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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독소전이었다. 독소전 과정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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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GalaxyTrain
추천 : 8
조회수 : 2854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6/09/19 16:36:55
제2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독소전이었다.  영국-독일전, 미국-일본전은 사실상 보조전선이었음.
 
독일 전사자의 70% 이상이 소련과의 전투에서 발생되었고 두 나라간의 전투중 유명한 전투들은 웬만하면 수십만씩 동원되었고 좀 크 다 싶으면 100만 이상씩 동원된 인류역사상 가장 큰 전투들이었다.
 
 
1939년 가을 : 독일 - 소련, 폴란드를 동맹아닌 동맹 형태로 양분해서 먹음. 서로 언젠가는 전쟁을 치러야 할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당장은 no
 
 
1939년 11월 - 1940년 3월 : 소련의 핀란드 침공. 일명 겨울전쟁 발발. 폴란드를 손에 넣은 소련이 핀란드까지 접수하려고 전쟁을 벌였으나( 핀란드 특유의 지역적 특색과(숲이 많고 호수가 많음) 스키부대의 활약 등 게릴라에게 많이 당해 (또 소련군의 형편없는 전술) 정전협정을 맺고 소련군이 후퇴함.
소련군 148만, 핀란드군 34만 격돌. 소련군 13-14만 사망,실종,포로 발생, 핀란드군 3만 이하 발생
독일 : ㅋㅋ 소련 좆밥이네. 핀란드 하나 잡지 못하네. 언젠가 우리랑 싸워도 안되겠구만. 핀란드랑 동맹맺고 싸워야지.  소련 : 우리가 이렇게 약했나?
 

1940년 봄, 여름 : 독일 - 덴마크, 노르웨이, 베네룩스3국, 전격전으로 북부 프랑스까지 먹어치움 (남프랑스는 bc 괴뢰정부수립),
독일 : 프랑스는 우리 밥이네. 보불전쟁때도 그랬는데 ㅋㅋ, 소련 : 독일 뭥미? 주변이 다 쓰레기인가? 얘들이 센건가?
 

1940년 가을-1941년 초 : 독일 바다사자작전으로 영국 공습해서 피해를 입혔으나 결과적으로 실패, 
독일 : ㅆㅂ 안되네..  소련 :  ㅋㅋ 역시 독일은 안돼.
 

1941년 봄 : 이탈리아의 그리스침공이 실패하고 오히려 역관광 당하자 (1940) 독일 동맹국 이탈리아를 사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욕으로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침공 점령, 
독일 : 이탈리아가 싼 똥 치우느라 고생했네... 그래도 우리가 차지해서 소련으로 가는 발판이 되었군.   소련 : 어쭈구리? 그래도 우리랑은 안싸우겠지
 

1941년 6월 : 독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300만 병력으로 소련 기습침공해 빠른 속도로 점령 (남부집단군 -> 키예프점령, 중부집단군 -> 민스크점령, 모스크바로 진격, 북부집단군 -> 레닌그라드 포위),( 독일 전사자 및 실종자 20만, 소련 전사자 및 실종자 290만, 포로 335만 발생(키예프 전투에서는 65만 포로))
독일 : ㅋㅋ 소련 별거 아니네. 허수아비들, 소련 : 어..어...어....  멘붕
(소련이 일방적으로 밀린 이유 : 기습공격에 독일의 전격전과 같은 작전도 있지만 유능한 지휘관 부족도 큼. 1930년대 스탈린의 독재강화를 위해 대숙청 단행, 미하엘 투하쳅스키 (종심타격이론 주장) 같은 유능한 장군들을 죽이거나 쫓아냄.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아부꾼들 위주로 남음, 군사력 저하)
 

1941년 10월-1942년 1월 : 독일 모스크바 점령하기 위해 공격(모스크바 공방전 발생) 소련 - 병력부족으로 여자들까지 전선에 투입 (독일 25만-40만, 소련 65만-128만의 사상자 및 포로 발생), 소련 간신히 독일 공격 막아내고 밀어냄.
독일 : 좀만 더 밀어붙이면 됐는데 아깝.... (모스크바 30km 앞까지 진격), 소련 : 우리도 밀리기만 하는거 아니다. 꼭 막아낸다.
 

