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조례를 강요하지 마세요 “양심을 위한 실천” 국기 경례를 거부한 민족사관고 학생의 편지…의미도 모른 채 외워온 맹세문, 국가가 왜 모임마다 끼어들어야 하나 ▣ 이찬수 민족사관고등학교 대의원회장 “이찬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았으므로 경고함.” 지난 9월21일 학생자치사법위원회의 주관으로 매주 열리는 학교의 학생자치법정에서 나는 단상 위 피고인석에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정 태도 불손 주의를 받았습니다. △ 아직도 청소년들은 국기에 대해 맹세를 하고 국가를 부르는 행위의 당위성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접하지 못하고 있다. 10월27일 서울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청소년특별회의 정책과제보고대회에 참석한 한명숙(맨 앞) 총리와 청소년들.(사진/ 연합/ 하사헌 기자) 내가 국기 맹세를 하지 않기 시작한 지 근 여덟 달 만에 처음으로 직면한 일종의 작은 불이익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학생 생활 규정에서 ‘청소 규정 위반’에 대한 벌점을 받기 위해 서게 된 학생법정에서 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저 높은 곳에 군림하시는 선생님? 초등학교 시절에는 바른생활 교과서부터 도덕 교과서까지, 표지를 넘기면 매끈매끈한 종이에 컬러로 인쇄된 태극기와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바른생활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처음 본 날을 떠올려봅니다. ‘자랑스러운 태극기’ ‘무궁한 영광’ ‘몸과 마음을 바쳐’와 같이, 초등학생이 이해하기도 힘든, 그리고 평생 쓸 일이 없어 보이는 단어들을 보면서 들었던 섬뜩한 기분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나는 맹세문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외우면서 자랐습니다. 아무도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제작된 배경, 그 의미 그리고 그것을 외우는 이유 등 무엇 하나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중학교의 도덕 시간에는 국기를 그리는 방법을 배웠고, 애국가를 외웠습니다.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국가의 가치는 무엇인지, 민족이란 무엇이며, 민족애란 무엇인지, 애국심이란 무엇이고 애국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한 번도 토론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경건한 마음으로, 부동 자세로, 모자는 벗고, 반드시 오른손을 가슴 약간 아래쪽에 얹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애국가는 엄숙한 마음가짐으로 무조건 크게 불러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선생님들이 화를 낸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매주 월요일 1교시에는 수업 대신 ‘애국조례’가 있습니다. 나는 두루마기까지 갖춘 예복 정장을 입고 체육관으로 갑니다. 행정위원장(학생회장)은 도착해서 정신없이 떠들고 있는 우리를 정돈시키고 줄 맞춰 세우느라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나는 무질서도를 낮추려는 노력은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결국 사회의 종말만을 앞당길 것이라고 말한 제러미 리프킨의 <엔트로피>가 주는 가르침을 생각해봅니다. 수백 명의 에너지를 소모해가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요? 줄이 맞춰지고 나면 의례단과 함께 선생님들이 입장합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선생님들은 단상 위에 준비된 의자에 자리를 잡습니다. 우리도 그냥 바닥에 앉으면 안 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만 서 있는 게 억울해서가 아니라, 당연히 앉아도 되는 것을 왜 굳이 서야 하는 것일까에 대한 고민입니다. 그렇게 키 높이만큼이나 더 높은 곳에, 그리고 몇십m 떨어진 곳에 군림하듯 앉아 있는 선생님들을 우러러보고 있으면 그 사이에 권위주의라는 커다란 장벽이 쌓인 느낌이 듭니다. 그 장벽을 사이에 두고 침묵 속에서 선생님의 연설을 그저 듣고만 있어야 하는 수동적이고 일방향적인 의사소통에는, 조직의 유대감이 존재할 공간이 없습니다. 게다가 ‘애국’이라는 단어가 그 좁은 공간에 끼어들어 조례의 존재 이유를 더욱 불분명하게 만듭니다. ‘인터넷 조례’는 어떨까 선생님들이 모두 앉으면 조례의 첫 번째 순서로 국민의례가 진행됩니다. 행정위원장의 “국기에 대하여 경례” 구호에 맞춰 손이 익숙해진 대로 가슴으로 움직이려 합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손을 가슴에 올리지 않습니다. 내 손을 막은 것은 종교적 신념도 국가에 대한 반감도 아닙니다. 그 느낌을 구체화하기는 힘들지만 굳이 말하자면 모두 다른 각자의 국가관을 하나로 만드는 이 의식에 대한 두려움이고, ‘우리의’ 모임에 염치 없이 끼어든 국가라는 존재에 대한 서먹함입니다. △ 학교의 모든 행사 앞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맹세)가 끼어든다. 3월1일 민족사관고 개교 10주년 기념식 모습.(사진/ 연합/ 김영인 기자) 생각해보면 ‘우리끼리’의 모임에 생뚱맞게 국가가 끼어든 것은 우리 학교가 가진 특수성 때문은 아닙니다. 학교는 우리의 의식이 채 자라나기도 전에 우리에게 국가주의를 강요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입학식과 졸업식을 비롯해 운동회, 학예회 등 각종 우리 모임의 시작에는 늘 국민의례가 있어왔습니다. 심지어는 학생회와 학급회의에까지도 국민의례가 끼어들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어린 시절부터 익숙해져서 ‘우리’의 모임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국가를 부르는 행위의 당위성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황지우 시인의 시를 읽으며 영화 시작 전에 애국가를 불렀던 시절을 ‘암울한 시대 상황’으로 배우는 우리입니다. 단적으로 신문 동아리 모임에서 제작 회의 전에 국민의례를 하자고 하면 모두가 장난으로 여기고 웃을 것입니다. 또한 나는 애국조례를 개인이 자아의 정체성을 잃고 서로 완전히 의존할 수 있도록 외부의 권력과 일체화하는 ‘공서’(共棲·symbio sis)의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학교 한글 교지 <불휘기픈나모>의 논설기자로 이런 의식의 본질과 비효율성을 비판하는 ‘애국조례 없애자’는 기사를 썼습니다. 지금 다시 보면 어디 감추고 싶을 정도로 부족한 글이지만, 대안으로 제안한 이른바 ‘인터넷 조례’는 새로운 조례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일상적인 경험담부터 삶에서의 깨달음, 학교의 문제점, 건의사항 등을 올리고, 그런 의견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진다면 학교 구성원 사이의 유대감도 깊어지고 학교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교와 학생 간 의사소통 부재 나는 학생회 법제화와 같은 전국적 인권운동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이번 학기 학생회 선거에 출마해 대의원회장(입법위원장)에 당선됐습니다. 학생회 일을 하면서 학교와 학생 간의 의사소통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학교는 일방적으로 정책을 정해서 통보하고, 학생은 학교가 하는 일이라면 이제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이런 의사소통의 결여는 법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학생 인권과 교육적 목표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학생회·학교·학부모회 간 관계의 바람직한 모델을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나는 자유를 사랑합니다. 나는 결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사람들보다 나라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름’의 문제입니다. 나는 자연스러운 관계 속에서 양심이 시키는 대로 나라를 사랑하고자 할 뿐입니다. 모두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할 때 조용히 손을 내림으로써, 그리고 대의원회장으로서 대의원회를 진행하며 국민의례를 말없이 건너뜀으로써, 나는 이런 믿음을 소극적으로나마 실천으로 옮깁니다. 과연 우리 후손들이 쓰는 역사는 나와 같은 사람을 어떻게 평가할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