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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단편,브금]부활
게시물ID : panic_265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tarDream
추천 : 6
조회수 : 225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3/13 10:58:40
답답한 베이지색 천장과 인조 전등보다는 하늘이 보고 싶다. 새소리와 바람, 그리고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나의 달콤한 망상들. 나는 그것들의 잡히지 않는 공허함이 좋다. “베르사체 좋아하세요?” …무슨 엉뚱한 소리란 말인가. 서서히 시선의 초점이 잡히고 앞에 앉아 있는 여자가 보인다. 그녀는 루즈를 짙게 칠한 빨간 입술로 입 꼬리를 교묘하게 올려 미소를 짓는다. 진한 화장과 가식적인 표정. “저번에도 베르사체더니 오늘도 같은 상표 옷이네요. 취향이 그 쪽이신가 봐요?” “그런 가봐요. 우리 어머니가 베르베르 뭐라는 그 상표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네요. 저야 제 방 문고리에 걸려 있는 거 입은 거고.” 그녀는 조금 새침한 표정이 된다. 당초부터 이런 맞선 따위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닌가. 무대 위에서 어르신들이 조종하는 대로 우린 광대 짓이나 하면 되고. 그렇다 하더라도 손목에 찬 무거운 고급시계와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는 분명 귀찮은 분장이다. 앞의 여자가 얼굴에 바른 분가루도 건드리면 금이 갈 것만 같다. “어디선가 양갓집 감시인들이 주시하고 있을 테니, 딱 30분만 앉아 있다 나갑시다.” 화를 내려던 그녀가 나의 ‘그리고’ 란 말에 머뭇거린다. “날짜는 시연씨가 편하신 대로 잡으세요. 전 전혀 상관없으니깐.” 그 여자는 생각 이상으로 한심했다. 나 다음으로 세상에서 두 번째로 삶에 진지함이 결여되지 않았다면서야 어떻게 나 같은 놈이랑 결혼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식을 올리기 전에 정확히 세 번 만났지만 서로 대화한 걸 다 합쳐도 10분이 채 안될 텐데. 한편으로는 그렇다면 지극히 잘 어울리는 부부가 아닌가. “잘 자요, 부인.” 그녀는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나는 그저 생긋 웃으며 그녀의 침실 문을 닫고 서재로 갔다. 커다란 시베리아 허스키 한 마리가 책상 밑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나를 보더니 꼬리를 선풍기처럼 붕붕 흔들며 달려온다. “그래 그래. 오늘도 우리 꼬마랑 자려고 왔어.” 나는 개를 쓱쓱 쓰다듬어주어 엉킨 털을 헤쳐준다. 하지만 빗어놓고 보니 몰골이 더 엉망이 되어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느낌이다. 매번 미안함을 느껴 그저 먹이를 더 쏟아준다. 나는 부드러운 털을 베고 누워 개가 먹이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 것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갑자기 스스로의 삶이 측은해져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꼬마야,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사람 구실 못하는 놈이 됐을까.” 국내에서 제일 잘 나가는 K대기업 회장의 막내 아들이 바로 나다. 아버지는 언제나 나더러 정신 나간 녀석이라고 호통만 치신다. 경영학과를 나왔지만 전공은 평균 학점이 1.78, 부전공인 철학은 4.18로 가문 이름이나 축내는 쓸모 없는 놈이라는 욕만 호되게 먹었다. 결국은 이름뿐인 직책이지만 빈 껍데기 계열회사 몇 개를 맡겨놓고 괴롭히더니 정략 결혼을 시킨다. “그렇지만 그녀는 더 심하지.” 한참 스스로의 텅 빈 인생에 대해 회의를 느끼던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스스로에게 읊조린다. 아내는 막대한 재산을 지닌 신생 기업 사장의 딸로 이미 몇 차례 결혼한 전적이 있는 여자다. 무슨 재료를 만드는 기업이었는데 이번에 아버지의 기업이 개발하는 제품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부품일 테다. 야심만은 사장의 희생물인 딸은 여기저기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지우며 그녀 아버지의 사업을 번창시키고 있다. 갑자기 한숨이 나오며 난 속으로 기도한다. 훗날 두 번째 부인은 부디 평범한 사람이 되길. “개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내 부인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휙휙 저어 개를 멀리한다. 나는 낑낑거리는 개를 달래서 서재로 몰아 넣는다. 