를 떠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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