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파랑주의보
게시물ID : readers_267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모찌버니
추천 : 2
조회수 : 13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10/27 18:25:53
 "너무 웃기지 않아요?” 여자가 꺄르르거리면서 웃었다. 아 그러네요 하하.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여자는 계속 웃으면서 말했다. 다소 무성의한 내 대답에도 별 상관이 없는 듯, 재잘재잘 끊임없이 말들을 뱉어냈다. 자기 친구 얘기 선배 얘기 후배 얘기…. 정작 그녀 자신에 대한 말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나는 기계적으로 계속 대답을 했다. 아, 그냥 소개팅하지 말 걸.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갸름한 얼굴에 쌍커풀은 없지만 시원한 눈매와 제법 오똑한 코, 눈이 마주치자 두 눈이 휘어지도록 유쾌하게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오늘 정말 덥죠? 오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처음 만나는 데도 긴장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인사말을 던졌다. 예의 그 웃음을 빼놓지 않으며. 성격이 시원시원해 보인다. 웃음도 많겠구나. 하지만 그녀는 말이 너무 많았고, 눈치가 없었다. 약간 사차원 인 것 같기도 했다. 그 사차원은 수컷들이 좋아할 만한, 귀여운 페이스와 어울리는 엉뚱함 혹은 예쁘장한 얼굴에선 상상하지 못한 반전매력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하릴없이 지내고 있었다. 뻔한 일상이었다. 전역할 때의 그 정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이 부풀었던 내 마음은 누가 바늘로 찌른 듯 푹 꺼져버렸다. 의자에 앉아 빨간 책을 편다. 몇 줄 읽어 가는데 여전히 아까 그 줄이다. 에이 시발! 문제집을 던진다. 발가락으로 컴퓨터 전원장치를 누르고 토끼눈이 될 때까지 마우스를 더블클릭한다. 역시 사나이는 의리 아니가! 멤버들이 모이고 늦은 새벽까지 진탕 마시다 술에 절어 들어온다. 도돌이표. 몇 번의 연애는 딱히 이렇다 할 특징이 없이 싱겁게 그냥 그저 그렇게 끝나 버렸다. “걍 막 프로토스다! 프로토스.” “뭐라카노” “빙시 아이가” “저게 딱이라캐도.” 카페 알바생한테 첫 눈에 반해서 매일 출근도장을 찍다가 결국은 고백에 성공해 전역 후 커플1호가 된 상태 녀석은, 그녀와의 첫 만남의 짜릿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너거들 어 너거가 진지에서 잠깐 나왔는데 몰랐는데 한 눈 팔고 있다 보면 어 딱 눈 돌렸는데 프로토스가 좃또 우르르 와가지고 다 때려뿌수자나. 정신 있나 없나” “없제” 다들 없제없제 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 그라모 똑같지 프로토스랑. 주문하시겠어여. 카길래 네 쁘라프치노 하나랑 하고 고개 들었는데 딱 마 눈 마주쳤는데 갑자기 머리가 뎅강 울려. 뭐 그런기다” 프로토스. 프로토스. 첫 큐에 끌리는 로맨스는 여자만 꿈꾸는 게 아니다. 상태 녀석의 온갖 호들갑스러운 말을 들으며 막연한 동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동경은 내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몸집이 커지고 부풀어서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나의 프로토스는 누굴까. 첫 눈에 반한다는 건. 뭘까.  