그녀는 내 얼룩덜룩한 흰색 반팔과 운동복을 힐끗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장 서자 그녀는 뒤를 바짝 쫓아오며 조잘거린다. “점심에는 집안 모임이 있잖아요. 정장 손질해 두었으니깐 서둘러 갈아 입으세요. 저녁은 L당 총재가 초대한 거 아시죠?” 어차피 몇 달 지나면 내 주위의 모든 이처럼 무심해지겠지만, 나는 지금 당장이 지독하게 귀찮아져 그녀의 말을 무시한다.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서 팔에 한아름 안고 다시 서재로 돌아간다. “여보,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늦는데…” 서재 문을 닫으려 하자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고, 나는 잠시 문으로 고개만 내민다. “어제 읽던 책이 있는데 끝까지 못 읽어서 지금은 곤란하네요. 집안 모임 정도는 당신 혼자서 가도 가족들은 그러려니 할 테니 부인 혼자 다녀오세요.” 부부간의 다정한 대화가 오가는 사이, 근처에 있던 가정부 한 명은 눈치를 보며 다른 곳으로 멀어진다. 관객이 사라지자 나는 이 무대에서 견딜 수 없게 내려오고 싶어진다. 그리하여 감동이 부재된 무대는 막이 내려져 서재 문은 그녀 앞에서 굳게 닫힌다. 눈을 떠보니 창문은 검게 물들어 있다. 어느새 밤이구나, 누워 있는 채로 창문에 수놓아진 반짝이는 별들을 하나 둘씩 눈에 담는다. 내가 일어난 것을 눈치챘는지 꼬마가 혀로 팔을 살짝 핥아준다. 그리고 그때였다, 누군가 책상 위에 앉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여자는 날 돌아보더니 녹아버릴 것만 같은 미소를 지었다. “헤세 좋아하세요?” 몽롱한 기분으로 일어서 그녀에게 다가간다. 저 여자가 저토록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나. 그녀는 내가 읽던 책을 펼친 채로 다리를 꼬고 있다. 마치 내 책상 위에 커다란 흰 나비가 앉아 있는 것 같다. “수레바퀴 아래서. 여러 번 읽었는지 손때가 많이 탔네요. 삶이 답답하다고 느껴요?” 여자는 소년처럼 짧은 머리를 긁으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개를 끄떡이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는다. “이 책 예전에 끝까지 못 읽었어요.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거 읽을 기회가 없었거든요. 나 여기서 이거 보고 가도 돼요?” 다시 고개를 끄떡이자 그녀는 잠자코 독서에 몰두한다. 나는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하얗게 빛을 내뿜는 그녀를 보며 다시 잠이 든다. 똑똑. 노크 소리에 잠이 깬다. 문을 열자 아내가 정장을 들고 서 있다. 그녀는 화려한 빨간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말끔하게 틀어 올린 상태였다. “오늘은 양보 못해요. 회사 간부들과 식사하기로 되어 있으니 같이 가요.”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가슴이 문득 철렁해진다. 어제 밤에 나는 어째서 서재에 있던 여자를 내 부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전혀 다른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여자였는데. 그리고 아내의 긴 머리에 비해 어젯밤의 여자는 흰 목이 훤하게 들어나도록 짧은 머리였다. “시연씨. 어제 밤에 혹시 서재에 왔었나요?” “제가 갔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문을 열어주었을까요?” 아내는 조금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대꾸한다. 그러고 보니 난 항상 서재 문을 습관적으로 잠그고 잔다. 꿈을 꾸었나, 반사적으로 책상 쪽을 보니 책이 펼쳐져 종이가 팔랑거리며 넘어가고 있었다. 몇 일만에 회사에 돌아가니 뜻밖에도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검고 큰 회전 의자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다. 주름진 눈은 모래 바람이 불어와도 깜빡 거리지 않을 것처럼 위압감이 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구나.” 난 고개를 떨궈 발끝만 바라본다. 아버지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명령하더니 내게 다가와 검은 서류철로 머리를 내리친다. 둔탁한 느낌과 함께 서류철의 금속 가장자리가 부서진다. “일주일 가까이 또 회사에 안 나왔다고 들었다. 결혼이라도 했으면 뭔가 생각이 생겨야 하는 거 아니냐? 넌 정말 한심한 녀석이다.” 모진 소리는 차곡차곡 내 가슴 속 깊이 차갑게 쌓인다. 이제 그만 저런 말에는 둔감해져도 될 나이인데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만 같다. 