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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목격자 서상일(85)씨, 민간인학살 증언
한국전쟁 초기 대구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 매장지가 65년 만에 새롭게 드러났다.
대구지역의 민간인학살 사건은 1950년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형무소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이 7월 3일~9일, 7월 27일~31일 두 차례에 걸쳐 국군 3사단 22연대 헌병대 등에 학살된 사건이다. 전쟁 직후에는 대구형무소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까지 합치면 8,0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경산 코발트광산과 칠곡 신동재, 달성군 가창골짜기, 대구시 본리동에서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가창면 병풍산 달성광산에서의 학살 사건은 당시 헌병의 지시로 부역을 했던 한 노인이 지난해 10월항쟁 유족회에 증언하면서 새롭게 알려졌다.
1950년 달성광산 화약창고 터.
학살현장에 “한없이 사람들을 죽었다”
10일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동에 거주하는 서상일(85)씨는 당시 대한중석 총무과 경비실에 근무하면서 헌병과 당시 남대구경찰서 파견대의 지시에 따라 시신을 처리하는 부역을 해야 했다. 경찰로 보이는 이들은 국방색 민간복장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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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사람들을 싣고 들어올 때면 계곡은 사이렌 소리와 함께 모든 통행이 금지됐고 경찰이 따로 지시할 때까지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중석을 채굴하던 일꾼들도 굴 안에서 갇혀 있어야 했다. 당시 21살이던 서 씨는 대한중석 경비를 하면서 약 200~300미터 거리에서 벌어지는 학살 장면을 곁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음력 5월 모심기를 하는 시기다.
1차로 학살이 진행된 화약창고 터는 서 씨의 증언으로 보아 약 300명~35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 씨는 이곳에만 당시 미군용 트럭 6~7대에 사람들이 실려 왔다고 증언했다.
2차 학살 지점의 민간인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서 씨는 “화약창고 터에서의 학살 이후 헌병들은 새벽에 사람을 끌고 왔다”며, “한없이 많은 사람을 죽었다”고 표현했다.
서 씨는 2차 지점에서만 약 8일~10일 동안 사람을 묻는 부역을 했다. 그는 “젊은 사람들 속에 40~50대도 많았다”며, “죽은 시신에는 손이 곱고, 고급 옷을 입은 여자들도 보였다”고 말했다.
현재 이 지점은 광산에서 나온 토사로 메꾸어진 상태에서 1994년 달성광산이 폐광되면서 복구되어 계곡지형이 변한 상태다.
서상일(85)씨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병풍산 달성광산 현장에 올라 민간인학살 목격을 증언하고 있다
65년 간의 침묵 “이 이야기를 하면 총살을 시킨다”
서 씨는 “당시 군인들이 이 이야기를 하면 구체적으로 수사를 해서 총살시킨다고 해서 누구도 말하지 못했다”며, “여기는 부역에 참석한 사람만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그때 생전 처음 시체를 보았다”며, “총 맞아 내장이 나오고 머리가 부셔진 사람들을 끄집어내고 묻고 난 후 병이 나서 일주일 동안 출근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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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 풀려난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희생시기는 7월 22일 등 7월 중순부터 8월까지다. 하지만 대구형무소를 거쳐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의 수에 대해 판단할 문헌근거나 증언은 확인되지 않는다.
1994년 폐광된 달성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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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코발트 탄광 못지않게 피해규모가 엄청나군요.
사실, 대구에서 민간인 학살 피해가 가장 큰 곳은 가창골 일대인데..
오늘날 가창골 일대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금기'되어 망각되버린 역사라는게 이렇게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