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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경계에 관한 예종 시기의 기록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264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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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079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6/07/24 00:3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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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조 판서(工曹判書) 양성지(梁誠之)가 상서하였는데, 그 상서는 이러하였다.

"신은 엎드려 보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하고 관고(冠古)하신 자질로 선성(先聖)의 부탁(付托)의 중함을 받아서 대보(大寶)를 이어 등극하시어,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셨으니, 먼저 방납(防納)을 혁파하여 우리 일국(一國)의 복(福)이 되게 하셨고, 다음으로 도둑을 엄하게 다스리시어 우리 양민(良民)에게 은혜(恩惠)를 베푸셨으며, 역적(逆賊)을 평정하여 종사(宗社)가 견고해졌습니다. 황제의 명을 받아 조야(朝野)가 경사스러우니, 이는 신자(臣子)의 정백(精白)한 한 가지 마음을 바르게 하여서 휴덕(休德)을 이어받은 시기입니다. 신은 용렬한데도 특별히 선왕(先王)의 천지(天地)같은 사사로운 은혜를 입었으나, 조그마한 보답도 하지 못하여 전하에게 보답을 도모하고자 생각하고 있으니, 어찌 일찍이 잠시라도 품은 바를 늦추겠습니까? 삼가 관견(管見) 28가지를 조목별로 기록하여 올리니, 엎드려 생각건대 예감(睿鑑)을 드리워 살피소서.

1. 장장(長墻)에 대한 의논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본국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넓이가 몇만 리(里)이고, 호수(戶數)가 1백 만이고, 군사가 1백 만으로, 요(堯)임금과 아울러 섰고, 주(周)나라에는 신하가 되지 않았고, 원위(元魏)와는 통호(通好)하였으며, 풍연(馮燕)에는 정성을 바쳤고, 수(隋)나라는육사(六師)690) 가 대패(大敗)하였고, 당(唐)나라는 손님으로 대우하였고, 요(遼)나라는 패군(敗軍)하여 처참하였으며, 송(宋)나라는 섬겼고, 금(金)나라는 부모(父母)의 고향이라고 일컬었으며, 원(元)나라는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도 또한 삼한(三韓)이라 이르고 하하(下下)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동(遼東)의 동쪽 1백 80리는 연산(連山)을 경계로 하여 파절(把截)을 삼았으니, 성인(聖人)께서 만리를 헤아려 밝게 보시는데 어찌 토지가 비옥하여 가축을 기르거나 사냥하는 데 편리하다는 것을 모르고서 수백 리의 땅을 버려 그 곳을 비게 하였겠습니까? 진실로 동교(東郊)의 땅은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키어 양국(兩國)의 강역(疆域)을 서로 섞일 수 없게 하였으니, 만약 혹 서로 섞인다면 흔단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듣건대, 중국에서 장차 동팔참(東八站)의 길에 담장[墻]을 쌓아서 벽동(碧潼)의 경계에 이르게 한다고 하니, 이는 실로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바이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본국 평안도(平安道)의 백성 가운데 부역(賦役)에서 도망한 자가 저곳에 흘러 들어갔으니, 동쪽으로는 개주(開州)로부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대개 고을의 취락(聚落)이 서로 바라보이는데, 몇천만 명이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영락(永樂) 연간에 만산군(漫散軍)691) 은 모두 4만여 인이었는데, 근년(近年)에 요동(遼東)의 호구(戶口) 가운데 동녕위(東寧衛)에 십분의 삼이 살고 있습니다. 만약 장장(長墻)이 없다면 야인(野人)이 출몰(出沒)할 것이니 진실로 염려스럽고, 만약 혹 담장을 쌓는다면 도로 내지(內地)가 되어서 진실로 좋은 땅이 될 것이니, 그 유망(流亡)하는 자가 어찌 옛날보다 만만배(萬萬倍)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그 해(害)의 첫번째입니다.

만약 중국에서 연대(煙臺)를 벌여서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널리 행한다면, 이와 같다면 양국의 사이에는 다만 강 하나만이 한계가 될 뿐이니, 이름은 해외(海外)라고 하여도 실로 같은 안입니다. 저들이 어찌 천백 년 동안 우리 변방을 엿보지 않았겠습니까? 혹은 이익이 되기도 하고 혹은 해가 되기도 하여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해의 두 번째입니다.