처음부터 난 이런 회사 따위는 맡고 싶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꾸지람은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나중에는 그의 목소리는 내 귀를 그대로 통과해 대기 중으로 흩어져 버리고 이런저런 작은 영상들이 주위에서 깔깔거린다. 꼬마가 뛰어가고 내가 그 뒤로 쫓아간다. 우리가 올라가는 언덕 위에는 어젯밤 꿈 속의 하얀 나비 소녀가 있다. 그녀는 삶이 답답하다고 느껴요? 라고 말하며 환히 웃는다. “행복한 결말은 아니구나.” 그녀는 안타깝게 한숨을 쉬며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다. 나는 눈을 비비며 소녀의 존재를 확인한다. 아내와 어쩐지 비슷하면서도 상반되어 보이는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책상 위에 앉아 있는 소녀는 아내에 비해 훨씬 어려 보인다. “누구지” 소녀는 날 아찔할 정도로 깊은 눈동자로 바라본다. 그리고 내 질문에는 개의치 않고 사뿐사뿐 걸어 다닌다. 원래 온순한 개이지만, 꼬마는 낯선 소녀에게 꼬리를 흔들며 그녀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돈다. “아저씨, 꼬마는 참 착한 개야.” 응, 나는 중얼거리며 해맑은 소녀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애초부터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는 소질이 없는 나였고, 여린 소녀가 내게 어떤 해를 가할 거 같지는 않았다. 또한 나는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순간이 좋았다. 내 마음이 호의로 가득해져 표정이 따스해지자 소녀는 꼬마에게 말하듯이 즐겁게 내게 말한다. “꼬마야, 내 이름은 시아야. 꼬마 집에는 책이 많아서 참 좋겠다.” “멍멍 멍멍멍 멍멍” 내가 꼬마 대신 멍멍 짖자 소녀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이 볼을 깨문다. “…뭐에요, 아저씨.” “꼬마가 그러는데 이거 자기 집이 아니라 주인님 서재래.” “어쩐지, 개 집치고는 크다고 생각했어. 꼬마 집은 그럼 어딨나요?” “원래 정원에서 키웠는데 어떤 마귀 할멈이 구박해서 서재에 숨겨뒀어.” 헤헤, 소녀는 웃더니 꼬마 등에 올라탄다. 아무리 큰 개라고는 해도 소녀를 업고 견딜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꼬마는 거뜬하게 돌아다닌다. “아저씨, 나 앞으로 여기 자주 놀러 와도 돼?” 그러렴, 고개를 끄떡이자 소녀는 갑자기 살짝 떠오르더니 내 키의 두 배가 넘는 높이의 책장 맨 꼭대기에 있는 책을 손으로 집는다. 그녀의 하얀 발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보지만 난 이상하다기 보다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햇빛에 눈이 간지러워 일어나보니 바닥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시선을 돌려 책장 위를 보니 제일 위 쪽 칸에는 책 한 권의 자리가 비어 있다. 흐음, 나는 기지개를 힘껏 피고 오랜만에 부인의 잔소리를 귀담아 듣고 회사에 출근한다. 사장실에는 대리인이 처리해놓은 서류가 정리되어 있고 내가 할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모처럼 이것저것 처리하고 업무를 살피자 회사 사람들은 당황한다. 갑자기 의욕이 살아나 무기력한 삶이 활기차다. 회사 일을 마치고 돌아와 서재에서 쉬고 있으면 어느새 소녀가 유령처럼 나타나 내게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다정하다. 그리고 꼬마와 나를 좋아하며, 서재 안의 모든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고 싶어한다. “헤에. 이거 아저씨가 그린 거에요?” “아아. 그거 그냥 심심할 때 끄적거려 본 거야. 어렸을 때는 삽화가가 꿈이었거든.” “상당히 잘 그렸는데. 개인 소장용으로는 아까운데요?” “…아버지가 알면 귀찮아져.” 그녀는 왜, 하고 물으려다 씁쓸한 내 표정을 보고 휙 고래를 돌려 버린다. “아저씨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인가 봐요. 아저씨는 아버지 얘기만 하면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면.” 그럴지도. 나는 중얼거리며 눈을 감는다. 그가 무서운가? 두렵다기보다는 내 삶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 같은 존재가 아닌가. 갑자기 고등학교 때 잠깐 가출한 기억이 떠오른다. 답답한 아버지 밑을 벗어나고 싶어 부산으로 도망가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한달 가까이 살았다. 