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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스압)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역사적 오류들
게시물ID : history_262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표면적고
추천 : 16
조회수 : 3049회
댓글수 : 104개
등록시간 : 2016/06/16 21: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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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안녕하세요?



보통 역사라는게 과학이나 수학적 지식처럼 
"기정 사실"로써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게 입에서 입, 기록에서 기록으로 전해진거라 
중간에 오류가 있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를테면 최근들어 많이 오해가 풀렸던
"문익점의 목화씨를 붓뚜껍 속에 숨겨 
몰래 들여왔다는 것이 사실 그렇지 않다."
같은 것이죠. 

그래서 한번 우리들이 흔히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모아보았습니다.
대게의 경우 이런 건 소소한 오류로써 
큰 역사적인 맥락과는 별로 관련은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를 조금이나마 
더 정확히 알자는 차원에서 글을 한번 적어봅니다.


(물론 이 글에서도 충분히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건 댓글로 오류내용을 적어주시면 
충분히 반영하여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소크라테스.jpg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 라고 하며 죽었다.



아마 도덕 교과서에 나왔던 말로 압니다
비록 잘못된 규범일지라도 일단은 지켜야 한다는 
뉘앙스로 나온 사례로 알고 있으나...



소크라테스얼굴.jpg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은 고대 로마의 법률 격언인,
‘법은 엄하지만 그래도 법’(Dura lex, sed lex) 
이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써,
로마 법률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인용함으로써 유명해진 말입니다. 
즉, 소크라테스와는 전혀 관계 없는 말입니다.
근데 왜 이게 갑자기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와전되었을까요?....
좀 쌩뚱맞지만 일본의 한반도 식민 통치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1930년경, 일제강점기시절

尾高朝雄.JPG

오다카 도모오(尾高朝雄)란 
경성제국대학 법과 교수가 있었는데,
당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그럴 듯 하게 소개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끼리끼리 논다고 당시 일본뿐만 아니라, 
과거 군사 정권 시절에서도 
이 말을 악용한 적이 있었다 합니다.

결국 2004년 11월 7일(꽤 오래전이네요..)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교육부에 
교과서에서 이 내용을 수정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고 하네요.
현재 기준으로 수정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추가로,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 했다고 알려진 말은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 이 더러운 세상." 
라고 합니다. 

(단, 주위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권유했을 때 이를 거부했다는 
얘기는 실제로 기록된 일입니다. 
어쨌든 규범 자체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는 한 듯 합니다.)














과거 저용량.JPG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서 
평민들은 별로 등용되지 않았고 양반들이 뽑혔다. 
평민들도 자격은 있었으나 
농사나 부역 등의 이유로 
공부를 할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반 특권층의 폐쇄성의 증거로써 거론되는 
말이기는 한데... 이 역시 거짓입니다.
양반만 과거에 합격한 게 아니라, 
평민들도 상당수가 과거에 합격한 적이 있습니다.
합격 비율로써 한번 알아보죠

일단 조선 초기만 해도 
평민 합격자의 비율이 40~50% 정도였으며. 
16세기 후반부터는 양반의 관직 세습이 이어지며 
조금 낮아지는 양상을 보였다가.. 
18세기 중반 이후 
정조 53.02%, 순조 54.05%,
헌종 50.98%, 철종 48.19%
의 비율로 평민들이 합격했습니다.

물론 애초에 평민 수가 양반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조건 하에서 저 정도 비율이니 
(조선전기 국민 중 양반의 수는 많아야 
5% 정도였다고 합니다)
평민이 양반보다 합격하기 어려웠던 것 
자체는 사실로 봐야겠습니다. 
그래도 이정도 비율로나마 평민 계층이 관직에 
진출하는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비록 조선후기부터 
각종 부정 투성이가 된 과거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과거제 덕분에 
조선은 세계사에서 유래없는 500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청동검.png

-청동기시대의 청동검은 
철기시대의 철검보다 약했다.


청동기시대=>철기시대로 
넘어가는게 문명의 발전 순서였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철검이 청동검보다 
당연히 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수많은 게임들이 이를 반영해 
철검은 청동검보다 강하게 설정하죠.

허나 "초기 철기시대 기준"으로 
철검은 오히려 청동검보다 영 좋지 못했습니다. 
당시 기술로는 절삭력이 
철검이나 청동검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뿐더러
철의 탄소량이 균일하지도 못했으며 
불순물 또한 많은 탓에 
청동검보다 쉽게 깨져나갔기 때문이죠. 
청동검이야 좀 휘더라도 다시 두들겨 패면 되는데...

애초에 이때는 재료가 약해 
긴 장검도 만들기 어려웠습니다.
교과서에 나와있는 고조선시대의 검 사진의 
상당수가 아래처럼 대부분 단검 형태였던것은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청동 장검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청동검.jpg


그렇다면 왜 철기 문명이 
다른 문명들을 정복한 사례가 
수도없이 나오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나올건데.. 