1942년 여름-1943년 2월 : 독일 남부집단군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와 바쿠의 유전을 노리며 진격 A집단군(클라이스트 지휘) 카프카스산맥을 넘어 바쿠의 유전으로 향함, B집단군(파울루스 지휘, 독일6군 주축,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연합군 구성)은 A집단군이 역공을 당하지 않도록 스탈린그라드와 일대를 점령키로 함. A집단군 처음에는 진격 잘했으나 카프카스 산맥에서 막혀 진격못함. B집단군 스탈린그라드에서 개싸움을 하며 폐허가 된 도시를 야금야금 먹어가며 남은 소련군을 포위 공격하지만 피해 속출. 소련군 총사령관 주코프의 우라노스 작전으로 독일군 B집단군을 역포위로 B집단군 공격. 독일 B집단군을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만슈타인의 구출대를 보내지만 전력부족으로 실패. 단, A집단군은 이틈을 타서 후퇴 성공. 파울루스의 B집단군 결국 항복. (A집단군을 위해 B집단군이 희생된 격)
(독일 40만, 루마니아, 이탈리아, 헝가리 연합군 45만 사상 및 포로, 소련 48만 전사 및 포로, 민간인 피해 다수 발생) 양측 모두 심각한 피해였지만 소련, 독일군에게 대규모 전투에서 최초로 이기고 반격함) 
독일 : 이럴수가... 우리가 전투에서 대패하다니..  소련 :  이제부터 복수의 시작이야 기대해라.
 

1943년 2월-3월 : 3차 하르코프 공방전 발생.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로 신이 난 소련군 독일점령지역 쪽으로 쾌속 진격함. 하지만 보급선이 길어지며 약점 노출됨. 만슈타인의 독일군 소련군 포위 공격해 격퇴하고 다시 재반격. (독일군 4500 전사 및 실종, 소련 45,000 발생)
독일 : 한번 이겼다고 우쭐대지 마라. 니들은 우리한테 안된다.  소련 : 아... 이 ㅅㄲ들 한방에 무너지지 않네.. 일단 재정비하고 다시 붙어야지.
 
 
이후 몇달간 서로 눈치만 보며 전력 보충..
 
 
1943년 7월-8월 : 쿠르스크전투 발생. 쿠르스크 일대의 돌출된 부위를 점령하고 전쟁의 우위에 서고자 독일 성채작전 감행. 쿠르스크의 남쪽과 북쪽으로 병력을 나누어 진격. 독일군 78만, 소련군 191만 격돌. 초반에는 독일의 승리로 일부 전진했으나 소련의 반격으로 전선 고착. 1943년 7월 미국의 이탈리아 시칠리아 침공으로 (이미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군은 철수한 뒤) 이탈이라가 위험해지자 쿠르스크는 일단 보류하고 이탈리아 방어에 병력 투입.
독일군 17만 전사 및 실종, 포로, 소련군 42만 발생. 대규모 전차전으로 독일군 전차 1000-1100대 파괴, 소련군 전차 7000-8000대 파괴. 전술적으로는 독일군의 승리, 소련군의 패배였으나 독일군의 진격실패 및 소련군의 반격으로 전략적으로는 소련군 승리.
독일 : 전력을 쏟아부었는데.... 이것이 한계인가....    소련 : 독일군 힘이 다 떨어졌구만. 이제부터는 우리가 공세의 주도권을 쥐었다
 
 
1943년 가을-1944년 봄 : 전 전선에 걸쳐 소련군 반격. 북부집단군의 레닌그라드 포위가 1944년 1월에 끝나고 후퇴, 중부집단군도 조금씩 밀리는 중, 남부집단군 타격이 가장 큼. 우크라이나 곡창지대, 크림반도를 소련에게 빼았기고 드네프르강이라는 천연방어지역까지 넘어감. 독일군 최고의 명장이라던 만슈타인도 책임을 물어 해임
독일 : 어디부터 막아야 하는지.... 병력도 부족한데...  소련 : 이런 기분이구나. 하나씩 야금야금 먹어들어간다는게..
 