하숙집 아줌마와 내게 일을 준 음식점 가게 사장도 친절했고, 북적거리는 시장의 활기찬 사람들도 좋았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는 나를 찾아냈고,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이 그가 시킨 깡패들에게 다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는 나에게 지극히 적절한 처방을 한 것이었다. 그 뒤로 나는 결코 그에게 뚜렷한 반항은 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언젠가 나는 내 자신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나도 아버지가 싫어요.” 눈을 뜨자 검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시아는 누워서 뻗은 내 팔에 머리를 기대며 안긴다. “어렸을 때는 많이 때리고 크니깐… 나를 죽였어요.” 나는 내 안으로 파고 든 소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유령 같지 않은 따스함이 피부로 전해진다. “아저씨가 부러워요.” 내가? 난 실소를 하면서 소녀를 돌아본다. 시아는 내가 퇴근길에 사온 인형의 머리를 빗어주며 흥얼거리고 있다. “아저씨는 책도 많고 꼬마도 있고. 행복할 거 같아요.” 아니, 별로 그렇지 않아. 내가 내뱉듯이 단호히 말하자 소녀는 아주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난 벌떡 일어나 창가로 휘적휘적 걸어가 희미하게 비춰진 나 자신을 바라본다. “나도 알아. 내가 이렇게 푸념하고 있을 때에도 남들은 날 부러워할 거라는 걸. 아니 정확히 지칭해서 내가 아닌 내 이름과 그에 따른 지위를.” 남자답지 않게 깨끗하고 흰 피부, 고급스러운 옷, 그리고 생기 없는 눈동자. “그런데 내 인생이라는 게 도무지 한번도 뭔가 뚜렷한 결정을 내릴 일이 없더구나. 내가 사라지고 그 위치에 마네킹을 앉혀놔도 달라질 일은 그다지 없겠지. 넌 내가 배부른 소리 한다고 생각하니? 아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세상에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 많은데 난 아버지 말대로 없어도 되는 한심한 존재에 불과할지도.” 시아는 내가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한참을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손에 들려 있는 인형보다 더 조각 같은 모습이다. 나는 이대로 세상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시간이 얼마가 지났을까, 그녀의 작은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이며 정적을 깨뜨린다. “…… 아저씨는 정말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그냥 괴롭힘 당해. 너무 나약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시아는 왠지 슬퍼 보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그녀는 뒷말을 흐려서 나는 제대로 들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 부인을 조심하세요. 그 여자는 위험하니깐.” 아내는 내가 부엌에서 식사를 하자 무표정하게 내 반대편 식탁에 앉는다. 그녀는 집안에서도 언제나 화장이 철저하다. 마치 갑옷을 입은 것처럼 여러 가지 보석들이 몸에서 위압적으로 번쩍거린다. “왠일이세요? 서재에 다른 살림 차린 줄 알았는데.” “동생이나 친척 중에 혹시 시아란 아이 있어요? 머리는 짧고 피부가 굉장히 하얀..” 갑자기 아내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의외로 감정적인 반응에 얼굴을 보니 안색이 무척 나쁘다. “그 이름 어디서 들었어요?” “그냥 우연히 알게 된 거에요. 왜 그러죠?” 전혀 모르는 이름이에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듯이 말하고 갑자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돌아간다. 화를 내는 아내를 보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어둠이 찾아온다. 그리고 소녀가 부드럽게 밤바람에 실려온다. 시아는 어느새 내 옆에 서서 물끄러미 나를 응시한다. “넌 누구지?” 나는 오래 전에 부서진 소녀의 마지막 잔상,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한때 죽었다가 아저씨의 호의에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어요. 그녀는 하하 웃으며 방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어떻게 죽었니?” 소녀는 갑자기 바닥에 추락하더니 몸을 부르르 떤다. 그리고 헐떡거리며 눈을 부릅뜬다. 