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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처용가의 처용의 배는 ?
경김 백촌파 종보 /2016년6월
/김 재영
“배들은 쇠로 연결되지 않았다. 인도 코코덧 섬유로 만든 끈으로 엮어놓았
을뿐이다" 오늘날 마르코 폴로는 믿을 만한 보고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배는 이주 좋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술한다
“배들중상당수가가라앉았다. 그들(선공)은조직이 말의 털처럼 보일 정도로
껍 질을 오랫동안 불에 담가 부드럽게 만든다 그런 다음에 거기서 실을 빼내고 그것으로 선판들을 꿰맨다. 이런 배로 바다를 항해한 것은 매우 위
험하다. 나는 인도양에 태풍이 이주 많이 불기 때문에 그 배들이 대부분 가라앉을거라는데 내기를건다" .1237년에 출판된 책의 삽화는 이 같은 고대 건조법으로 만들어진 이라크의 배를 보여준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런 건조법으로 만든배들은 신축성이 극도로 좋았으며, 물론 태풍에 부서지는 경우가 많았다I'바다의 신드바다”에서도 난파가 자주 발생한다 비교적 지주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포르투갈의 자료들이 이런 의견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즉, 마르코 폴로가아라비아 배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모 두 이런 제작방식이 아라비아 배의 탁월한 특정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그런 배는 유동성이 매우 뛰어나고 산호초에 좌초될 때도 고정된 선판을 가진 배처럼 빨리 부서지지 않으며, 충격을 유연하게 완화한다. 포루투갈' 시람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것이 아라비아의 지배적인 조선방식이었다. -생략-오만의 해안에서 오래된 항구의 잔해를 볼 수 있다. 중국,인도,홍해, 동아프리카로 가는 해로의 교차점인 이곳에 이주한사람들은 그리이스로부터 로마 사람들로부터 생선을 먹는자로 불렸다. 여기서 신드바드는 가져온 물건을 팔고 제 나라에서 원하는 물건과 교환했다. 내륙 즉 거대하고 황량한 해안 산맥 뒤에 자리한 돌이 많은 사막에는 오만의 군주 ,이맘, 칼리프의 부요한 도시와 상업 중심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중략-허무맹랑하지는 않다 페르시아 만의 바레인에 관해서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을 푸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이주 갚은 제독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산의 정상은 구름에 기 러져 있었다. 산을 오르는 일은 불 “그곳에는 아주 굵고 사람 100명이 그늘에 들어가 앉을 만큼 무성한 장뇌나무가 자란다. 장뇌가 물통에 모이고 거기서 점점 빽빽해진다 액체가 흘러나오지 않으면 그 나무는 말라죽는다. 같은 지역에 코뿔소도 있다. 코끼리보다 작지만 물소보다는 큰동물이다. 코에 1.5인치나되는긴뿔이 있다. 뿔은 아주 강하고중간이 갈라져 있다. 코뿔소는코끼리도무서워하지 않는다 .......... .말라카와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신드바드는 칼라셋 섬에 도착했다. 거기서 정향과 민트를 포함해 여러 가지 향료들을 샀다. 신드바드는 폭이 6미터 되는 거북을 보았고 ‘후추 집하장’을 방문했다.-중략-2월에 북동계절풍이 시작되면 아라비아 상인들이 잔지바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여름에 남서계절풍이 불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린다. 무역 한 시간은 충분하다. 이슬람교도들은 상인들과 함께 아라비아에서 동아프 피키로 갔다 잔지바르의 현 정부는 국가를 현대화할 자금이 부족하기 때문 이 오늘날까지 고대의 이국적인 향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1890년 비스마르크는 영국과 조약을 맺어 한때 독일 식민지였던 잔지바르를 헬골란트 섬과 교환했으며, 진지바르섬은1961년 탄자니아공화국의 일부로독립했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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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 실려 있는, 신라 헌강왕 때의 인물.나라가 태평을 누리자 왕이 879년에 개운포(開雲浦:지금의 울산) 바닷가로 놀이를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덮이면서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졌다. 갑작스런 변괴에 왕이 놀라 좌중에 물어보니 일관이 말하되 “이것은 동해 용의 짓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고 하였다. 왕이 용을 위하여 절을 짓도록 명한 즉, 바로 어두운 구름은 걷히고(이로부터 이 곳을 개운포라 하였다),동해 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으며 그 중 하나가 왕을 따라오니, 곧 그가 처용이었다. 왕을 따라온 처용은 달밤이면 거리에 나와 가무(歌舞)를 하였다 하며 왕은 그를 미녀와 짝지어 주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비형이라고도 불리기도 하여 비형랑과 연관된다는 주장도 있다.그의 용모에 대한 묘사를 근거로 그가 중동사람, 혹은 이를 모델로 한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다. 신현준? 참고로 이 학설을 최초로 제기하신 분이 나름대로 유명한 사람. 실제로 신라까지 아라비아 상인이 찾아왔다는 기록도 많아서 역사학계에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가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아랍 상인은 너무 비약된 주장이라며 처용은 단지 울산 인근의 호족 아들일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유시민이 썰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오만 문화부 장관과의 만찬 자리에서 장관이 신라라는 섬이 오만에 있다는 것을 근거로 처용이 오만 출신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나무위키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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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처용의 (이란)시대와 같은 9세기의 현재의 오만에서 (중동의 옆동네)중국으로, 신라로 오는 신드바드의 모험에 의한 (서적으로 남아있음)선박 이야기이다. 본 내용의 참고 도서는 항해의 역사 ,베른 하르트 카이 저, 박계수 옮김,북폴리오 출판사, 2006년도 발행이다. 118쪽~ 13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