 
1944년 6월 - 8월 : 바그라티온 작전. 소련의 연합군(미국, 영국)에 제2전선을 만들어 달랄 것을 요구해 미국 영국 연합군이 1943년 7월 시칠리아 상륙, 9월에 이탈리아 본토 진입해서 밀고 올라갔지만 독일군은 케셀링 원수의 지휘아래 이탈리아 중부지역에서 완강히 저항해 전선이 고착됨. 이에 스탈린은 연합군에게 프랑스로 상륙해 달라고 요청.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행됨. 독일군이 서쪽에도 신경써야 하며 당황하는 사이 북부와 남부집단군의 힘이 떨어졌지만 아직 버티고 있는 중부집단군을 궤멸하고자 바그라티온 작전 개시. 독일군 85만과 소련군 233만이 격돌해 중부전선 곳곳에서 접전. 1941년의 독일군이라면 이쯤되는 소련군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전쟁을 몇년 하는 동안 독일군의 경험많은 장교와 사병들이 많이 사라져 병력의 질이 떨어진 상태였고, 소련군도 처음에는 무능했지만 전투를 거듭하면서 전술이해도가 높아지고 전력이 강화됨. 전투결과 소련의 빼았기었던 땅 전체를 회복하고 동유럽국가인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전선에까지 도달함. 독일군은 정신없이 무너지다가 총통의 소방수라 불리며 방어전의 귀재인 모델장군이 어느정도 전선을 추수렸으나 전세는 확 기울어짐. 독일군 전사 및 실종 25만, 포로 15만 발생, 소련 전사 및 실종 18만 발생.
독일 북부집단군중 상당수가 쿠를란트 반도에 갇혀 고립되었으나 히틀러가 소련으로의 반격이 필요하고 핀란드의 배신을 우려해 후퇴를 불허함.
독일 : 이제는 안되는 구나.. 독일 본토라도 지켜야 할텐데...   소련 :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독일영토로 진입하는구나. 기다려라 히틀러
 
 
1944년 12월 -1945년 2월 : 벌지전투 발생. 서쪽에서 진격하던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 독일군 최후의 도발작전. 소련군 및 연합군의 전투 승리로 독일은 후퇴를 거듭했지만 연합군측의 보급선이 길어져 전선이 약간 소강상태로 접어든 틈을 타 독일군의 벨기에 아르덴 지방을 기갑부대로 돌파해 (1940년 프랑스로 처들어갔던 방식과 비슷) 서부전선의 연합군을 포위 궤멸시키려 함. 독일군 20만과 미국, 영국 연합군 83만이 격돌. 미국, 영국의 9만이 전사 및 실종되었고 독일도 85,000 가량의 피해를 봄. 작전실패로 독일 최후의 반격은 끝이 남.
독일 : 더 이상은 무리.... 전쟁을 어떻게 끝맺어야 하지?  소련 :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구만. 우라! 계속 돌격
 
 
1944년 가을-1945년 초 :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잇달아 소련에게 항복하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 독일편에 섰던 핀란드도 소련과 조약을 맺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
독일 : ......  소련 : 하나라도 더 접수해서 전쟁 끝나도 우리 목소리를 키워야겠다.
 
 
1944년 12월 - 1945년 2월 : 부다페스트 공방전. 1944년 전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헝가리의 집권자 호르티는 독일과의 동맹을 깨고 소련측에 붙으려고 함. 독일이 사전에 계획을 알고 호르티를 물러나게 하고 친독성향의 지도부를 내세움. 소련은 독일의 동맹국을 모조리 궤멸시키고 독일본토로 들어가기 위해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를 공격하기로 함. 독일 및 헝가리 연합군 18만과 소련군 50만이 붙음. 독일 및 헝가리의 10-15만이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고 소련군은 8만이 피해를 입음. 이때의 독일군과 소련군 수준은 3년전과 너무나도 다름.
독일 : 독일 본토밖에 남지 않았구나. 항복하든지 끝까지 저항하든지...  소련: 독일로 가는 대문이 활짝 열렸다. 마지막 종지부를 찍기 위해 가자.
 
 
1945년 4월 -1945년 5월 : 베를린 전투. 1945년 1월부터 독일 본토로 진입하기 시작한 소련군은 독일군의 거센 저항선을 하나씩 뚫으며 진격하여 4월 19일 베를린을 포위해 20일부터 베를린을 포격하기 시작.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른 지역 전선의 지휘관들도 흔들리며 미국이나 영국에 투항하는 장교들이 속출하기 시작함(미국 영국에 잡히면 전쟁포로 대우 받으며 감옥에 가도 오래 있어도 되지 않지만 소련에 잡히면 생명보장조차 안될 수 있으니). 히틀러를 사로잡고 최후의 승리를 얻기 위해 소련군 250만이 투입되어 독일군 76만과 전투. 약해질대로 약해진 독일군을 몰아부쳐 4월 30일에 히틀러의 지휘벙커 400m앞까지 도달. 5월 1일에 히틀러의 자살과 후임으로 지명된 되니츠가 연합군에게 항복하여 전쟁끝. 소련군 8만 전사, 독일군 9-10만 전사, 48만 포로.
 
◆ 전쟁 감상 포인트
 
1. 독일이나 소련이나 둘다 욕심만 잔뜩해 주변국을 집어삼킬 생각만 했다. (폴란드 나눠 먹기, 핀란드 침공, 유고 및 그리스 침공 등)
 
2. 소련군은 1930년대 중후반 발생한 대숙청기간 이후 군사력이 상당히 약화되었고,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전쟁과 관련되어 인류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3. 소련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원 동원하여 독일의 공격을 막아냈고, 병력의 숫자로 무기의 질이나 전술 수준의 차이 등을 극복해 냈다.
 