숨이 막히는지 목에서는 꺽꺽 소리가 나며 피부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간다. 투명한 그녀의 피부에 점점 붉은 상처 자국이 생기는데, 거기서 피가 줄기를 이루며 흐르기 시작한다. 그녀의 곁에 앉아 손을 잡자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영상이 밀려온다. 필사적으로 도망가려는 소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버지에게 잡힌다. 그는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 거칠게 구타하며 강간한다. 이제 갓 아이 티를 벗은 소녀는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르다가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남자는 그녀가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폭행한 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전화를 해 자신의 사업에 대해 회사 직원과 상의한다. 주식값이 떨어졌어? 그는 얹잖아 하면서 한숨을 쉬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괜찮아, 앞으로 더 열심히 해 보자고, 자상하게 부하에게 실책을 탓하지 않는다. 통화가 끝나자 그는 쓰러져 있는 소녀를 발로 무자비하게 차며 기절할 때까지 때린다. 조금 후, 힘겹게 눈을 뜬 소녀는 마주 보이는 커다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낱낱이 살피게 된다. 점점 더 소녀의 눈에 분노가 차오르는 데도 불구하고, 거울에 비친 소녀는 놀랍게도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다. 깨진 이빨 조각을 뱉어내며 소녀가 신음소리가 섞인 울분을 토한다. “이렇게 사는 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너무 아프고 힘들어.” 그러자 거울 속의 소녀가 일어나 앉아 애원하는 자세로 간곡하게 말한다. -조금만 더 참자. 기회를 봐서 멀리 도망가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자. “하지만 나이도 어린 내가 어떻게 혼자 살 수가 있겠어. 그건 불가능해. 지금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그래, 차라리 아버지를 죽여버려야겠어! 잔인하게 내 고통을 돌려줄 꺼야!” -그…그건 안돼, 어떻게 그런 생각을… 언젠가는 다 괜찮아 질 날이 올 꺼야. 참고 견디자. “도대체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날 방해할 거면 네가 없어져버려!” 소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때릴 때 쓰던 방망이를 들어 거울을 내리쳤고,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방안은 산산조각이 난 유리로 뒤덮였다. “나는 희망, 꿈, 연민이에요. 본래 한 몸이었던 우리는 분리되어 지금 그녀에게는 야망, 복수, 살의만이 남았어요. 나는 아버지와 내 자신에게 살해되어 유령처럼 떠돌아 다니게 되었답니다.” 그 후로 영특함과 잔인함을 적절히 사용하여 소녀는 아버지를 조종해 회사를 확장한다. 늘어나는 재산과 점점 아름다워지는 자신의 얼굴을 기반으로 그녀는 과연 원하던 대로 강해진다. 그리고 몇 차례의 결혼과 이혼 끝에 국내에서 가장 큰 기업의 아들과 혼담이 오간다. “아, 그렇다면 지금 내 부인이…” “맞아요.” 갑자기 뒤에서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여 돌아보니 아내가 무섭게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다. 소녀와 아내가 함께 서 있으니 둘은 흡사하면서도 보색을 보듯이 대조적이다. “다른 사람에게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과거에요. 저 아이는 어디에서든 나를 귀찮게 구는군요. 시아는 어렸을 때의 제 애칭이에요. 그때 저 애를 몸에서 내쫓은 이후,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름으로 절 못 부르게 했죠. 그런데…” 아내는 의도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온다. 그녀의 가면 같은 얼굴은 도무지 그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이야기를 왜곡하다니 얄미운 아이군요. 꿈과 희망과 연민이라니, 크크큭.” 아내는 사납게 그르렁거리는 꼬마를 무시한 채 안락 의자에 다소곳이 앉는다. 나는 꼬마를 어루만져 줄에 묶어둔다. “이제 제 입장에서 회상해볼까요?” 