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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박사와 이휘소박사의 교통사고엔 공통점이 있다.
게시물ID : sisa_266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lueWisdom
추천 : 3/11
조회수 : 834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07/01/21 14:07:12
황우석박사 탑승차량에 대형 시멘트조각 날아들어(대체)
 
 
[연합뉴스 2006-04-08 11:39]  
 


(성남=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 고속도로에서 황우석 교수 탑승차량에 대형 시멘트 조각이 날아들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8일 경기지방경찰청 고속도로 제1지구대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30분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 서울요금소에서 부산방향으로 1㎞ 떨어진 경부고속도로상에서 황 교수가 동승한 가운데 부산 방향으로 진행하던 그랜저 승용차(운전자 한모.38)에 40㎝ 크기의 대형 시멘트 조각이 날아들었다. 

  

이 시멘트 조각은 황 교수 차량 밑으로 굴러들어가 차량과 바닥 사이에 끼었으며 운전자는 급정거를 시도했지만 차량은 40m 가량을 더 진행한 후에 멈춰섰다. 

  

경찰조사 결과 이날 사고는 반대편 차선에서 서울로 향하던 광역버스(운전자 정모.43)가 시멘트 재질의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으면서 파편이 튀어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은 "황 박사는 매우 놀란 표정이었지만 다친 곳은 없었고 지방에 일정이 있다며 이 사고가 알려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남기고 급히 현장을 떠났다"고 말했다. 

  

그는 "시멘트 조각이 간발의 차이로 차량 앞에 떨어졌는데 조금만 차량이 속도를 냈다면 차량 정면에 부딪히며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사고원인을 제공한 광역버스 운전자를 상대로 졸음운전 여부 등을 포함한 정확한 사고원인을 조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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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반 쯤 경부고속도로 서울 요금소에서 부산 방향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경부고속도로 상에서 

황우석 박사가 탄 그랜져 승용차에 대형 중앙분리대 시멘트 파손물이 날아들었습니다.

40센티미터 크기의 이 시멘트 조각은 황 박사 차량 밑으로 굴러들어가 차량과 바닥 사이에 끼었으며 

운전자인 38살 한 모 씨가 급정거를 시도했지만 40m 가량을 더 진행한 후에 멈춰섰습니다. 

경찰은 황 박사가 매우 놀란 표정이었지만 다친 곳은 없었고 지방에 일정이 있다며 급히 현장을 떠났

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조사 결과 사고는 반대편 차선에서 서울로 달리던 광역버스가 시멘트 재질의 중앙분리대를 들이

받으면서 파편이 튀어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네이버



 

 

이휘소(미국명 Benjamin Lee)는 1935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경기고 2학년(1952년)때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 서울대 화공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재학중인 54년 미국으로 갔다. 도미후 물리학으로 전환한 이휘

소는 56년 마이애미대학 물리과를 졸업하고 58년 피츠버그대학에서 석사학위를 60년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박사는 약관 28세에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65년 뉴욕 주립대학으로 옮긴 이 박사는 

74년부터 사고를 당할때까지 시카고대학 이론물리부장을 맡아 왔는데, 당대 핵물리학의 최고 이론가로 

인정받았다. 


이 박사는 아직까지도 과학계에서 한국인중 유일하게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교통사고사가 의문사로까지 일컬어지고 있는 것은 그가 박정희의 핵개발 강행과 미국의 저지공작이 

첨예화된 시점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휘소 박사의 사후 68일 만인 1977년 8월 24일 이박사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했다. 

추서이유는 "우리나라 과학기술발전에 진력" 했다는 것이다. 연구생활 20년을 줄곧 미국에서 활동

한 이박사가 '우리나라'를 위해 '진력'했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사고 개요 (미국 경찰청이 보관중인 당시 사고 기록임) 


●사고발생 시간: 1977년 6월 16일 오후 1시 22분 
●경찰 구조대(케워니시의 SHEFFIELD RESCUE) 도착시간: 1시 38분 
●가해자 
이름: 존로서(LEWIS. JR JOHN LOTHER, 35년 7월 27일생, 운전면허번호 261-50-1680) 
주소: 아이오와주 데스모이니스(DES MOINES)시 501-7 
직업: 아이오와주 포리스트 애비뉴 116에 주소를 둔 회사(TRANSOL CO.) 운전수 
●가해차: 74년에 만들어진 대형트럭(CA213HP103431, 모델 FREIGHTLINER) 
●피해차: 이휘소박사(35년 1월 1일생, 일리노이주 글린엘렌시 쉐필드레인 251)는 75년에 만들어진 