그 이유는 철제무기의 강함 때문이 아닌 
압도적인 생산량에 있었습니다.
청동은 워낙 매장량적으로 귀해 
지휘관급의 무기나 제사용 도구 정도로밖에 
사용되지 못했지만 
철은 일단 생산만 되면 충분하게 공급이 가능하므로 
전 병력을 금속으로 무장시킬 수 있었죠.  
철제 농기구는 있었지만 
청동제 농기구는 거의 없었다는 
국사책의 내용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구리 전선 훔쳐가는 일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문익점.jpg

-문익점과 목화씨

이건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죠.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고려로 귀국할 때, 
목화씨를 붓뚜껍 속에 담아 밀수해왔으며, 
이때문에 한반도에도 목화가 퍼지게 되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러지 않았고
애초에 원나라에서 목화씨 반출을 
딱히 막지도 않았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미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면직물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가 아닌 "그냥 주머니에 넣어"가져왔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물론 원나라가 막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때 문익점이 주머니속에 가져온 목화씨는 
기존 목화씨의 개량종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익점이
딱히 폄하되거나 해야 할 인물은 아닙니다.
비록 문익점 이전에도 목화는 고려에 있었지만, 
그렇게 잘 보급된 편이 아니였으며,
문익점이 제대로 보급을 시작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에서 솜옷을 입을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석봉 어머니.jpg

-한밤중 불을 끈 채로 한석봉의 어머니는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을 썼다.

딱히 이 사건하나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일화"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게 거짓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다고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했다"
라는 사건처럼 
100%확실하게 받아들이긴 어렵다는 겁니다.

이 일화의 출처는 이원명(李源命)이 지은 야담집인 
동야휘집(東野彙輯)이라고 하는데...

일단 이 사건의 관찰자는 
사건의 당사자인 한석봉과 어머니 
단 둘 밖에 없습니다.
즉, 이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한석봉이나 어머니 둘 중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얘기를 해야 
전파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문제는 과연 그말을 제 3자가 들었을 경우 
아주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이 말이 한석봉이 출세한 후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멋대로 지어낸 말일 수도, 
어머니가 옆집 아줌마에게 나는 이렇게 
자식 가르쳤다고 자랑하다 나온 과장일수도, 
혹은 단순한 뜬소문이였거나, 
기록한 자가 그냥 지어낸 것일지라도...
딱히 검증할 만한 수단이 없다는 겁니다. 

거기에 정황을 좀 분석해보자면..
상식적으로 봐도 
눈을 감은채로 글을 잘 쓴다고 해서, 
눈을 뜨면 정말 명필이라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를태면 서로 눈을 감은 상태에서 
제일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가 있다고 해도,
눈을 뜬 상태에서도 꼭 그 사람이 
제일 그림을 잘 그릴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듯이 말이죠.
눈 감은상태에서 글을 잘 쓰는 것은 
그저 눈을 감은 상태에서 글을 잘 쓰는 것 뿐입니다. 

게다가 요리업계 종사자들을 무시하는건 
절대 아니지만, 
단순히 생각해봐도 
시각이 차단된 채로 무언가를 써는 것은, 
같은 상태에서 서예를 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기는 합니다.
다시말해 "대등한 대결(?)"
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참고로 과거 중국 동한 시대 
낙양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먼 곳에서 공부를 하다가 중간에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가 짜던 베를 잘라버리면서 
다시 돌려보낸 고사가 있는데 
어쩌면 이 고사가 반영되었을 지도 모를 듯 합니다. 

물론 주작이라 싸잡아 말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얼마든지 사실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대결이 공정했든 그렇지 않았던 간에, 
일단 그 자체로써 한석봉에게 
깨달음을 주었을 가능성도, 
대결과 상관없이 
그냥 한석봉이 수련이 더 필요하다 
생각했을 가능성도 모두 충분히 있습니다.

여기서는 한석봉의 사례 하나를 들었지만 같은 이유로 
"객관적인 관찰자가 없는" 
상당수의 역사 일화들이라는게 
반드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일화는 일화 수준에서만 생각하는게 좋을 듯 하네요. 
그냥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정도로만 말이죠.


















배신.jpg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당하면서
"부루트스 너마저?.." 라고 하였다.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라는 말은 사실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줄리우스 시저>에 나온 말입니다. 
즉, 셰익스피어의 창작입니다.
물론 충분히 했을 가능성이 있는 말이지만, 
증거는 없습니다.

또한 카이사르의 죽음과 관련해서 
몇 가지 오해들이 더 있는데,
일단 고려시대 정몽주를 암살한 것마냥 
으슥한 밤거리에 매복한 뒤 몰래 죽인 게 아니라, 
원로원 회의장에서 
대놓고 공개적으로 살해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암살"과는 조금 거리가 있죠.