4. 소련의 끝없는 랜드리스는 독일의 보급선이 길어지게 만들었고 병력이 부족한 독일에게는 큰 골칫거리였다.
 
5. 소련은 독일에게 대패를 경험하면서 강군으로 거듭났고 독일은 경험이 풍부한 부사관과 유능한 장교들의 전사 숫자가 늘어나면서 병력의 질이 하락해 초기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래도 1941년 소련군의 멍청하게 당한것과는 비교하지 못함)
 
6. 스탈린은 전쟁초반에 자기가 지휘를 하려해서 어마어마한 패배를 경험한뒤 주코프같은 장군에게 많은 부분을 위임했다. 반면 히틀러는 정쟁초반에 자신의 계획대로 전투에 승리하거나 작전에 성공(대표적으로 데미얀스크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의 진격실패와 소련군의 반격으로 독일군 1개군단이 데미얀스크에 고립되어 소련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는데, 히틀러가 공중보급을 하고 버텨내면 독일군이 전력을 재정비해 구출하고 전선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 실제로 독일군을 구출함. 이후 자신이 유능하다는 착각에 빠지게되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도 포위된 독일 및 동맹군에게 공중보급으로 버티면 구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함. 그러나 데미얀스크와 달리 스탈린그라드에 갇힌 병력은 몇 배 더 많아 공중보급이 불가능했음)하면서 자만심에 빠져 자기가 원하는대로 전쟁이 흘러가지 않으면 지휘관을 해임하는 등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해 오히려 패전에 이바지했다.
 
7.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군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태평양 전쟁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의 미국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는데, 일본이 소련으로 진격할 생각이 없다는 정보를 획득해 소련의 극동군중 상당수를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일본은 사실 1939년에 발생한 노몬한, 장고봉전투에서 소련군에게 격파당하고 나서 소련쪽으로는 눈길을 안돌림.
 
8. 독일군은 소련으로 진격하면서 획득하게 된 우크라이나 지역 사람들의 민심을 이용하지 못함. 우크라이나 지역은 예전부터 소련의 지배(제정 러시아때부터)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반기를 들었다. 독일군이 들어왔을때 처음에는 해방군으로 반겼으나 독일군도 소련군과 별 다를게 없다는것을 알게 되어 협력을 하지 않게 됨.
 
9. 미국의 소련 지원. 아무리 소련의 랜드리스와 끝없는 병력보충(1944년 이후에는 소련도 병력숫자의 한계에 도달하기도 함)에 독일이 쩔쩔맸다고 해도 미국의 어마어마한 트럭이나 무기같은 전쟁물자 지원이 아니었다면 반격을 제대로 하기는 힘들었을 듯. 아마 전선이 고착화되거나 소련이 반격해도 어느정도에서 멈추었을 가능성이 높음.
 
10. 동맹국들의 뻘짓. 무늬만 3국동맹중 한 축이었던 이탈리아의 허약한 전력을 땜빵하기 위해 독일이 동분서주했으며, 일본의 무모한 대미 전쟁으로 소련에 대한 견제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
 
11. 독일의 기본자원 생산력은 전쟁말까지 소련을 압도했다. 석탄은 3배, 강철은 2-3배, 알루미늄은 3-4배. 희한한 점은 전차, 항공기, 자주포 등 무기생산의 경우 1941년부터 전쟁말까지 소련이 독일보다 많이 생산했는데, 전쟁 판세가 급격히 소련쪽을 기울던 1944년에 독일과 소련과의 무기생산량의 격차는 급격히 줄어들어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 독일이 전투에서 지고 있는데 무기는 많이 찍어내고 있었음.
 
12. 양측의 군사적 피해상황. 독소전 결과 소련군은 760만명이 사망, 실종되었고, 520만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그 중 260만명이 포로 수감중에 사망했다.
독일군은 310만명이 사망, 실종되었고, 330만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수감중 최대 120만이 사망했다. 전쟁초기에는 전사자 교환비가 1:10에 육박할 정도로 독일이 압도적이었으나 전쟁 후반으로 가면서 1:1 이거나 1:2  정도로 격차가 아주 좁혀졌다. 소련은 군사적 피해말고 민간인까지 포함한다면 2000만이 넘는 숫자가 전쟁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독일 북부집단군의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100만 이상의 소련 민간인이 아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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