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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박사 김순권"DJ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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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월오탱하셈
추천 : 2/4
조회수 : 583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2/03/03 15:32:11
김순권 박사(61)는 본지 지난호(665호)를 통해 “DJ정부 시절 대북밀사 역할을 했다”고 밝힌데 이어 이번에는 DJ의 대북 햇볕정책 뒤에 가려진 흑막을 폭로했다. 
또 김 박사는 인터뷰를 통해 DJ와의 관계, 한나라당 지지선언 배경 등에 대해 입을 열었다. 
특히 그는 대북사업을 통한 DJ의 노벨상 수상 과정과 남북정상회담 성사배경 등을 밝히는 대목에서 “DJ는 나를 철저하게 이용한 뒤 등 돌렸다”며 “DJ의 측근들은 노벨상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대북지원사업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고 분개했다. 김 박사에 따르면 대북지원사업의 실체는 굶주린 동포의 구제가 아닌 정권 실세들의 ‘추악한 정치판’ 그 자체였다. 
DJ의 대북 메신저로 활약한 장본인이 이같이 밝히고 나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 향후 정치권에서 뜨거운 논란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김 박사가 털어놓는 그 충격적인 내용을 들어보자.


“그동안 미국과 아프리카 등지를 돌며 평생 학문만 연구하던 학자가 고국 땅 정치판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 나는 한국의 정치판이 이렇게 추잡한지 처음 알았다.”
DJ정부시절 대북지원사업에 대한 김 박사의 말이다. 북한을 오가는 과정에서 그는 정부 당국자들이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정치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자신과 북한을 활용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DJ와 김 박사의 만남 
김 박사와 DJ가 만나 뜻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북한구제’라는 공통 관심사 때문이었다. 

김 박사는 95년부터 97년까지 여러 차례 방북을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DJ가 먼저 김 박사에게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대선을 앞둔 97년 9월 경 대구에서 만나 북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뜻을 같이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박사에 따르면 DJ는 이날 만남의 자리에서 대북지원프로젝트를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DJ는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김 박사가 북한 동포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해 주겠다”며 “선거 운동을 적극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김 박사는 대구 경북 지역에서 DJ 지지선언을 한 뒤 목이 쉬고 발이 붓도록 유세현장을 누비고 다니며 선거 운동을 도왔다. 

김 박사는 “추미애나 박지원 등이 DJ의 선거 운동에 앞장섰으나 대구지역에서는 인기가 없었다”며 “하지만 내가 한손에 옥수수를 들고 다니며 그들의 선거 운동을 돕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박사는 매년 유력한 노벨상 후보에 오르며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경북 지역에서 그의 유명세는 실로 대단했다. 

이런 김 박사의 활약 덕분인지 DJ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이로써 김 박사의 방북 길도 활짝 열리게 됐다.


대북 비료지원 놓고 DJ와 갈등
DJ가 정권을 인수하자 김 박사는 예상했던 대로 대북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김 박사는 슈퍼옥수수 연구를 통한 대북지원사업과 함께 DJ의 비공식 대북 밀사 역할을 하며 DJ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생각보다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김 박사와 “DJ는 대북 비료지원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이 결성되고 한광옥씨와 임동원씨 등을 만나 대북지원방향을 논의했었다. 이때 비료지원 사업 추진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이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김 박사에 따르면 그가 세운 국제옥수수재단과 민화협측이 비료지원 사업에 대해 논의한 결과, 민화협은 협회결성 초기인 관계로 당장 자금을 댈 여력이 없으니 우선 국제옥수수재단에서 비료값을 부담하면 차후 이를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이에 대해 “내가 이 때 비료값으로 쓴 돈은 3억여원에 이른다”며 “이 돈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국제옥수수협회를 위해 기부한 5억원의 일부로 민화협과 DJ는 돈을 갚아 달라는 나의 요구를 모른 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 청와대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하나 전했다. 

