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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 추진 최고책임자 존슨과 '장관 제안 회동' 앞두고 암살돼…
'경제적 안정→정치적 통합→낮은 수준의 통일 국가' 가능성
존슨 "한국 지도자들이 중간좌파 여운형 천거"
운명의 날, 그의 승용차 안에는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가방이 있었다. 자신의 정치적 포부가 담긴 인민당 관련 문건과 북한 쪽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서류철이 든 가방이었다. 미군정의 3인자이자 민정 추진의 최고책임자인 민정관 E. A. J. 존슨에게 보여줄 문건이었다. 여운형은 그날 오후 존슨의 집에서 비밀회동을 하기로 돼 있었다. 어떤 내용의 비밀회동이었을까? 존슨의 회고에 따르면, 미군정의 실권인 민정장관직을 여운형에게 타진하는 자리였다. 이정식 교수가 발굴한 존슨의 회고록은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과도정부는 야심적인 한국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었는데, 어느새 극우세력이 경무국과 법무부의 모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안재홍은 공식적으로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정부 내 우익 인물들의 협력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또 좌익 쪽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들이 한국 사람들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좌익은 거의 모두 무시돼왔다. 정부의 주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우리들은 과도정부 내에서 날로 자라나고 있던 우익 쪽의 영향을 막는 동시에 자유주의적인(liberal) 세력과 중간좌파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무엇인가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수 있는 한국 사람들과 의논했는데, 그들은 유명한 중간좌파의 지도자 여운형에게 정부의 중요한 자리를 맡기는 것이 현명한 책략일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우리 집으로 초청하기로 한 것이었다."(이정식, <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 , 서울대출판부, 2008)
한마디로 이승만과 한민당 등 극우는 세력을 키웠으되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부패 세력이고, 박헌영 등의 극좌와는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간좌파로 대중적 지지가 높은 여운형을 민정장관으로 임명해 과도정부를 원만하게 이끌어나가자는 것이 당시 미국의 입장이었다. 몽양이 지니고 있던 문서는 이같은 미군정의 구상에 신뢰와 확신이라는 덕목을 부여할 참이었다.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여운형이 암살되지 않고 민정장관이 돼 실권을 잡았다면 역사는 지금과는 판이한 행로를 걸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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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정부 반대세력 묶을 수 있었던 인물"
그러나 이 모든 가정은 여운형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됐다. 그의 죽음 이후 좌우합작운동은 추진력을 잃었고, 미소공위는 결렬됐다. 몽양이라는 거인이 일거에 스러지면서 이승만과 한민당의 단독정부 수립 계획은 날개를 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망 이듬해에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들어선 것은 우리 역사의 미래를 결정지은 크나큰 분기점이자 비극이었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여운형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세력을 묶어 세울 수 있는 중심축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좌파와 우파, 미국과 소련 군정의 최고위 인사들과도 교류가 가능했던 그의 사망 이후 단독정부 반대세력은 여러 갈래로 분열돼 힘을 상실했다. 해방 공간에서 주요 정치가들이 암살당했지만 여운형의 피살이 아쉽고 가슴 아픈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민족적 분열과 대결을 막는 가장 유력한 방파제의 붕괴를 상징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이 가져온 결과는 우리 역사가 보여온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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