극한의 정신적 압박 상태에서 그녀의 자아는 둘로 분열되었고, 그 결과 조금 더 약했던 그녀의 마지막 남은 양심은 몸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돌연 시연은 아버지를 죽인다기 보다 이용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미성년자인 그녀는 일단 후원자가 필요했고, 섣불리 살해했다가 돌아올 피해를 생각하면 오히려 아버지를 죽이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에게 갑자기 적극적으로 복종한다. “악마가 두려우면 그 이상의 악마가 되라는 말이 있듯이.” 아버지는 곧 그녀가 조언하는 대로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고 점차 확장된 회사는 신생기업으로 승승장구하며 번창했다. 방해물은 가차없이 제거했고 필요하다면 뇌물과 비리를 적절히 사용한다. 아주 교묘하게 시연은 최고의 위치로 한 걸음씩 올라간다. “첫 남편은 평판이 좋지 않았던 추악한 노인이었어요. 하지만 나이가 많았기에 전 막대한 재산을 노리고 결혼했죠. 남들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아주 만족스러웠어요.” 그런데 같이 지낸 이후로 노인은 심각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방안에 유령이 돌아다니며 자신을 위협한다며 극도로 불안해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 시연이 자다가 눈을 떠보니 자신의 형상이 노인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게 아닌가. 유령은 그녀를 보자 사라졌고, 짐작도 못했었지만 시연은 곧 유령이 예전에 분리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몇 일을 못 버티고 노인은 결국 심장 마비로 사망한다. “난 정말 싫었어! 차라리 아버지에게 맞았을 때가 더 나았어. 어째서 그런 심술궂은 사람과 결혼할 수가 있었지? 너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도 내친 늙은이였어!” 시아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치지만 아내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지막하니 말한다. “그래. 결국 너도 인정하듯이 너는 내 양심이 아니라 가식적인 존재였을 뿐이야. 네가 사라지자 난 비로소 거리낌없이 행동하게 된 것이고. 너 또한 망령이 되어 제약이 없어져 나름대로의 힘이 생기니 사람들에게 해를 가했잖니?” 아니야, 시아는 덜덜 떨면서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는 듯한 슬픈 표정이 된다. “아무튼 네 존재는 내게 있어 나쁠 것도 없었어. 경찰은 내 남편이 몇 번이나 죽었어도 날 전혀 의심할 수가 없었고 덕분에 난 빠른 시간 내에 재산을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로 불릴 수가 있었거든. 겉으로는 불쌍한 미망인 흉내를 우아하게 연기하니, 나와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이 세계 사람들은 내 결혼 전적을 오히려 일종의 수상 경력으로 취급해 주더군.” 시아는 바닥에 주저 앉아 원통해하며 아내를 노려보지만 아내는 개의치 않고 내게로 다가와 나와 시아가 잡고 있는 손을 냉기가 도는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난 그저 너무 기가 막혀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지켜만 볼 뿐이다. “그런데 이번만은 나도 있으나 없으나 한 돈 많은 기둥 서방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평생의 동반자로 고려하고 있었는데 네가 내 남편을 홀릴 줄이야 알았겠어? 차라리 보통 때처럼 조잡한 유령 짓거리나 하지 그랬어?” 처음으로 아내의 눈을 마주 본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글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다. 나는 흠칫 뒤로 물러 섰고 그녀는 그런 날 이제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당신 그거 알아? 정말 무능력하고 한심하다는 거.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바닥부터 기어올라 이 지위에 올랐을 때,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다 가졌던 주제에 되는 대로 살고 있었잖아. 그런데 그 동안 날 무시해?”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더니 내 흰 남방이 붉게 물들어 간다. 아내는 단도로 내 갈비뼈 사이를 한 번 더 깊숙하게 후린다. 시아의 울부짖는 소리와 꼬마의 짖는 소리가 점점 더 멀리서 들려오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시연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시아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정하게 말한다. “나의 일부분, 지금은 타인이 된 너는 죽었어. 