다트(DART) 승용차를 몰다 변을 당했다. 
이 박사 차는 운전석과 앞 트렁크가 완전히 부서져 복구비 2천 8백 달러에 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사고당시 동승자: 부인 마리안느(42세)와 아들 죠푸리(14세), 딸 아이렌(12세)이었다. 
*이들은 당시 잠을 자고 있던 상태였으며, 사고후 이박사, 가해자와 함께 케워니 시립병원으로 옮겨

졌다. 



다음은 당시 충돌의 순간이다. 


"...세계 최대 입자가속기가 있는 페르미연구소에서 서쪽으로 약 2백 Km 떨어진 일리노이주의 80번 

고속도로. 길은 한산했지만, 안개가 끼고 노면이 젖어 있었다. 시속 88Km 속도로 달리던 대형 트럭

이 갑자기 소리를 냈다. 그러나 운전사는 타이어 펑크를 알아채지 못했다. 


차가 오른쪽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운전사는 바로잡으려 했고, 트럭은 다시 왼쪽으로 미끄러

졌다. 중앙분리대를 넘었고, 서쪽으로 달려오던 승용차와 충돌했다. 이휘소는(달려오는 트럭을 

피하려고) 최대한 오른쪽으로 피하려 했다고 동승한 죠푸리가 진술했다.(여기서 함께 동승했던 부인 

마리안느는 바퀴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트럭 바로 뒤에서 차를 몰았던 목격자 반리스는 이렇게 

진술했다. (사고트럭은 머리부분인 견인차와 몸퉁부분인 부수차 두덩이었다.) 견인차가 오른쪽으로 

구부러지고 부수차는 왼쪽으로 틀어졌다. 트럭은 중앙분리대를 넘어갔다. 트럭은 승용차와 충돌하는 

순간 왼쪽으로 꺾여졌다. 사고트럭 목격자의 차는 약 55마일 속도로 비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사고현장의 중앙 분리대 
동행 2차선, 서행 2차선인 현장 고속도로의 중앙분리대는 양쪽 차선을 합한 것만한 4차선 정도

(약 20미터)로 한가운데 깊이가 170Cm, 그곳으로부터 양쪽 차선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중앙분리대는 

잔디와 잡초로 우거져 있다. 


●사고현장에서의 특이점 
첫째, 분리대를 넘기 시작한 지점과 충돌지점이 직선 21미터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왜 그렇게 큰 

각도로 핸들을 꺾은 것일까? 
둘째, 분리대가 20미터 정도 되는데도 왜 사고 대피지역인 분리대를 따라 달리다 멈추지 않고, 

사고가 당연시되는 서쪽 차선으로 올라섰을까? 
셋째, 서쪽 차선으로 넘어섰다 하더라도 왜 하필이면 길 가장자리로까지 피한 이박사 차와 충돌

했을까? (최고깊이 170Cm의 중앙분리대를 넘는 과정에서 속도가 당연히 감소하였을 것이다.) 




●사고현장에 관한 두가지 견해 


●단순사고사 
누군가가 살인을 음모했다면 그토록 '명중'이 어려운 곳을 선택했겠는가에서 출발한다. 즉 도로구조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승용차를 가늠해 살인하기엔 적당치 않다는 것이다. 같은 차선의 뒤에서 혹은 

다른 주택가나 간선도로에서 얼마든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텐데 성공률이 극히 적은 그곳을 선택

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서로 맞은편에서 달리는데 길고 긴 고속도로에서 언제 

어디에서 이박사 차가 다가오는지를 가해자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등이다. 

