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노비라는 신분은 내세울만한 가문이 있는 것이 아닌 관계로 딱히 선계(先系)에 대한 관심이나 집착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에도시대 일본의 예에서 보듯 평민조차 성씨 없이 사는데 별 지장이 없었는데, 하물며 노비야 뭔 불편함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일괄적으로 '노비는 100% 성씨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데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1. 성씨가 있는 노비의 기록이 있다.
링크된 기사는 얼마 전에 발견했다는 18세기 노비들의 계문서입니다. 여기를 보면 노비들은 순우리말 이름을 쓰는 와중에도 반드시 성씨와 함께 이름이 기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기사를 읽다 보면 함께 발견된 양반 가문의 분재기에는 노비들의 성씨가 기재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노비의 성씨가 행정적/법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비들 본인이 작성한 문서에 성씨가 있다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사례를 들 만한 유명한 노비 자체가 몇 없으므로 유명한 사례 하나만 쓰겠습니다. 링크는 영월 엄씨 양반 후손으로 신분을 세탁하였다가 발각된 노비 '이만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건 이 사람 본명이 '이만강', 즉 이씨라는 겁니다. 적어도 노비가 성씨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태클을 건 기록은 없습니다.
2. 노비종모법
알다시피 '노비'에 대한 규정 자체가 조선시대 500년에 걸쳐 변화가 있었고, 초창기 노비종부법이었던 것이 세종때 노비종모법이 되었다가 일천즉천이 되었다 다시 영조 때 노비종모법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 노비종모법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성씨가 있는 양인(평민) 남자가 천인(노비) 여자와 혼인을 하면 자식은 노비가 됩니다. 조선시대 장영실(아버지가 원나라 유민이라는 기록), 정충신(아버지가 동네 아전)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 아버지가 성씨가 있으므로 자식도 자연히 그 성씨를 쓰게 됩니다. 즉 자식은 '성씨 있는' 노비가 되는 겁니다. 납세의 의무조차 없는 노비인만큼 이 성씨가 행정적으로 무슨 의미를 지녔을런지는 모르지만 굳이 멀쩡히 있는 성씨를 대를 물려가며 쓰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