“언젠가 청와대에 200여명이 모여 DJ와 오찬을 한 적이 있는데, 이때 DJ는 김 박사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국제옥수수재단에서 대납한 대북 비료지원 자금을 갚아 달라고 했다. 

그러나 DJ는 이에 대해 처음 듣는 소리라며 나중에 알아보고 조치를 취해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이같은 DJ의 말에 나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가 절대 모를 수 없는 일임에도 어떻게 그처럼 발뺌을 할 수 있나”고 기막혀 했다.


DJ, 노벨상은 나의 것 
대북 비료지원 대금 문제에도 불구하고 김 박사는 DJ의 대북정책을 여전히 지지했다. 

하지만 그가 DJ에 대해 두 번째로 실망하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노벨상 수상과정에서 DJ가 보인 행동 때문이다. 
DJ의 노벨상 수상과 관련해서는 심사위원 로비의혹 등 각종 의혹이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다. 

김 박사에 따르면 이 가운데 대북사업을 통한 노벨상 물밑작업 의혹은 일정부분 사실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김 박사는 “나는 오래전부터 다년간 연속으로 노벨상 후보에 올랐던 사람이다”라며 “DJ는 노벨상 수상자 선정을 앞두고 대북지원사업에 앞장서는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김 박사의 이러한 증언은 실제 그가 노벨상 수상이 유력한 후보라는 점과 이때 대북지원사업 등으로 그 인지도가 더욱 올라가고 있었던 시점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 김 박사는 “DJ의 측근들은 그에게 노벨평화상이 가도록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며 “DJ의 최측근들은 나에게 ‘북한에 가서 DJ가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DJ측근들의 이같은 노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김 박사에 따르면 심지어 그가 옥수수 연구와 관련, 잠시 브라질에 머물 때에도 국정원 관계자가 찾아와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협조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김 박사는 “DJ측근들은 노벨상을 언급하면서 나에게 민족의 화합을 위해 노벨상을 양보하라는 식으로 말했다”며 “더 중요한 것은 노벨상 수상자 선정을 앞두고 북한의 김정일이 공동수상자가 될 것처럼 말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이 말을 들은 김 박사는 자신이 노벨상을 받는 것 보다 두 사람이 공동수상을 하면 실제로 민족의 화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방북한 자리에서 이것을 북한의 고위 관계자들에게 그대로 전했다. 

그러나 김 박사는 DJ와 그 측근들에 또 다시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공동 수상이 아니라 DJ 혼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이에 대해 “DJ측근들은 한반도 평화정착 운운하며 공동수상을 위해 뛰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와 김정일을 노벨상 수상을 위한 들러리로 활용했을 뿐이었다”며 “DJ가 진심으로 민족화합을 위해 공동수상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면 혼자 수상자로 발표됐을 때 수상을 거부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제스처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북한 고위층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DJ가 노벨 평화상을 공동수상하게 될 것이니 남측의 노력에 협조해 달라’고 말한 김 박사의 입장은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 북한 당국자는 김 박사에게 ‘애초 수령동지와 동포를 이용해 남측이 노벨상을 수상하려 한 것 아니오’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김 박사, DJ에 최후통첩
김 박사는 또 자신이 2002년 대선 당시 갑자기 한나라당 지지선언을 한 배경에 대해서도 상세히 털어 놓았다. 

그에 따르면 DJ가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국제옥수수재단의 비료 대금 3억원에 대해 관심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지속적인 대금 청구에도 불구하고 민단협과 임동원을 비롯한 DJ측 인사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참다못한 김 박사는 DJ에게 “비료 대금 3억원을 주지 않으면 나름대로 조치를 취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가 말한 최후통첩이란 대금을 주지 않을 경우 2002년 대선에서는 야당인 한나라당을 지지하겠다는 것. 

하지만 DJ는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김 박사는 결국 2002년 대선 때 DJ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김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김 박사가 DJ정권 실세들에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항의의 표시였던 셈이다. 