●살인목적 
누군가가 이박사를 살인할 목적을 가졌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대중적인' 교통사고로 가장 좋은 

곳은 가장 의심받지 않는곳(성공률이 적어 보이는 곳)인데, 그 현장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또 사고

현장과 약도를 볼 때 트럭운전수가 충분히 충돌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을텐데, '기어이' 충돌한 점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운전중인 가해자가 이박사 차를 발견하는 것은 이박사를 추적해온 제 3의 인물

로부터 무전등으로 충분히 정보제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 교통사고사에 대한 의문점 
첫째, 박정희가 미국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핵개발과 관련한 도움을 받으려고 이박사와 비밀접촉, 

귀국을 종용했으며, 이 박사도 '결심'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둘째, 사고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즉 사고를 알린 로이터통신의 보도가 "일리노이주 남부에서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 전부였고, 그후 누구도 상보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연 교통사고가 있었

는가에서부터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미국 고속도로는 중앙분리대가 4차선 정도나 되는데도 "맞은 편에서 달려오던 바퀴가 

하나 빠져 이박사 차 앞을 때렸다."(동승한 부인 마리안느의 주장-과학동아-91.6) "바퀴가 빠진 

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해 당했다."(78년 당시 최형섭 과기처 장관의 국회 답변) 는 등의 불확실하

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들만이 오가고 있다. 


●박순희(고 이휘소박사의 어머니) 여사와의 인터뷰 내용('말', 1993년 11월호) 
-박대통령이 이박사의 아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이박사의 아들이 박대통령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

다는 사실은 확인된 것입니다. 박대통령과 이박사 간에 직접 편지를 주고 받진 않았습니까? 
"주고 받았지요" 
-그 사실을 어머니께선 어떻게 알고 계신가요. 국가원수와 핵물리학자 간의 서신왕래는 극히 비밀

스러웠을텐데요.? 
"사고나기 1,2년전 이박사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속에 그가 박대통령에게 보낸 답신의 사본

을 동봉했더군요. 편지지 2장으로 영어와 한글을 섞어 썼는데, 내용은 '지금은 아직 귀국할 단계가 

아닙니다.'였지요. 나에게 '이 편지는 역사적인 것이니 어머니 혼자만 간직하시고 절대 비밀을 지켜

주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사본을 아직 간직하고 계십니까? 
"식구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내 책상서랍에 깊이 넣어 두었는데 이사다니면서 분실해 버려 안타깝게 

생각해 왔습니다." 
-비밀이 탄로날 위험이 있을텐데 왜 이 박사가 어머니에게 사본을 보냈을까요? 
"그인 나에게만은 뭐든지 알려줬으니까요." 
-그렇다면 한국의 핵개발 문제와 관련한 언질도 있었습니까? 
"내가 물리에 대해선 문외한이니까 딱히 그에 대해 이야기는 없었습니다만..... 한가지 알 수 없는 

대목이....." (약간의 부연을 붙이자면 이휘소박사가 동경대학에 강의하러 갔을 때 박여사는 동경에서 

아들을 만났다 한다. 그 자리에서 정치적인 이야기가 오간 끝에 이박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밑도 끝도 없이 이러는 거예요. 
'어머니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애국잡니다.' 그말이 내 기억속에 아직 또렷한데,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이가 나에게 어떤 암시를 줬는데, 

내가 모르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 왜 그 말이 무슨말인지 추궁하지 않았는지 후회스럽습니다." 
-사고 나기전에 이박사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습니까? 
"73년 동경에서 만날 즈음엔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더군요. 내가 왜 가까운 곳까지 왔으면서 한국에 

오지 않느냐고 했더니 '갈 사정이 못된다'면서 나더러 동경으로 오라더군요. 74년 서울에 왔을때

에도 호텔에서 자지 않고 미 8군 영내의 미 대사관저에서 잤습니다. 


●강주상 교수의 '바퀴론' 
이휘소 박사의 제자였던 고려대 강주상 교수는 이박사의 죽음과 관련 한가지의 판단과 두가지의 

사실로 의문사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판단은 이 박사가 핵개발과 직접 관련이 없는 순수 이론물리학자였고, 박정희의 핵개발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핵개발을 도우려다가 죽었다는 주장은 틀리다는 것이다. 
두가지 사실은 첫째는 박정희가 이 박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친서를 보낸 사실이 없음을 부인 

마리안느를 통해 확인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고 직후 스스로 사고현장에 가본 한 목격자

로서의 이런 증언이다. 
"맞은 편에서 오는 대형트럭의 바퀴 한 개가 떨어져 나와 중앙 분리 잔디를 건너서 일행의 차를 

덮쳤다. 이 바퀴는 앞 창 유리를 지탱하는 운전석쪽의 철제 창틀에 부딪쳤고, 창틀은 운전사인 

이박사의 뇌를 강타하였다." 
강주상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12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차량을 반대쪽 방향에서 비슷한 속도로 달려오면서 

고의로 바퀴 한 개를 떨어져 나가게 하여 상대방 차를 어떻게 명중시킬 수 있겠는가? 
아무리 불순한 의도로 누가 일부러 일으킨 사건이라도 그 성공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결국 불행

하고도 우연한 단순사고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 강주상 교수의 이런 주장은 당시 미국 경찰청이 보관중인 사고기록과 현저히 다르고, 편지 교신

여부는 이박사의 어머니 증언이 결정적이다. 