또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였다고 해서 
자식이 부모를 죽인 
비극적인 사례의 예로써도 거론되는데, 
이 역시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다 합니다.

















마젤란.jpg

-마젤란은 지구를 한바퀴 돈 것이 아니다. 
스페인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가서 
태평양까지는 넘어갔지만, 
그 이후 필리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라고 아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시작점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분명히 마젤란은 스페인에서 서쪽으로 출발해 
대서양, 태평양을 건넌 후 필리핀의 막탄 섬에서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한 것은 맞습니다.

문제는 마젤란은 그 이전에 
포루투갈에서 동쪽으로 건너가 
"지신이 죽을 막탄 섬보다 더 동쪽에 있는"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으며,
그 말루쿠제도는 아래 구글맵에 표시되어 있다시피 
마젤란이 죽었던 막탄 섬보다 
더욱 동쪽에 있었다는 겁니다.

말루쿠 제도.PNG


즉 마젤란 이 사람은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하다가 
여러 일을 겪으며 서쪽인 포르투갈로 건너갔고, 
다시 스페인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필리핀까지 가서 죽었습니다. 

결국 마젤란은 지구를 한 바퀴 돈 게 맞습니다. 
단지 한 번의 항해로 한 바퀴 돈 게 아닐 뿐.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는 건 
북극과 남극점을 잇는 중심축을 기준으로 한바퀴를 
돌았다는, 일반적인 기준으로 한 바퀴 돌았다
는 겁니다.)

















석궁.jpg

-100년전쟁당시 프랑스군이 영국군에 밀린 이유는, 
프랑스군은 활을 썼지만 
영국군은 강력한 석궁을 썼기 때문이다. 
이 석궁은 적 기사의 갑옷을 뚫을 정도였으며, 
기사 돌격 위주의 프랑스군이 
많은 패배를 한 이유였다.


이원복교수가 쓴 
'먼나라 이웃나라'의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제대로 완벽한 오류입니다.

첫번째, 
오히려 석궁을 쓴 쪽은 프랑스군이였습니다. 
거기에 자국 정규군보다는 

제노바 석궁수.jpg
용병으로 산 제노바 석궁수들이 위주였습니다. 
스위스의 가공의 사냥꾼 빌헬름 텔이 
석궁의 명수로 묘사되는 것만 봐도
스위스에서는 석궁이 보편화된 듯 합니다.

 

두번째, 
반대로 활(장궁)을 쓴 쪽은 
초반에 승리를 거둔 영국쪽입니다.
장궁.jpg

이 영국의 장궁은 
일반적인 활보다는 꽤 좋은 편이였으며,  
때문에 프랑스군의 석궁병보다는 
영국군의 장궁병들이 좋다는 평가는 
있었습니다만....

세번째, 영국의 장궁이 프랑스의 석궁에 비해 
딱히 그렇게까지 뛰어난 건 아니였습니다. 
사거리 측면에서 좀 이점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없었다고 하네요
영국이 우세했던것은 장궁 자체의 성능보다는 
원거리 공격을 
보다 전략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명 5라는 게임에서 고증을 좀 해놓았는데, 
석궁병은 전 문명 공통으로 사용하는 대신,
장궁병.PNG

영국만 이를 대체하는 장궁병을 사용하며 
사정거리가 더 깁니다. 



네번째, 애초에 석궁이든 장궁이든 철갑을 무시할 정도의 위력은 되지 않았습니다. 

갑옷.jpg

물론 활의 위력이나 맞는 거리, 갑옷의 방어력에 따라 
갑옷 쪽이 뚫리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는" 
화살이 갑옷을 종잇장마냥 푹푹 관통하고 
그런 정도는 아니였습니다. 
영국군의 화살에 기사들이 쓰러진 이유도 사실, 
기사 자신이 활을 맞아서라기보단, 
타고 있는 말에 맞아서인 경우가
더욱 많았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갑옷이 무효화되기 시작한 시점은 
총이 활성화된 이후에서야 입니다.

다만 역사 다큐멘터리 프로들을 보면 
석궁이나 활이 갑옷을 쉽게 관통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대부분 
근접 거리에서 직사로 맞춘 경우에서 입니다. 
방송 매체 특성상 약간의 과장도 더해졌고요..
실제 전투에서는 
꽤 원거리에서, 그것도 곡사로 쏘는 경우가 
대부분이였습니다.

물론 댓글에서 어느 분이 지적해주었다시피,
비록 관통은 되지 않더라도 그 충격만으로도
타격이 있기는 합니다. 
게다가 기사에 비해 궁수는 절대 다수인만큼
주구장창 쏴대면 확실히 그 효과는 있었을 겁니다.









일단 생각나는것만 몇 개 적어보았습니다.

혹시나 호응이 좋으면 이어서 2편도 써보도록 해보겠습니다.

추천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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