장장(長墻)이 비록 요하(遼河)에서 압록강(鴨綠江)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염려할 만한 것이 있는데, 만약 벽동(碧潼)의 경계(境界)인 산양호(山羊湖) 사이에 이른다면, 이는 동한(東韓)의 땅이어서 저들의 봉역 가운데에 있으니, 사람에 있어서는 팔꿈치와 겨드랑이의 사이와 같고 인가(人家)가 울타리 안에 있는 것과 같아, 한쪽은 여기에 있고 한쪽은 저기에 있어서 저들의 주장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다만 장사(長沙)의 무수(無袖)692) 뿐이겠습니까? 이것이 그 해의 세번째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利害)는 삼척 동자(三尺童子)라도 알지 못함이 없습니다. 건주(建州)의 사람들은 형세상 반드시 와서 싸울 것이나, 가까이 들리는 일은 항상 그 실지를 잃음이 많을 터인데, 만약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는데도 태평하게 주청(奏請)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를 무능(無能)하다고 여기고 더욱 능욕(凌辱)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모름지기 급히 달려서 상주(上奏)하여야 할 것입니다. 연산 파절(連山把截)은 고황제(高皇帝)가 정한 바이므로 양국의 봉강(封疆)은 서로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벽동(碧潼) 이서와 의주(義州) 이북은 큰 강이 한계로 막혀 있어서 족히 염려할 것이 못되나, 이어 김보(金輔) 등 내사(內史) 족친(族親)을 보내어 들어가서 나라 사람들의 뜻을 아뢰어 제총(帝聰)에 이르도록 하여 요하(遼河)로부터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기까지 쌓도록 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청(請)에 따르지 않는다면 마땅히 자치(自治)하는 일이 더욱 엄중하게 하여 만세(萬世)토록 견고하게 할 뿐입니다.

신이 가만히 보건대, 평안도의 폐해로서 큰 것이 셋 있으니, 부방(赴防)이고 관부(館夫)이고 기재(騎載)하여 영송(迎送)·호송(護送)하는 데 지대하는 일입니다. 만약 벽동의 강 밖에다 또 장장(長墻)을 쌓는다면 북방(北方)의 수어(守禦)는 옛날에 비해서 가벼워질 것입니다. 만약 전과 같이 남쪽 경계의 군사로써 강변(江邊)의 땅을 지키게 한다면 백성들이 모두 요해(遼海)로 흘러 들어갈 것이니, 그 해로움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강 연안의 주(州)·군(郡)을 흩어서 적유령(狄踰嶺)을 관방(關防)으로 삼아야 할 것이니, 강계(江界)·위원(渭原)은 희천(熙川)에,이산(理山)·벽동(碧潼)은 운산(雲山)에, 창성(昌城)·삭주(朔州)는 귀성(龜城)에 옮기소서. 이렇게 하면, 강변을 부방(赴防)하는 폐단은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또 나라의 대소 사명(使命)은 모두 평양(平壤)에 이르러 감사(監司)에게 전부(傳付)되는데, 백성의 일은 도사(都事)로 하여금, 군사의 일은 우후(虞候)로 하여금 행하게 하고, 작은 일은 지인(知印)이 적간(摘奸)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한번에 관부(館夫)의 폐단은 없앨 수 있습니다.

또 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정조사(正朝使) 외에 사하사(謝賀使)·주문사(奏聞使) 등은 모두 따르는 자를 데리고 가므로 동팔참(東八站)693) 의 길에 과연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즉 한번 길에 3절(三節)의 사람이 부사(副使)를 대동하고 간다고 해도 불과 15인이고, 단사(單使)로 가면 12인이니, 이로 인하여 군사는 50명, 건량(乾糧)은 50두(斗)로 정하고, 말에 실리는 짐[馬䭾]은, 상절(上節)이라면 5, 중절이라면 3, 하절이라면 2로 하소서. 이렇게 한다면 기재(騎載)하여 영송·호송하는 데 지대하는 폐단도 또한 없앨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평양부(平壤府)를 승격시켜서 서경(西京)으로 하고, 한성부(漢城府)·함흥(咸興)·경주(慶州)·전주(全州)·개성부(開城府)와 더불어 육경(六京)으로 삼는다면, 우리 나라의 형세를 굳게 하고, 서인(西人)의 마음을 수습하고, 지도(地圖)를 나누어 형세를 고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병정(兵政)을 고쳐서 위(衛)로 나누어, 경기(京畿)·충청도(忠淸道)를 중위(中衛)로 삼고, 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를 후위(後衛)로 삼고, 평안도(平安道)·함길도(咸吉道)를 전위(前衛)로 삼고, 강원도(江原道)를 우위(右衛)로 삼고, 황해도(黃海道)를 좌위(左衛)로 삼으소서. 신의 전의 상소와 같이 함길도의 각 고을은 종친(宗親)에게 분사(分賜)하여 관향(貫鄕)으로 삼게 하고, 평안도의 각 고을은 공신(功臣)에게 분사하여 식읍(食邑)694) 으로 삼게 하면, 안팎이 서로 이어지고 양계(兩界)가 충실하게 됩니다. 또 옛날 강동(江東)과 같이 평양의 상류(上流)를 요해처(要害處)로 삼고 다시 큰 고을을 설치하면, 중병(重兵)이 유숙할 수 있고, 만약에 건주 사람이 이른다면 올 때는 접대하고 갈 때는 따라가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모련위(毛憐衛)·대마도(對馬島)의 사람은 더욱 후대(厚待)를 더하여 원교(遠交)를 하여서 완급(緩急)할 때 좌우(左右)에서 돕도록 하소서.


(중략)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06029_002
예종실록 6권, 예종 1년 6월 29일 신사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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