●이동원(박정희 시대 외무부장관과 국회 외무위원 역임) 
이동원씨는 92년 10월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고려원)를 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핵물리학자 

이휘소박사의 교통사고가 박정희의 핵개발 강행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방해공작 사이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적었다. 

다음은 1993년 6월 '말'지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증거가 있나? 
"단순사고 인지 살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게도 확실한 물증은 없다. 그러나 사고당시의 정황

으로 볼 때 나는 의문사쪽으로 생각한다." 
-확실한 물증이 없다면 어떤 흔적이라도 있는가? 
"흔적은 있다. 미국이 핵개발에 대해 상당한 압력을 가했는데도 박대통령은 핵개발을 위해 그 분야

와 관련된 해외 한국인 학자들을 스카우트하는 공작을 했다. 이 공작에는 많은 자금이 동원됐는데, 

원자력분야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분들도 다 그렇게 해서 들어왔다. 이박사는 그 분들보다도 

더 박정희의 표적이 됐는데, 미국의 기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오지 못했다." 
-박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이박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없다. 하지만 나는 당시 박정권 권부 깊숙한 부분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안들어도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있었다. 


●1977년 6월 30일 국회경과위에서 신민당 고흥문의원의 제기 내용 
당시 고흥문의원은 이박사의 사고기사를 보고 어떤 직감이 왔었다고 회고했다. 
"이휘소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을 적에, 이박사가 노벨물리학상이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핵이론에 가장 귀중한 존재로 있었다는 점에서 본 위원은 여러 가지 지금 

우리나라 사태로 보아서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지 않느냐, 우리

나라가 핵을 개발하게 될 경우 어쩌면 제일 먼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박사가 아니냐, 여기에 

어떤 흑막이 게재되어 있지 않느냐..."(국회 속기록 인용) 

고 위원의 질문에 최형섭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의 답변은 "바퀴빠진 트레일러에 받쳐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것 이외에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최장관은 의미심장한 답변을 하였다. 
"이박사를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이름이 날 만한 학자는 거의 미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 사람들에 대해서 현지에서 무슨 보호를 한다든가 이러한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마는 저희들하고 긴밀한 연락을 해서 거기에 있으면서 저희들을 도와주는 사람과 또 한국에 나와서 

저희들을 도와주는 이러한 두 그룹으로 나뉘어 저희들과 긴밀한 협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자력분야에 있어서도 여러 최신 지식의 축적과 공급에 비교적 긴밀한 연락 아래 피차간에 협조를 

하고 있습니다." (-국회 속기록 인용-) 


●1977년 7월 5일 '조선일보' 보도 내용 
"....벤자민 리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상보가 없다..... 며칠전 국회에서 단순한 교통사고냐는 질문이 마침내 나왔다. 1968년 미국시민이 

되었으나 4년전 고국을 다녀간 뒤부터 '이제부터는 조국을 위해서 일할때'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이

었으며 그가 내년 4월 귀국할 것으로 국내 학계에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소립자 이론이라지만 그것은 최근 연구 진척중이고 그가 도달한 이론에선 핵물리학 관리쯤은 이미 

마스터한지 오래라는 것, 순수한 이론 물리학자였던 미국의 오펜하이머가 사실상 2차대전중 원폭

제조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는 쉽게 알 수 있다. 재미 2백50명

의 과학자들을 위해서라도 우발사고인지 분명해져야 한다." 


●이휘소박사-박정희간의 교신 
이휘소 박사의 유일한 제자이자, 고대 물리학과 강주상 교수는 "한가지 기억나느 바는 5년전 자녀

들이 우표수집에 한창 취미가 있을 때 선생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박정희 대통령께 편지를 올려 

한국우표를 선물로 받았고......" ('재미과학협회보' 제 6권 1호, 1977년 7월) 

이러한 사실은 이박사가 서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 "대통령이 어떻게 두 아이의 취미를 

아셨는지 아들에겐 한국우표들을, 딸에겐 전통무용책을 선물로 주셨다."는 내용이 있다. 