김 박사는 한나라당 지지선언 과정에 대해 “지지선언을 하기 전, 먼저 대구에서 이회창 전총재를 비밀리에 만났다”며 “그때 이 총재는 ‘지난날의 안좋은 감정은 서로 깨끗이 털고 같이 힘을 합치자’고 말했다”고 밝혔다.

당시에는 이 전총재의 지지율이 노무현 대통령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김 박사도 이 전 총재가 100%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 믿고 일부의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선거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전혀 달랐다. 이 전총재는 눈물을 흘리며 정계를 떠났고 김 박사는 홀로 남겨져 버린 것이다. 이후 김 박사는 야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북한과 남한 모두에게 외면당해야 했다. 여권이 2대째 집권하게 되면서 방북의 길은 막혀 버렸고 연구 지원금도 중단돼 버렸다. 

특히 북한은 김 박사의 한나라당 지지선언에 충격을 받아 김 박사의 북한 내 행적 일체를 부정했다. 김 박사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 박사는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연구활동이 다소 위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연구가 중단된 것은 아니다”며 “현재 캄보디아 등 일부 동남아에 마련한 농장에서 시험종을 계속 연구 생산중이고 북한 옥수수지원도 계속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곧 그동안 연구해온 시험종이 최종 검증을 마치게 된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라며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분들이 우리를 후원해 주고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 돕지 않는다 하더라도 민간차원에서 대북지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민화협 “김 박사에 돈 줄 이유 없다”
민화협 관계자는 김순권 박사의 비료대금 지불청구에 대해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기 때문에 돈을 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99년 국제옥수수재단에서 지원을 요청했으나 민화협 측에서는 이에 대한 답신을 보류한 상태였다. 

그러나 옥수수재단 측은 북한과 약속한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일단 재단의 공금으로 비료를 구입해 북에 보낸 뒤 일방적으로 민화협에 비료 대금을 청구해 왔다는 것이다.

한편 옥수수재단은 지난 2005년 재판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 결과 재판부는 조정을 통해 민화협에서 1억원을 주는 선에서 이 문제는 일단락됐다. 

민화협 관계자는 옥수수재단에 1억원을 줬느냐는 질문에 “그 돈은 이미 다 주었다”고 했으나 김 박사에게 확인한 결과 5천만원만 준 상태였다. 이에 재차 옥수수재단에 돈을 얼마나 주었느냐고 묻자 “5천만원을 일단 지불하고 남은 5천만원은 빠른 시일내로 지급할 계획”이라고 대답을 번복했다. 


##98년 대선당시 발생했던 의문의 살인사건 - “누군가 내 목숨 노렸다”
김순권 박사는 98년 대선 당시를 떠올리며 자신이 겪은 미스터리한 사건 하나를 끄집어냈다.

당시 김 박사는 DJ 지지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경북지역의 일부 인사들로부터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선거 유세장을 돌며 DJ지지 연설을 한 뒤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누군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와 “DJ지지를 멈추지 않으면 가족들과 함께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김 박사는 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결국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김 박사가 아니라 김 박사를 수행하던 운전기사가 괴한의 칼에 찔려 죽은 것이다. 

김 박사는 “한밤중에 추미애씨가 울면서 전화를 걸어 왔다”며 “추씨는 운전기사가 죽었는데, 그 시신을 받아 주는 병원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으니 좀 도와달라고 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변을 당한 운전기사는 민주당에서 김 박사를 수행하라며 붙여준 인물이다. 그렇지 않아도 끊임없이 살해 위협전화가 걸려오는 가운데 가까운 측근이 살해당했으니 김 박사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김 박사는 “당시 사건을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많다”며 “일반적으로 선거기간 막바지에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상대편 정당을 정치적으로 몰아붙이는 한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마련일 텐데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내가 알기로 이 사건은 추씨 등이 사망자 가족과 협의해서 조용히 끝낸 것으로 알고 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신문에도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며 “가끔씩 그때 그 살인자가 노린 것이 혹시 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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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기사지만 되세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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