 창밖엔 더위가 한창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지쳐 보인다. 그래, 여기는 에어컨 때문에 시원하기라도 하니까하며 위안을 삼는다. 그녀는 아직도 재잘거리고 있다. 갑자기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떨칠 때에, 그야말로 미칠 듯한 더위와 갈증 속에서는 꼭 생각나는 곡이 있다. 친구의 성화로 락페스티벌에 같이 가게 되었을 때, 30도에 육박하는 그 날씨 속에서 친구 놈에게 욕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더위를 찢을 듯한 큰 목소리였다. 그 사람은 더위라는 건 당최 모르는 듯 신나서 무대를 방방 뛰어다니고 있었다. 시원한 물이 무대장치에서 쏟아졌다. 예고도 없이 물을 맞았지만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경쾌한 드럼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일렉기타는 찢어질 듯 현란한 소리를 내었다. “너를 처음 봤을 때 난 정신 차릴 수 없어 넌 파도처럼 나를 삼켜 나의 마음을 삼켜-” 시원한 발성과 상쾌한 멜로디. 그리고 상태 녀석이 심어주고, 내가 키웠던 그 첫 눈에 반하는 사랑에 대한 로망을 일깨우는 가사. 갑자기 무언가가 내 마음 속에서 터져버렸다. 나는 좀 전의 나를 잊고 마구 뛰었다. 그 이후로는 숨 막힐 듯 더운 날만 되면 그 노래가 떠올랐다. 

 “혹시 노래 들으실래요?” 성당친구 얘기를 하고 있던 그녀를 제지했다. “노래요?” 순간 너무 무례했나 싶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반색했다. “아 좋죠.” 하더니 이어폰을 찾는다며 자기 가방을 뒤진다. “아 저도 이어폰 있는데….” 그녀에겐 들리지 않나 보다. 노란 병아리가 그려진 이어폰을 재빠르게 꽂더니 “아 그런데 제가 사실 엄청 좋아하는 노래가 있거든요. 죄송한데 제가 좋아하는 노래부터 들으면 안될까요?” 하고 묻는다. “네. 그러세요.”  이 노래는요. 혹시 그 밴드 아세요? 아. 모르시는구나. 제가 진짜 좋아하는 밴드인데! 자 들어보세요. 그녀는 즐겁게 웃으며 노래를 튼다. 조금 듣는가 싶더니, 아 맞다 이거 말고 이걸 틀었어야 되는데! 다시 노래를 바꿔 튼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여자도 더위에 지친 듯 나른하고 조용한 목소리다.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너무 덥다. 

 그녀는 좋은 카페를 알고 있다고 했다. 에그타르트와 아메리카노 맛이 기가 막힌 곳. 문 밖을 나서자 더운 공기가 훅 하고 들어온다. 벨소리가 울렸다. “잠시만 전화 받고 올게요!” 와도 돼요?도 아니고 올게요? 그래 그러려니. 어차피 오늘 보고 말 사이인 것을. 골목 모퉁이에 그늘이 져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니 반대편 골목으로 돌아가고 있다. 전화를 하고 알아서 이쪽으로 오겠지 싶어 나도 그늘 진 골목 모퉁이로 돌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소음에 섞여 아주 옅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노랫소리가 이끄는 대로 다가갔다. 작은 카페였다.  

 인기척이 나자 밖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난데없이 물이 튀었다. 처음엔 한 방울이었는데 갑자기 무수히 많은 물방울이 튀었다. 촤아악-.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 나는 눈을 뜰 수 없어 한 쪽 눈을 감는다. 멀리서 희멀건한 물보라가 인다. 물이 밀려오고 있다. 파도. 파도다. 너무 거친 파도였다. 몸을 꼿꼿이 세울 수 없을 정도다. 나는 자꾸 물을 먹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억지로 치켜 뜬 한 쪽 눈의 시야 안으로 그녀가 들어온다. 상당히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입 모양으로 보아 괜찮냐고 묻는 것 같다. 나는 무언가를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무얼 말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노래의 긴 전주 끝에 가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를 처음 봤을 때 난 정신 차릴 수 없어 넌 파도처럼 나를 삼켜 나의 마음을 삼켜-” 또다.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또 터졌다. 의식이 사라져갔다. ​
출처 예전에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단편소설을 읽고 영감을 받아 그냥 써본 건데 그 소설이 뭐였는지 도저히 못찾겠어요.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