또다른 증언으로는 '소설 이휘소'의 저자인 공석하씨가 1986년 박근혜씨로부터 들었다는 진술이 

있다. 
"당시 성북동 집으로 찾아가서 평소 박대통령이 이휘소씨를 알고 지냈느냐고 물었지요. 대답은 

'아버님은 이박사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메모록에 이박사의 이름이 적혀 있기도 했다.'는 

것이었어요." (박근혜씨가 소장하고 있는 '청와대 메모'는 언론에 일부가 보도된 '청와대 일기'

와는 다른 것으로 박대통령이 자필로 그때그때의 생각을 적은 것이라고 한다.) 


●오원철(당시 제 2경제수석 비서관, 핵개발 2인자로 알려져 있음)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하는 핵개발 사업의 책임자는 박대통령 스스로가 맡았고, 실무를 총괄 조정한 

사람은 청와대 제 2 경제수석 비서관인 오원철씨였다. 오씨는 원래 경제기획원 관공차관 이었는데 

박정희의 특명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다음은 오원철씨와의 인터뷰 내용이다.(1993년 6월 '말'지) 
-70년대에 박대통령이 방위산업을 육성하면서 총괄 실무책임을 맡겼다는데. 
"내가 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핵개발이 방위산업의 핵심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핵이 아니었다. 그런 얘기를 요새 왜 자꾸 하는지 모르겠다. 북한의 핵개발이 문제되고 있는 지금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국익에 반대된다."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알고 지냈나. 
"난 모른다. 그런 사람, 전혀 모른다." 
-핵개발이 한창때였던 70년대 중반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유명한 핵물리학자인데 방위산업 

총책임자가 모른다면. 
"아! 그분은 핵이론쪽이었다. 핵연료인 플루토늄, 우라늄보다도 더 작은 미립자, 소립자를 연구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박대통령과 이박사간에 어떤 접촉이 있었는가. 
"난 모른다. 이건 노코멘트가 아니라 모르는 거다." 


●그렇다면 박정희시대에 핵개발 사실과 그 정도는 어느정도였을까? 
과거 김영삼 대통령 시절 11대 국회 당시 경제과학위원회에 참여했던 흥사덕의원이 에너지 연구소장

을 상대로 한 질문이다. 

-지금부터는 내가 국회의원 홍사덕이가 아니라 이 나라의 최고통치자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묻는 말에 간명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2년안에 히로시마급 원폭 두 개가 꼭 필요합니다. 얼마를 밀어드리면 가능하겠습니까? 
"2억 달러 정도면 됩니다." 
-기술적인 문제는 없나요? 
"전혀 없습니다." 

더 이상은 당시 천영성 위원장의 제지로 진행되지 못하였지만, 당시 홍사덕 의원은 박정희 시절 핵개발 

사실 및 프로젝트가 상당수준까지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박사의 교통사고 3일 후인 77년 6월 19일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미 CIA의 청와대 도청방법 
"...70년 중반께 미국 관리들은 한국 국내 정치문제뿐 아니라 한국이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어떤 비밀거래

를 할는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청와대를 전자도청할 장기계획을 세웠다. 여기엔 무선 전신전파방식이 

사용됐는데, 도청의 대상이 되는 방안에 사전에 어떤 장치를 할 필요가 없었다. 무선전파를 그 방쪽으로 

비춰 서서히 이동시키면 진동하는 소리나 잡음에 부딪칠 경우 그것을 포착, 그대로 송신신키는 것이다. 

이 전파는 전파 발사장소와 도청대상간에 장애물이 있어도 관계없으며, 벽과 유리를 통과한다......" 


●"청와대에서 있었던 핵개발에 대한 논의내용을 미국측이 우리 정부측에 들이대면서 핵개발 포기를 

종용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런 내용을 도청 아닌 방법으로 어떻게 알아냈겠습니까."(1992. 4. '월간

조선' -박정희의 큰딸 박근혜씨의 증언 내용중)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정책은 3단계로 나뉜다. 즉 구상기(74.12 - 77.3), 결정기(77.3 - 78.4), 수정폐기기

(78. 4 - 80)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구분이 박정희가 핵개발을 구상, 결정하고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면서 그것을 폐기하는 3단계와 시기적으로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핵개발 의사 
1975년 6월 12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박정희는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지금을 개발을 하고 있지 않다. 만일 미국이 핵우산을 

걷어가면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게 될 것이다." 