내가 어떤 더러운 일이라도 하겠다고 마음 먹었던, 15살 때의 다락방에서 난 어떤 달콤한 꿈도 꾸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그런데 어떻게 희망, 연민.. 그리고 꿈인 네가 존재하겠니. 넌 무존재, 오래 전의 헛된 망상일 뿐이다.” 아내는 칼에 묻은 피를 내 옷에 닦으며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카페트에 불을 붙인다. 타는 내음이 퍼지면서 바닥에 점점 불이 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 시야가 회색의 짙은 연기로 혼미해진다. “또 죽었다니 이번에는 아깝군. 하긴 시연이 네가 조신하게 지낼 거라는 상상도 터무니 없지만.” 사내는 담배를 피우며 딸과 함께 커다란 욕조 안의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시연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쓰다듬는 대로 가만히 있다. 남자는 짧아진 담배 꽁초를 재떨이에 털며 와인 잔을 들어 딸의 잔과 쨍 부딪친다. “너는 내게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후후..” 시연은 아버지에게 잠자코 안겨 기묘한 미소를 짓는다. 난자는 시연의 입술을 쓰다듬다가 갑자기 사납게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한다. 욕조 안의 물은 삽시간에 붉게 물든다. “무… 무슨…” “아버지. 좀 더 잔인하게 죽이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워.” “…와인에… 뭘 넣은 게냐…” 시연은 아버지의 죽음에 가까워지는 중얼거림을 무시한 채 남은 와인을 음미하며 핏물 속에서 노래를 흥얼거린다. 언뜻 돌아보니 아버지는 죽었는지 눈이 하얗게 뒤집어져 있다. 물은 점점 식어가고 시연은 시체에는 흥미를 잃고 일어서려 한다. 그런데 다리가 어쩐 일인지 움직이지 않는다. 갑자기 수도꼭지가 돌아가면서 물이 쏟아져 욕조의 수위가 높게 차오른다. 물 속에서 석고마냥 흰 팔이 나와 시연의 목을 붙잡고 붉은 피바다 속으로 잡아 당긴다. 첨벙거리며 발버둥치는 시연과 죽은 아버지의 시체 사이의 수면 위로 그녀와 똑같이 생긴 시아가 고개를 내민다. “미쳤구나!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시아는 무표정한 눈으로 입술을 깨물며 당황한 시연을 욕조 속으로 끌어들인다. 세차게 저항하던 여자의 몸은 점차 얌전해지며 이윽고 긴 검은 머리카락이 기괴하게 엉킨 몸이 떠오른다. -아저씨, 일어나봐요. 희미한 목소리가 먼 곳에서 나를 부른다. 점점 밝아지는 시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나는 헤죽 웃어 보려고 하나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 미동도 할 수가 없다. -다시 태어나면 뭐하고 싶어? “…그냥 내 의지대로 살고 싶어. 누군가에게 휩쓸리지 않고… 내 선택에 내가 책임을 지고 싶어…” -그럼 그렇게 하세요. 아저씨, 먼 곳으로 가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거야. … 잘 지내야 해요!! 시아는 갑자기 몸을 돌려 어디론가 뛰어간다. 같이 가자, 라고 말하며 나는 손을 뻗는데 뭔가 부드러운 털이 만져진다. 눈을 뜨니 꼬마가 혀로 내 얼굴을 핥고 있다. “아아. 침 범벅이네..” 몸을 일으키려는데 가슴이 순간 날카롭게 아프다. 피가 흠뻑 묻은 손으로 남방을 헤쳐 보자 이상하게 아까 칼로 찔린 곳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 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고개를 들자 저택이 무서운 기세로 불타고 있다. 분명히 아까 서재에서 기억이 끊겼는데 지금은 정원의 큰 나무 아래 누워 있는 것이었다. 꼬마가 낑낑거리며 내 다리에 몸을 문지르는데 개 줄을 이빨로 끊었는지 목에는 아직도 끈이 엉켜있다. 고리를 풀어주면서 나는 잠시 망설인다. -다시 태어나면 뭐하고 싶어? 하얀 소녀의 신기루가 잠시 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멀리서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깊게 심호흡을 한 후, 꼬마에게 가자! 나 자신 조차 깜짝 놀랄 정도의 큰 소리로 외친 후 뒤로 난 작은 문으로 빠져나간다. 꼬마는 힘차게 내 뒤를 쫓아온다. 주머니에는 들은 돈이 한 푼도 없고 더 이상 나는 가문의 이름을 빌려 쓸 수도 없다. 하지만 미친 듯이 웃음이 터지며 가슴이 간지럽게 벅차올라 양팔을 길게 날개를 펼치듯이 뻗어본다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Bob_cat 님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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