●1977년 5월 17일 '뉴욕타임즈' 
"포드재단의 최근 연구보고서는 한국이 핵탄제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이에 대응하여 

핵확산방지를 위해 카터 대통령이 집중적인 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1977년 5월 22일 박정희가 청와대 공보비서관 선우련씨에게 한 말, 
"이번에 하바브(미국무차관)가 오면 핵을 가져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을텐데 가져 가겠다면 가져 

가라지, 그들이 철수하고 나면 우리가 개발할 생각이오." 


●1977년 6월 10일 미하원 외교위 비밀청문회 
하비브 국무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은 한국에 배치한 전술 핵무기도 지상군과 함께 4-5년 안에 

철수할 것이라고 철군정책을 재차 확인했다. 이 비공개회의에서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갖출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에 대한 논의가 주의제였다. 미국이 무기를 철수하면 한국은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박동진 외무부장관 발언에 대한 진의와 농도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 


●1977년 6월 15일 한국 월성에서 캐나다와 영국 기술을 도입하여 건술하려는 한국의 두 번째 

원자력발전소(월성 1호기)가 착공식을 가졌다. 

이와 관련한 조선일보의 기사(1977년 6월 16일자) 

'한국 핵무기 개발 가능성, 미서 우려표시' 
"....정통한 외교 소식통에 의하면 미국무성과 국방성 당국은 미국의 핵무길 철수 계획에 자극을 

받아 한국이 핵무기에 대한 새로운 꿈을 실현시킬 것인가 가능성 여부를 세밀히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식통은 하비브 국무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이 지난 철군협의차 서울을 방뭄했을 때 

이 같은 우려가 한국측에 전달되었으며, 한국에 대한 미 핵우산의 보호를 다짐했다고 말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신문들은 최근 한국의 핵무기 제조 가능 
성 여부에 대해 계속 원론의 '경계'를 환기시키면서 '한국정부는 공식적으로 핵무기 개발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 정책은 변할 수 있는 것이며, 일부 한국 과학자들은 정부에 핵무기 개발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주장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티너'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에 이어 15일 한국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다루면서 한국은 재정적 능력의 부족, 기술자의 부족, 

원전규모의 핵무기 개발 연구 기술의 미흡으로 문제가 있지만 
선적과정이나 암시장에서 행방불명된 플루토늄의 탈취, 핵원자로에서 남는 연료를 재처리해서 

플루토늄을 얻는 방안의 두가지 가능성을 지적했다." 


●이휘소가 사고를 당할 당시의 CIA 국장은 부시 전 대통령이었다. 부시의 CIA에 대해 백악관과 

국무성, 국방성 관리들은 '정치적 예언의 정확도'에 D학점을 줬지만, '고도로 기술적인 군사정보 능력'

에 있어서는 A학점을 주었다.('타임', 75.6.20) 예나 지금이나 핵확산방지는 CIA의 3대 임무중 하나로 

알려질 정도로 중대한 것이다. 
그즈음 핵정보에 대한 CIA의 열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74년 3억5천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심해탐색선을 만들어 핵정보 수집에 나섰던 예는 그 열성을 잘 보여준다. CIA는 소련 핵잠수함이 68년 

태평양에서 침몰, 바다밑으로 가라앉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소련의 핵암호, 핵전략계획을 얻기위해 

심해탐색선 글로마익스플로러를 극비리에 만들어 침몰 잠수함의 일부를 인양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부 의원들은 막대한 비밀경비에 대한 지적을 했다. 
그리고 당시 CIA는 약 7백만명의 내외 사찰명단을 갖고 있었는데, 그중 미국내 사찰 대상자는 11만 

5천명이었다. 또 CIA는 겉봉을 뜯지 않은 채 중요 사찰대상자의 우편물을 검사해 왔다. CIA가 만약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박정희-이휘소간 비밀교신 혹은 비밀간접접촉을 체크해 그 내용을 알아내고자 

했다면 그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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